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세금, 어떻게 얼마나 냈을까?

by 심용환

국가를 운영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세금’. 하지만 월급명세서에 적혀있는 세금과 그만큼의 빈 액수를 보면 어쩐지 마음이 씁쓸하다. 하지만 13월의 월급, 괜스레 마음이 셀레는 연말정산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아픔 쯤이야. 예나 지금이나 세금은 사람들의 생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조선시대 역시 세금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세금 문제로 어떤 고민을 했을까? 조선 시대 세금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건들을 들여다본다.

임오군란의 배경엔 세금이 있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가 권력을 잡았다. 민씨 세력은 개화를 외쳤지만 부정부패와 깊숙이 연루되었다. 명성황후의 친척이었던 민겸호는 지금의 국세청과 비슷한  선혜청의 당상 자리에 올라 군인들의 급료를 가로챘다.

군인들은 몇 달째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달 치 급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 양이 절반에도 못 미쳤다. 당시 군인들은 쌀로 급료를 받았는데, 쌀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마저도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일부는 물에 젖어 부풀려있기도 했다. 김춘영, 유복만 등이 격렬히 항의했는데 민겸호는 이들을 포도청에 끌고 와 고문을 한 후 처형했다. 격분한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을 습격했고 일본 공관을 넘어 궁궐을 공격했다. 1882년 6월에 있었던 임오군란이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잠시 집권했지만 청나라와 일본이 군대를 파견함에 따라 외세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여기까지가 교과서에서 배울 수 있는 이야기라면,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19세기 말까지도 조선 군인들은 급료로 쌀을 받았다. 이 쌀은 백성들이 낸 세금이었다. 즉, 세금을 거두고 그 일부를 군인들의 월급으로 지급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모든 세금을 쌀로 냈을까? 세금의 형태는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농부가 생선을 세금으로 내야 했던 이유

조선은 농업 사회였다. 세금은 주로 현물로 거두었는데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바로 '조세', '공물', '역'이다.

조세는 토지에서 생산된 쌀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였다. 토지가 많을수록 세금을 많이 낸다는 점에서는 누진세적 요소가 있지만, 조선 중기 이후 소작농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 5% 미만의 세금만 내면 됐지만, 지주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했던 소작농은 쌀의 절반을 국가에 내놓아야 했다. 심지어 조선 후기에는 지주의 조세를 소작농이 대신 내는 경우도 있었다.

공물은 지역 특산품을 이야기한다. 지역마다 내야 하는 특산품이 정해져 있었고 가호를 기준으로 삼았다. 즉, 가족이 몇 명인지를 기준으로 특산품을 납부해야 했다. 문제는 특산품을 경작하지 않더라도 무조건 특산품을 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기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도 경기도 공물이 생선이라면 생선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이 때문에 관리들은 농민들에게 쌀을 받고 대신 공물을 납부해주는 '방납’이 성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무리하게 이익을 취하며 온갖 비리가 판을 쳤다.

이에 가장 분개했던 이가 율곡 이이이다. 그는 <동호문답>이라는 책에서 “간사한 노비들과 교활한 서리들이 사적으로 물자를 비축하고 관청을 우롱하고 백성을 가로막아 비록 좋은 물건을 가지고 와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본인이 사적으로 준비해 둔 물자를 낸 후에 그 백 배의 값을 요구”하는 현실을 개탄했고, 이 때문에 국가 재정도 위기에 처하고 민간의 곳간은 이미 텅 비게 되었다며 한탄했다.

마지막으로 ‘역’은 남성 노동력을 의미한다. 군대를 가거나 성을 보수하거나 길을 짓는 일에 동원되는 것을 말한다. 조선은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남성에게 역을 부과했다. 나이가 들면 젊은 군인들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했고 공사에 동원되면 작업 도구부터 식사까지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 오늘날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세금 제도는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동서양 대부분의 나라 또한 비슷했다. 제도와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농업 사회의 특징이었던 셈이다.

월급 받는 군인, 장사하는 군인

다시 임오군란의 배경이 되었던 군사들의 급료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직업군인제도를 도입했다. 급료를 받고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하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는데 ‘훈련도감’이 대표적이다. 17세기 기준 이들은 한 달에 쌀 아홉 말에서 열두 말을 받았다. 물론 급료는 수시로 바뀌었다. 정부 재정이 어려워지면 급료가 쑥쑥 깎여 나갔고 쌀 대신 콩을 주기도 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받았던 쌀이 백성들의 세금이라는 점이다. 해마다 ‘1결당* 쌀 1말씩’을 전국의 토지에서 거두었고 이를 ‘삼수미’라고 불렀다. 시간이 갈수록 직업군인이 많아지며 부대가 늘어났고 급료 또한 올라갔다. 군인들의 급료를 충당할 새로운 세금이 필요했고, 그중 하나가 ‘포보’라는 제도였다. 오늘날 기준으로 ‘400가닥의 올이 들어간 17m가량’의 품질 좋은 옷감을 만들어서 군인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세금을 계산하기 위한 토지면적 단위. 면적은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변화해 왔는데, 임진왜란 이후 1결의 넓이는 대략 10,809㎡정도였다.

백성들이 직접 옷감을 만들어서 군인들의 의복을 책임지는 제도인데 부담이 커지자 백성들이 기준을 어기기도 했다. 좋지 못한 옷감을 납부했고 군인들 역시 옷감을 군복이 아닌 다른 데 사용하기도 했다. 쌀과 옷감으로도 급료를 충당하는 데 한계에 이르자 정부는 군인들의 노동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우선 ‘훈둔(訓屯)’을 나누어주었다. 훈둔은 벌목이 가능한 숲을 뜻한다. 군인들이 스스로 나무를 패서 장작을 마련할 수 있게 했다. 군인들이 군사 훈련을 하지 않고, 땔감을 직접 마련해 스스로 돈을 버는 셈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당시에는 군인들 중 상당수가 직접 무기를 제조했다. 창, 칼은 물론이고 말을 다루는 마구 같은 다양한 제품들이 있었는데 군인들이 이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판 것이다. 군인들은 운송 사업에도 개입했다. 때가 되면 쌀가마를 잔뜩 실은 세곡선이 운행되었다. 세곡선 운반에 군인들도 동원되었는데 아예 돈을 받고 세곡선 운송 사업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집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시장에 나와서 파는 경우 또한 있었다. 조선 후기 서울 인구는 10만 명을 돌파했고 채소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군인들 중 상당수는 왕십리 등 도성 인근에 살았는데 자신의 텃밭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장사를 한 것이다.

요즈음에 난전의 폐단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인데, 군문 소속의 경우에는 특히 더욱 심한 실정이다. 일찍이 훈련도감의 군인들에게 망건과 같이 소소하게 지니고 다니는 물건을 임의로 판매하는 것은 금지하지 말게 하는 조치가 있었다. 그래서 군병들이 이를 빙자하여 시중에서 포목 등의 여러 가지 물건을 사사로이 팔고 있다. - 원창애의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 중

조선 후기 인구는 갈수록 늘었났고, 직업군인의 수도 늘어갔다. 농업 경제는 발전했지만 상업은 물론이고 금융, 무역 등 다양한 분야의 산업이 정체되었고, 양반 지배 체제로 인해 합리적인 조세 제도가 정착하지 못했다. 백성들에게 무분별하게 세금을 뜯어내서 급료로 충당했고, 한계에 다다르자 군인들에게 상행위를 허락해 시장 질서를 교란시켰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던 관행이 결국 임오군란 때 큰 사건으로 비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정교하고 발전된 조세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금에 대한 감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여전히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돈에 아쉬움을 느끼고, 연말정산 때 조금이라도 더 돌려받길 기대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 군인들의 사례처럼, 조세 제도의 합리성과 투명성이 무너지면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세금은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우리 삶을 떠받치는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납부의 의무를 넘어 세금이 적절하게 걷히고 있는지, 그 쓰임은 어떠한지 지켜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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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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