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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는 왜 한 달에 한 번, ‘월급’으로 받을까?

by 심용환

매월 10일과 25일. 우리는 심장이 뛴다. 바야흐로 월급날. 직장을 다니면 대부분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받는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따른 월급을 받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

가끔 의문이 든다. 영국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 선수가 캡틴이 되면서 ‘주급'이 파격적으로 인상됐다는 뉴스를 접하거나, 외국 영화에서 주 단위로 급여를 받는 장면을 볼 때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노동의 대가를 한 달에 한 번씩 정산하는 걸까?

미국의 경우, 주(week)를 기준으로 급여를 산정한다. 대부분 2주 기준으로 급여를 받기 때문에 실업급여도 주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이쯤 되면 불온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매주, 혹은 2주에 한 번씩 급여를 받으면 우리는 더 자주 행복하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돈을 더 낭비할까? 조삼모사에 불과할까? 그래도 자주 받으면 기분은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월급을 받았을까?

병졸들은 이전부터 이미 여러 달째 급료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많은 군인들은 마음속으로 모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무렵 훈련도감 소속 병졸들에게 한 달 치 급료를 주도록 명했다. -정교의 <대한계년사> 중

위의 글은 임오군란(1882) 당시의 기록이다. 임오군란은 유명한 사건이다. 고종이 개화 정책을 펼치면서 구식 군인들을 차별했고 무엇보다 1년 넘게 급여를 받지 못하면서 이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러던 와중 임시변통으로 한 달 치 급여를 받았는데 관리들의 농간으로 ‘모래 섞인 궂은 쌀이나 냄새 나는 썩은 쌀’을 지급해서 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관련 기록을 보면 역시 급여는 월급으로 받았다. 위의 글에서도 ‘여러 달째’, ‘한 달 치’로 급여를 표현하고 있고 고종실록을 보면 “13개월분의 급료를 받지 못했다”라고 쓰여있다. 훨씬 오래된 기록을 찾아봐도 내용은 비슷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경덕왕이 “3월에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리에게 매달 주던 녹봉(祿俸)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주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녹봉은 월급이다. 삼국시대부터 급여생활자들은 월급을 받았던 것이다.

참고로 녹읍은 토지를 의미한다. 월급이 아닌 토지를 주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귀족의 권한이 강화되었다고 배운다. 여하간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삼국시대에도 급여는 '한 달에 한 번'이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사회는 오늘날과는 차이가 있다. 대부분 농사를 지어 생활했기 때문에 월급쟁이들이 별로 없었고 귀족이나 양반들도 토지를 소유했고 당시에는 쌀이나 면포 같은 것이 화폐를 대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가 되거나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을 때는 매번 월 단위로 받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기란 쉽지 않다. 다만, 선사시대부터 음력으로 시간을 계산했고 한 달을 중요한 주기로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주기에 맞추어서 급여를 받았다고 추론할 뿐이다.

화이트칼라는 월급, 블루칼라는 일당

대한민국에서는 당연히 월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산업화가 진척되며 직장인이 늘었지만, 모든 직장인이 월급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월급을 받는 계층은 주로 화이트칼라(사무직 노동자)였고,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는 시급제가 일반적이었고 5년 정도 일을 해야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 3사를 비롯한 대기업체에서 생산직 근로자들의 월급제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대우조선 노사는 지난 21일 생산직 근로자들의 임금형태를 종전 시급제에서 월급제로 전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올해 노사협상을 타결했다. 이달부터 실시할 대우조선 월급제는 1일 8시간 기준 한 달 2백43시간분 임금을 월급으로 지급하고 초과근로시간에 대해서는 시간 외 수당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국내 기업들이 실시하는 생산직 월급제는 아남산업 등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5년 이상 근속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분’ 월급제이다. -「생산직 근로자 월급제 확산」, 『경향신문』, 1995. 7. 23.

위의 기사는 대기업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급여를 월급으로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대우조선에 앞서 삼성중공업이 한 해 전에 월급제를 도입했고 현대중공업, 호남정유, LG정보통신 등이 월급제도를 시작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기사 말미를 보면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5년 이상 근속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분 월급제*가 적어도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는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월급제는 한 달을 기준으로 노동시간을 계산해서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월급제의 경우 정규 노동 시간에 초과 근무 수당을 합쳐서 월 1회 지급한다. 부분월급제는 일당을 계산해서 주나 월에 지급 하는 등 노동시간 계산 방식이 다르고, 지급 방식은 기업과 작업장마다 달랐다.

선구적인 기업들이 있긴 했다. 1986년 전후로 선경그룹, 오늘날 SK그룹에서 전사원 월급제를 최초로 도입하였고 1989년부터 포항제철, 오늘날 포스코그룹에서 전사원 월급제를 도입했다.

1992년이 되면 성과급은 물론이고, 조직구성원의 잠재적 능력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능력급, 임금을 1년 단위로 계약하는 연봉제, 직급과 관계없이 근무 경력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단일호봉제 등 새로운 임금체계를 도입하는 기업이 생기면서 급여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당시 자료를 보면 사무관리직의 대부분 월급을 받았고 생산직은 시간급이나 일당을 받았다. 혹은 일당을 모아서 월급으로 받는 경우도 많았다.

자료: 안병무, 안희탁, 김재원, 박준성(1993), 「한국기업의 임금관리」, 『경총 노동경제연구원』, 220쪽

우리에게도 월급을 달라

1990년대 중반, 월급제는 생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화두였다. 삼성, 현대, 대우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생산직 노동자들에 대한 월급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왜 일당이 아닌 월급을 원했을까? 월급은 매달 지급받는 '고정된 급여'이다. 사정에 따라 조퇴나 결근도 가능하고, 초과 수당도 받을 수 있다. 더불어 회사에서 제공되는 각종 복지 제도 또한 누릴 수 있다.

일당을 받는다는 것은 그날그날의 노동시간에 대한 대가에 불과하기 때문에 삶의 질은 물론이고 노동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월급을 통한 안정적인 급여 체계의 보장. 당시 노동자들에게 월급제는 오늘날 정규직과 같은 의미였다.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 특수선 사업부내 식당건물 3층 옥상에서 이 회사 근로자 박삼훈씨(41)가 온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 투신자살을 기도해 대우 옥포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이 회사 노조는 기본급 14.9%(10만 2천9백원) 인상과 월급제 시행 등을 요구하며 회사 측과 20여 차례의 협상을 벌였으나 진전이 없자 이날 쟁의 발생 신고를 했다. 박씨는 편지지 한 장에 “노동자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는 요지의 유서를 남겼다. -대우조선 근로자 焚身자살, 『동아일보』, 1995. 6. 22.

월급제를 요구하며 분신자살 하는 노동자가 있을 만큼 생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월급제로의 전환은 중요한 문제였다. 조금 더 넓게 본다면 1987년 6월민주항쟁 이후 활발해진 노동 담론 덕분이기도 하다. 1980년대 들어 노동운동이 활발해졌고 6월 민주항쟁 이후 7~8월에는 노동자 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노동계에서는 전사원 월급제를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이에 대한 우려 또한 컸다. ‘근태 기강 해이’, ‘생산성 저하’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세는 월급제였다. 1995년 삼성전자는 ‘한가족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월급제를 도입하였는데 그 이유로 ‘근로 의욕 고취’, ‘생산성 지속 향상’, ‘1일 8시간 무잔업 근무체제 확립’, ‘월 1회 토요 휴무 확립’를 들었다.

이를 통해 ‘정신적 일체감’, ‘능력주의 인사 원칙’, ‘삶의 질 향상’이 이루어졌다는 건데 경영진 입장에서는 월급제 도입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에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에 쉬는 것도 대단한 복지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의 대가로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받는 것이 당연했고 직무에 따라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노사협의를 통해 전사원 월급제를 도입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와 비슷했고 무엇보다 주급제는 사실상 일당제와 비슷했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지도는 크게 바뀌었다. 근무한 기간에 따라 임금과 직급이 올라가는 연공서열제 쇠퇴하고 능력에 따른 연봉제가 각광을 받았으며 동시에 비정규직이 등장했다. 노동시장이 불안해진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국가는 월급을 기준으로 각종 사회보장제도와 노동법을 마련했다.

주급을 실시하는 미국 같은 나라들 또한 주급을 기초로 각종 노동법과 인센티브 제도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 급여를 줄 것인지, 2주에 한 번 줄 것인지를 바탕으로 모든 법과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노동법과 같은 법률 체계가 이미 국가별 급여 계산의 기초 단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주급을 월급으로 바꾸거나, 그 반대로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월급이든 주급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안정적이면서도 정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다. 과거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월급제를 사수했던 것처럼, 여전히 많은 이들이 노동의 정당한 대가와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올해도 근로자의 날이 왔다. 월급의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 모두의 주머니가 한층 따뜻해지길, 그러한 변화가 계속되길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함영범

– 해당 콘텐츠는 2024. 4. 29.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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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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