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나라는 축하를 ‘돈’으로 하게 되었을까?
ㆍby 심용환
축의금 5만 원 시대도 저물고 있다. 올해 서울 시내 웨딩홀의 평균 식대 비용은 8만 원 안팎. 업체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결혼식 비용이 오르다 보니 축의금 또한 오르고 있다. 진심을 다해 축하하지만 그래도 축의금의 무게를 외면하기는 어려운 법.
사정이 이렇다보니 결혼식에 참여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금액에 차등을 두는 문화도 생겨났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축의금만 보내는 경우는 5만 원이 52.8%, 결혼식에 참석하는 경우는 10만 원을 내는 경우가 67.4%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신한은행 ‘보통사람 금융생활보고서 2024’
결혼식뿐만 아니라 돌잔치나 환갑연, 장례식에 갈 때도 우리는 현금을 준비한다. 현금으로 축하나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성의를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는 현금으로 마음을 전하게 된 것일까?
조선시대 위시리스트는 ‘이것'
우리나라도 원래는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였다. 그것도 생각보다 호사스럽고 복잡다단하게 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이 남긴 『미암일기』를 보면 양반들끼리 어떤 선물을 주고받았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가장 흔했던 것은 술과 과일, 그리고 김이었다. 곶감도 자주 선물했다. 맛있는 것을 공유하는 차원의 선물이 일반적이었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미식의 대표주자는 술이나 과일 혹은 별미류였다. 특별한 선물로는 전복이나 숭어, 오징어, 가물치 같은 수산물이었다. 숭어와 농어는 말려서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유희춘의 경우는 활동했던 곳,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강진, 영광, 진도, 무안 등 해안지역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수산물을 얻고 나누기에 용이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수산물이 지금보다 구하기 어려웠다는 점, 운반이나 보관도 훨씬 까다로웠을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 수산물은 홍삼세트나 갈비세트처럼 귀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축의금의 시작은 율곡 이이?
경사(慶事)에 기증할 때는 예(禮)의 크고 작은 데 따라 예물의 다소(多少)를 정하는데, 많으면 무명 다섯 필과 쌀 열 말, 그 다음은 무명 세 필과 쌀 다섯 말이며, 적으면 무명 한 필과 쌀 세 말로 한다. 대과(大科) 급제와 같은 경우가 대례(大禮)이고 생원⋅진사가 그 다음이며, 그 나머지 아들의 관례(冠禮)나 처음 하는 벼슬, 품계가 오르는 따위가 소례(小禮)이다. 혼례에는 무명 세 필과 쌀 다섯 말을 부조한다. -『율곡전서』권16, 잡저, 해주향약 중
위의 글은 율곡 이이가 쓴 『해주향약』에 나오는 내용이다. 향약은 마을 사람들이 지켜야 할 유교 윤리를 말한다. 율곡 이이는 유교적인 가치관을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정리했고, 마을 공동체에서 그 가치를 함께 지키며 살 수 있도록 글을 썼다. 해주향약은 황해도 해주 지역에서 유교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했던 이이의 노력이었다.
이 글에서 율곡 이이는 축의금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혼례에는 무명 세 필, 쌀 다섯 말' 정도를 하면 된다는 것이 이이의 지론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조선 시대에는 서로 간에 많은 현물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선물이 뇌물로 둔갑하는 일이 흔했다. 누군가의 결혼을 축하하며 과도한 선물을 보내서 환심을 사는 것. 이이는 이를 경계했고 적당한 수준에서 축하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무명과 쌀이 화폐로 쓰였다는 점이다. 조선은 18세기 이전까지 화폐 경제가 활발하지 않았고, 옷감으로 쓰는 무명과 식생활의 기본인 쌀을 가지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이 금액의 가치를 오늘날 기준으로 환산하기란 극히 어렵다.
다만, 조선 전기 토질이 나쁜 토지에서 내는 세금의 양이 쌀 4~6말 정도였고, 당시 최고 부자들이 수만필의 무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가늠할 뿐이다. 아마도 오늘날 5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를 두고 느끼는 우리의 감정과 비슷한 수준일 듯 하다.
이런 부분을 고려한다면 이이는 축의금의 원조라고 부를 수도 있다. 화려하고 비싼 선물을 통해 재력을 과시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금액을 나눔으로 공동체의 화목을 도모하자는 발상이었으니 말이다.
농촌은 선물, 도시는 현금
조선 말기 그리고 일제강점기 들어 선물 대신 결혼 축의금 문화가 시작된다. 화폐 경제가 성장하고, 도시화 산업화가 조금씩 진척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특히 농촌에서는 1960년대만 하더라도 마을 잔치가 빈번했고 결혼식에는 다양한 형태의 선물이 전해졌다.
경북 영양군에 있는 감천마을의 경우 ‘몸부조’라는 문화가 있었다. 잔치 음식을 만들거나 밥상이나 술상을 차릴 때 함께 도와주며 선물을 대신하는 문화였다. 젊은 남성들은 가축을 잡고, 나이가 많은 여성들은 음식 맛을 내는 식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농촌에서 결혼식을 하면 쌀밥을 대접하지 못해서 국수를 대접하기도 했고 술이나 감주 같이 마실 거리를 손님들이 준비하기도 했다. 양말, 내의, 런닝, 셔츠 같이 소박하지만 마음을 담은 선물도 전했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의 정성이었다.
하지만 도시는 달랐다. 도시에서는 빠르게 축의금 문화가 정착했고 선물은 사회적 소수, 가진 자들의 문화로 바뀌어갔다. 한국의 혼인 문화는 결혼에 드는 물품과 비용인 ‘혼수’가 핵심이었다. 신부와 신랑이 결혼식 전 과정에서 엄청난 혼수를 준비했다. 신랑신부의 화려한 의상부터, 양가 부모님께 보내는 물품, 화려한 피로연 등 도시 결혼식에서 선물 문화는 재력을 과시하는 특권층의 문화와 결부되었다.
결혼러시다. 청첩장과 답례품을 금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이 발효하는 6월 이전에 결혼식을 올리려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시즌이 겹쳤기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식장 예약은 시내 중심가의 일류예식장 6,7개소가 3월말까지 예약을 마감했고 중심가에서 벗어난 예식장에 예약문의가 몰려들고 있다... 식장이 한 개뿐인 C호텔의 경우 평일엔 한 쌍, 토일요일엔 2,3쌍이 호화예식을 오리며 하루 문의 전화는 약 30통, S호텔의 경우 하루 한 쌍꼴로 예식을 올리며 문의 전화도 20~30통씩 온다고 했다. - <조선일보> 1973년 3월 8일 기사
축의금 주고 받으면 벌금 50만 원
때문에 1969년, ‘가정의례준칙’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결혼식에 허례허식을 없애고 낭비를 최소화할 것을 나라 차원에서 강제한 것이다. 일종의 사치금지법이었는데 내용이 꽤 구체적이었다. 약혼식과 청첩장을 없애고, 결혼답례품은 주지 않고, 신랑신부 접수대를 없애서 축의금을 주고받지 못하게 했다. 또한 폐백과 화환도 없애고자 했다.
심지어 청첩장을 돌리거나, 답례품을 주거나, 주류와 음식물 접대 등의 행위를 하면 5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매기기도 했다. 196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정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나라님도 못하는 일이 있는 법. 정부가 강제한 준칙들은 일반 국민들의 일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또한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않고 호화예식을 누렸고, 결국 가정의례준칙은 1999년 폐지된다.
빠른 속도로 변화한 축의금 문화
1980년대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소득 수준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서구적인 생활 양식이 일반화되었다. 인구가 증가하고 그만큼 결혼식이 늘면서 1990년대 이후 현금 축의금 문화는 완연한 일상으로 자리잡았고 사회적 고민도 함께 시작된다.
매년 봄이 되면 적정 축의금에 대한 설문조사나 기사가 쏟아지고, 거액의 축의금을 자녀에게 줄 경우 증여세 과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첫날밤에 축의금을 이야기하면서 부부싸움을 벌이는 내용이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현금 축의금은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의 결혼 문화에서 공고한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며 차곡차곡 몸값(?)도 올라만 갔다. 잘 살게 된만큼 챙겨야 할 정성의 액수 또한 높아진 것이다.
자료= 1994년, 2005년은 갤럽, 2018년은 틸리언 프로
한때는 선물 문화가 당연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어느덧 결혼에서 선물은 부수적인 것, 혹은 정말 가까운 친구 혹은 가족이 별도로 준비하는 예외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선물은 따뜻하고, 돈은 차갑게 볼 필요는 없다.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은 현금으로 결혼을 축하하는 문화가 일반적이다. 불가리아·루마니아·폴란드 같은 동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 결혼 선물 문화로 유명한 미국 역시 2000년대 들어 갈수록 현금 축의금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세계사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현금은 결혼을 축하하는 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서고 있는 셈이다.
축하할 일이 유난히 많은 계절, 한 번쯤 고민해보자.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금액의 크고 작음을 너머 어떻게 하면 깊은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지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은 진심어린 축하이니 말이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이서영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필진 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