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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5천, 챔피언이 감내해야 하는 비용이에요

2021.02.26
최현미

권투 세계 챔피언 최현미의 머니 스토리

 

북한에서 11살 때 권투를 시작했어요.

20년 동안 오직 권투를 위해 싸워온 WBA(World Boxing Association) 슈퍼페더급 세계 챔피언 최현미입니다. 프로로 활동한 것은 13년 차고, 경기 전적은 총 18승 0무 0패로 한 번도 져본 적 없어요.

북한에서 11살 때 권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집안의 반대가 심했죠. 부모님은 제가 음악을 하길 바라셨거든요. 그런데 권투 하겠다고 계속 버티니까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하시더라고요. 그러다 마지못해 허락해주셨어요. 운동이 힘들다는걸 알고 계셨고, 북한에서는 우리 집이 남들보다 좀더 부유하게 살았으니까, 운동하다가 힘들면 바로 그만두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도 권투를 하고, 전국 신인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오면서 부모님 생각이 바뀌셨어요. 제가 권투를 절대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갈 거라는 확신이 드신 거죠. 그때부터 부모님은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세요.

특히 아빠는 제 권투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데요. 북한에 있었을 때도 가족들 밥 안 굶기고 제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셨던 분인데, 한국에 와서도 딸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어요. 벌써 10년 넘게 매니저로서 제 곁을 지켜주고 계시거든요.

최현미

 

프로 13년, 이기는 이유를 알게 됐어요

작년 12월, 미국에서 세계 챔피언 8차 방어전을 치렀는데요. 이번 방어전은 코로나 때문에 다른 때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호텔에 머물면서 시합 준비를 했는데, 공간도 한정되어있고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4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거든요. 40분이면 프로들에게는 몸에 열을 올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그런 환경 속에서도 승리해서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제가 8차 방어전을 치렀다는 것도 잘 모르시더라고요. 대한민국 선수로 뛰면서 항상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부분이죠.

여러 번의 경기를 통해 제가 이기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경기에 올라갈 때 상대방 선수를 ‘죽일 거야’ 대신 ‘운동한 만큼의 딱 50%만 발휘하자’는 마음으로 올라가요. 욕심을 좀 내려놓고 가면 경기가 잘 풀리더라고요. 

긴장감을 떨쳐내기 위해 경기 전 충분한 연습을 하고서 올라가요. 지금 속한 팀에는 ‘곤잘레스’라는 선수가 있는데요. 남자 선수라 그런지 운동량이 확실히 엄청나거든요. 그 친구랑 매일 똑같이 연습을 해요. 그렇게 연습하면 확실히 자신감을 가지고 링 위에 올라갈 수 있더라고요.

토스 마이머니스토리

 

1억 5천, 챔피언이 감내해야 하는 비용이에요

권투 세계 챔피언은 6개월에 한 번씩 방어전을 치러야 해요. 경기할 때마다 1억 5천만 원이라는 돈이 들고요. 그러면 1년에 3억 원씩 써야 한다는 건데, 제가 그 정도로 부자는 아니거든요. 매번 1억 5천만 원을 후원해줄 스폰서를 제가 직접 구하러 다녀야 해요. 물론 저 혼자 쓰는 돈은 아니에요. 심판진과 경기를 하는 모든 선수에게 지급되는 비용입니다.

한국에 권투라는 운동이 잘 자리를 잡고 협회가 제대로 역할을 한다면, 사실 이렇게 챔피언이 직접 돈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되겠죠. 정말 웃기게도, 방어전을 치르지 못하면 챔피언 자격이 자동으로 박탈돼요.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방어전 한번을 못 치러서 챔피언 벨트를 뺏길 수도 있다니. 

미국의 권투 팬들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라 할 것 같아요. 해외 언론과 인터뷰할 때도 스폰서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어떤 기업에서 후원을 받고 있냐고 물어보는데, “나이키랑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한국 기업은 후원하지 않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후원 기업 중 한국 기업은 없다 말하면 놀라는 표정을 짓는데… 그때마다 조금 부끄럽더라고요.

최현미

 

“현미, 너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다.”라 이야기하는 에이전트와 계약했어요.

이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요. 미국에서 시합하고 싶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권투 선수인 메이웨더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메이웨더가 운동하는 체육관이 있는 라스베이거스로 비행기 타고 무작정 간 거죠. 영어를 잘 못 해서 미국에 있는 친구 한 명을 데리고 갔어요. 

메이웨더 측 관계자를 만나서 제가 세계 챔피언이라고 했더니, 그쪽에서 “장난하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갔거든요. (웃음)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라 했어요. 그쪽에서 확인하더니 아주 놀라면서 원하는 조건을 묻더라고요. 조건을 얘기했더니 바로 계약하자 하더라고요. 

그렇게 메이웨더 측과 프로모션 계약을 하려고 했는데요. 막상 계약서 내용을 보니 제가 원하는 시합이 아니라 에이전트가 원하는 시합을 하게 되어 있더라고요. 유명 선수들이 소속된 거대 에이전트 특성상, 경기를 할 때마다 힘있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렇게 메이웨더 측과의 계약을 뒤로 하고 여러 에이전트를 찾아다니다가 지금의 에이전트를 만났어요. 

이 에이전트와 계약한 이유는 “현미, 너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다.”라는 말 때문이었어요. 챔피언에 대한 실질적인 예우도 엄청났고요. 대표는 물론 팀원들까지 모두 따뜻하게 환대해주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든든한 팀에 있다 느껴요.

토스 마이머니스토리

 

결국 직접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생각해요

이제 미국에서 3년 정도 생활했는데요. 이곳에서는 시합이 굉장히 많이 열려요. 미국 내 권투 인기를 잘 보여주는 것이죠. 빅 매치 시합이 2주에 한 번씩 있고, 상금 규모도 차원이 달라요. 그리고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팀이든 스폰서든 알아서 다 준비해주니까, 선수는 운동에만 집중할 수가 있어요. 심지어 시합장에서는 제가 위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경호원들이 항상 동행하고요. 권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한국과는 많이 다른 거죠. 그래서인지 다른 세계 챔피언들은 저한테 “현미, 너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나온 것 같다.” 말하곤 해요.

제가 탈북자라는 점 때문에 미국에서도 저를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 있어요. 한국의 기사가 잘못 번역되어서 ‘도망자 챔피언’이라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온 적도 있고요. 한 명의 세계 챔피언으로서 미국에 시합하러 온 건데, 이러한 시선을 받는 것 자체가 많이 아쉬워요. 

한국도 별반 다를 바는 없어요. 현재 대한민국에 권투 세계 챔피언은 제가 유일한데요. 아직까지도 ‘챔피언’이 아닌 ‘탈북 복서’라는 점으로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탈북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후원자를 못 찾은 적도 많고요.

그런데 이런 억울함을 굳이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억울하다고 해봤자 지금의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결국 직접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 미국에서 최고의 트레이너, 최고의 팀 그리고 최고의 시설에서 운동하고 있는데요. 더 열심히 갈고 닦아, 제 실력으로 이런 낡은 생각들을 부수고 싶습니다.

토스 마이머니스토리

 

제 목표는 애당초 돈을 많이 받는 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는 권투 선수가 되는 거였어요.

권투를 해서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제가 노력한 대가를 인정받고 싶을 뿐이에요. 간혹 여자 선수들이 남자들보다 파이트 머니를 적게 받는다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요. 그건 여자 권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요. 대한민국에서는 제가 여자 권투 1세대인데요. 지금 속도로 본다면 곧 남자 복서들의 파이트 머니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간혹 UFC나 MMA로 이적하라는 분들도 계세요. 한국에서 권투는 너무 비인기 종목이니까 차라리 거기 가면 성공할 것 같다는 거죠. 그런 말들은 권투의 역사나 규모에 대한 무지 때문에 나오는 것 같기도 해요. 미국에서는 권투 시장이 아주 활성화가 되어있어요. UFC나 MMA보다 더 역사가 깊기도 하고요. UFC도 엄청나게 큰 단체이긴 하지만, 권투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권투의 경우 총 파이트 머니가 150~300억 정도 되는 경기가 있을 정도예요. 파이트 머니 규모만 보아도 UFC를 압도하는거죠.

제 목표는 애당초 돈을 많이 받는 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는 권투 선수가 되는 거였어요. 돈보다 명예를 더 중요시하고, 돈보다 세계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더 값지게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을 때는 사기를 당해서 파이트머니를 거의 받지도 못했어요. 

그런데도 챔피언 타이틀을 지키고 싶어서 미친 듯이 노력해왔습니다. 이후 경기에서 승리할 때마다 제 파이트머니는 점점 커지고 있지만, 이건 돈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얼마만큼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거든요.

최현미

 

세계 챔피언이 돼서도 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어요

권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챔피언 벨트를 처음 거머쥐었을 때예요. 18살에 최연소 세계 챔피언이 되었는데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더라고요. 그때 영상을 보면 ‘와 진짜 못 한다, 어떻게 저렇게 경기를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됐지?’ 싶을 정도의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MBC 무한도전팀과 함께했던 2차 방어전도 잊을 수 없어요. 광복절에 맞춰서 일본인 선수를 상대로 슈퍼페더급 타이틀을 걸고 싸웠고, 당시 제 경기가 무한도전을 통해 방영됐거든요. 그 시합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 시합이 끝나고 많이 울었는데요. 그때의 환경도 그렇고… 저에 대한 관심도 그렇고… 만감이 교차하더라고요.

권투를 하면서 돈 문제로 힘들었던 적이 많았어요. 아마추어 선수 시절에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서 운동 선수에 대한 지원이 없었어요. 아마추어 시합은 보통 토너먼트 식으로 일주일 동안 열리는데, 지방에서 시합이 열리면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해서 숙박비부터 식비까지 꽤 많은 돈이 들거든요. 

당시 가족이 한국에 온 지 2년 밖에 안 됐기 때문에 집에서도 도움을 받기 힘들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학원에 갈 시간에 저는 시합을 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하느라 바빴죠. 그래도 시합에서 이기고서 받은 금메달을 보면서 기뻐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프로 데뷔를 한 후에도 방어전을 위한 스폰서를 구하러 뛰어다니고 고개를 숙이셨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짠해요.

다음 시합은 2021년 4월에 열릴 WBC 세계 챔피언과의 통합 타이틀 매치예요. 그 시합에서 이기면 WBA, WBC 통합 챔피언이 됩니다. 제 권투 인생의 최종 목표가 WBA, WBC, IBF, WBO 총 네 개의 리그에서 통합 챔피언이 되는 거거든요. 현재 네 개 리그 챔피언의 국적은 영국, 미국, 프랑스 그리고 제가 속한 대한민국이에요. 리그 챔피언 중에서 제가 유일한 아시아인이고, 한국에서 권투라는 스포츠가 힘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챔피언들이 저를 얕보고 있는데요. 실력으로 제대로 겨뤄보고 싶습니다.

토스 마이머니스토리

 

은퇴 후 후배들의 다리가 되어주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받는 것보다 주는 데에서 더 큰 행복감을 느껴요. 예전에 한 기업의 홍보대사를 하면서 대학생들과 캄보디아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적이 있어요. 봉사활동이 하나도 안 힘들고 오히려 힐링이 되더라고요. ‘이 사람들은 나보다 더 어렵게 사는데도 이렇게 행복을 느끼고 사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도움으로 상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오히려 제가 더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제 제 권투 인생도 점점 종착지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마흔 정도가 마지노선이 될 것 같은데요. 그때까지 몸이 받쳐준다면 다행이지만... 지금도 경기를 할 때마다 부상이 생기고, 새로운 후배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마흔까지 권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해요. 하지만 권투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늘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보니 은퇴 후 후배들의 다리가 되어주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지금까지 늘 아쉬움 속에서 선수 생활을 해왔거든요. ‘만약 제대로 된 스폰서가 있었다면 더 나은 환경에서 시합하고 있지 않았을까?’, ‘더 나은 환경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감정을 후배들이 겪지 않도록, 후배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뚫고서 길을 만들어 주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은퇴 후에는 정말 마음 편하게 가족을 꾸려서 행복해지고 싶어요.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제 권투 인생의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최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