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 권을 물고 있는 까치

세뱃돈은 언제부터 줬을까?

by 심용환

또다시 설이 돌아왔다. 세뱃돈을 주는 자는 생각보다 고민이 많다. 주머니 사정을 확인해야 하고 나름대로 적절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세뱃돈을 주면서 누리는 흐뭇함과 부담감 사이에서 스스로 마음의 평안을 찾아야만 한다.

세뱃돈을 받는 자 역시 ‘대목'을 앞둔 설렘과 부모님께 세뱃돈을 뺏기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넘쳐난다. 세뱃돈을 둘러싼 낯설지 않은 설 풍경. 그런데 세뱃돈은 언제부터 주기 시작한 걸까? 도대체 누가 이런 문화를 만든 걸까?

세배는 있었지만 세뱃돈은 없었다

세배 문화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다. 고려 문화의 중심은 불교. 해마다 정월이 되면 절에서 ‘통알(通謁)’이라는 신년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스님들과 신도들이 모여 불교 예식을 치른 후에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세배를 했다.[1] 처음에는 승려들끼리만 세배를 했는데 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민중들의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스님들과 신도들 간의 새해 인사로 발전한 것이다.

조선 시대가 되면 유교 문화가 정착되고, 민중 문화도 발전하면서 세배의 성격이 바뀌어갔다. 조선 시대 세배 문화의 핵심은 벼슬아치들 간의 안부 인사였다. 조선의 예법을 정리한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정월 초하루에는 종묘를 중심으로 다양한 예식이 열렸다. 관청은 3일 동안 일하지 않았으니 오늘날 연휴와 비슷한 풍경이다. 이때 하급 벼슬아치들은 고위 관료들을 찾아 문안 인사를 했다.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는 조선 전기의 세시 풍속에 대한 정보가 많이 담겨 있다. 성현은 이 책에서 세배를 ‘벼슬아치들 간에 이루어진 정월 초하루의 만남'이라고 설명하였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부하 직원이 상사를 찾아가 얼굴도장을 찍는 모습이 세배였던 셈이다.

절에서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는 문화가, 양반 사대부에게 문안을 드리는 문화로 바뀌었고, 이것이 향촌 공동체에서는 가족이나 마을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드리는 문화로 퍼져나간 것이다. 희소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천년이 넘는 세배문화의 번성에도 불구하고 전통사회에서는 세뱃돈을 주고받는 문화는 없었다. 단지 세배만 있었을 뿐이다! 덕담을 나누고, 복조리를 사서 걸어두거나, 길흉을 점치는 정도였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아닌가.[2]

혹시 화폐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뱃돈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세뱃돈을 받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의심이리라. 고려도 그렇고 조선 역시 화폐 경제는 신통치 않았다. 996년 고려 성종 때 이미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라고 할 수 있는 건원중보가 유통되었고 고려 중기가 되면 해동통보를 비롯하여 다양한 동전들이 등장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말 공양왕 3년(1391)에 발행했던 ‘저화'라는 지폐가 사용되고 있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화폐를 주조하여 효율적으로 세금을 걷고자 하였다. 하지만 딱 이 정도. 자연스러운 시장 경제의 발전이 아닌 국가 통치 차원에서 화폐가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농업국가인 조선은 여전히 쌀이나 무명으로 거래를 했고 그 유명한 상평통보는 18세기 후반이 되어야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어른들이 상평통보를 세뱃돈으로 주었을까? 아니다. 화폐경제가 발달해도 사람들은 세배와 돈을 이어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사람들은 세배 후 함께 놀았다.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 다양한 놀이를 하며 공동체의 우의를 다졌던 것이다. 참으로 낭만적인 시절이지만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섭섭한 시절이었다.

절값, 주어야 할 의무와 받아야 할 권리의 등장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세뱃돈이 등장한 것일까? 1936년, 신문에 실린 아래 사설에 중요한 단서가 있다.

이 기사는 중요한 정보를 건네준다. 1936년 일제강점기가 한창일 무렵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주는 문화가 서울을 중심으로 퍼졌고 아직까지는 지방에 전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위 ‘절값'이라는 이름으로 세배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지급하는 문화가 빠르게 정착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이들에게 세뱃돈은 특별한 용돈이었다. 아이들은 세뱃돈으로 폭죽을 사서 놀았고[3], ‘세뱃돈을 얼마나 벌었는지’가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등 당시나 지금이나 동심은 다를 바 없었다.[4]

따져보면 100년도 안된 새로운 문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화폐의 가치가 점차 중요해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문화가 바뀌었던 것이다. 세상에 가만히 멈추어있는 것은 없을뿐더러 예상보다 전통이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의 역사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세뱃돈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세뱃돈 문화를 두고 비판이 일거나 고민거리가 되지도 않은 듯하다. 워낙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것은 미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1990년대 평균 세뱃돈은 얼마?

1990년대가 되자 대한민국은 잘 사는 사회가 되었다. 눈부신 경제 발전이 이어졌고 사회는 고도성장기에 접어들었다. 세뱃돈의 액수도 자연스레 올라갔는데 고민과 부담이 커졌기 때문일까? 1990년대는 세뱃돈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분출되던 시기였다.

1995년에 국민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521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세뱃돈에 대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부모와 조부모 등 평균 5명에게 받는 세뱃돈은 평균 ‘41,226원' 이었다.[5] 지역별로는 전라도가 ‘5만 3천여 원’으로 가장 많았고 충청도가 ‘2만 6천 원’으로 낮은 축에 속했다고 한다.

적당한 세뱃돈 액수가 얼마인가를 두고도 설문조사가 벌어졌다. 대체 얼마가 적당한 걸까? 적당한 액수는 1만 원 이하가 56%를 차지했고 높아 봤자 2만 원 이하였다. ‘세뱃돈 문화가 없어져야 한다’는  20% 미만이었는데 그렇게도 돈 주기가 아까웠을까? 코묻은 세뱃돈을 ‘불로 소득에 가깝다’며 비판한 경우도 있었다.[6] 더구나 세뱃돈을 받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 담론 또한 이 시기에 등장한다.

일 년에 딱 한 번, 특별히 받는 돈을 주고 이렇게까지 날 선 의견을 보이다니! 더구나 일부 어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가성 새해 인사와 도매금을 하다니! 하지만 다행이다. 세대가 바뀌고,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면서 세뱃돈에 대한 의견도 다양했졌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뱃돈 문화를 ‘고유의 미풍양속’으로 여겼다. 어느덧 사람들에게 세뱃돈은 떡국만큼 익숙해진 것이다. 받는 자의 승리이자 주는 자의 넉넉함이었다.

다시금 설날이다. 이맘때쯤이면 조카들 세뱃돈을 두고 온라인상에서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3만 원이 적당할까, 5만 원이 적당할까.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올 설날 세뱃돈 준비금은 1인당 평균 52만 원이라고 한다. 올해에도 혜성처럼 등장하여 세뱃돈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5만 원권에 대한 볼멘소리가 뜨거울 것이다.

하지만 3만 원이면 어떻고 5만 원이면 어떤가. 세뱃돈은 상상도 못하며 복조리를 걸고 무탈한 한 해가 되길 바랐던 그때 그 시절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진심 어린 덕담을 주고받지 않았던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설 날. 오랜만에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하면 그뿐 아니겠는가.

참고자료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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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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