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럽은 똑같은 화폐를 쓸까?
ㆍby 심용환
한국은 원화, 일본은 엔화, 중국은 위안화를 쓴다. 미국 달러처럼 초국가적인 돈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라별로 정한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유럽은 다르다. 유로화. 프랑스를 가든, 그리스를 가든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지중해부터 북유럽까지 모두 같은 화폐를 쓴다.
이제 휴가철이다. 여행하면 유럽 아닌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유로화의 장단을 생각해 본다. 한 번만 환전하면 여러 나라에서 같은 돈을 사용할 수 있어 편하다. 하지만 화폐가치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낮은 물가의 혜택을 보기 어렵기도 하다.
2008년 그리스 재정위기처럼 경제적으로 취약한 나라에서 금융 위기가 닥치면,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 내 선진 국가가 돈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리스 재정위기 당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유럽연합 내 회원국의 문제는 유로존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유로존 국가들의 결속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또한 우리에겐 낯선 모습이다. 이 독특한 문화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유로화를 만든 진짜 이유
유럽이 똑같은 화폐를 쓰기 시작한 건 1999년,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다. 당시 유럽중앙은행 총재였던 뵘 뒤젠베르크는 유로화가 국제통화가 될 것이며, ‘의도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달러의 지위를 흔들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이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미국 때문이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패권국가가 되었고 달러 역시 기축통화가 되었다. 쉽게 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돈이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유럽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전쟁 이후 극도로 피폐한 상황에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일명 ‘마셜플랜(Marshall Plan)’을 실시했다. 서유럽 16개 국가에 약 130억 달러, 식료품부터 원자재와 기계 장비까지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미국의 도움으로 유럽은 GDP와 산업생산을 늘리며 전후 회복을 가속화할 수 있었고 동시에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상황이 바뀐다. 프랑스는 유럽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미국과 대립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어낸다. 같은 시기 미국 경제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는 일명 ‘쌍둥이 적자’가 미국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이 시기 유럽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을까? 그렇지도 않았다. 일명 신자유주의, 미국은 막대한 자본을 유럽 시장에 투자했고 유럽과 미국의 시장 경제는 얽히고설켜 있었다. 유럽은 미국을 벗어나지 못했고 미국의 불황이 유럽의 불황으로 이어지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그 대안으로 유럽은 독자적인 통화체제를 마련하고자 했다.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유럽의 위상을 새롭게 하며, 세계 경제에서 보다 주도적인 지위를 구축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유럽은 1991년부터 통합 화폐를 준비했고 1999년 유로화가 등장한다.
화폐로 똘똘 뭉치는 시대, 우리는 IMF를 맞았다
유로화가 등장할 무렵, 우리나라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1997년 3월, 대한민국 외환위기의 시발점인 한보사태가 일어난다. 4월에는 삼미와 진로, 5월에는 대동과 한신공영, 7월에는 기아자동차, 10월에는 쌍방울, 11월에는 해태, 12월에는 고려증권과 한라그룹 등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져 나갔다.
경제 위기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아시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7년 7월부터는 태국이 흔들렸다. 태국의 화폐인 바트 환율이 20% 이상 떨어진 것이다. 153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가 문제였다. 바트 화폐의 평가 절하가 계속되었고, 태국 정부는 8월 들어 IMF(국제통화기금)에 지원을 요청한다.
바트화 가치가 갑자기 떨어지면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한국 등으로 파장이 확대됐다. 아시아 각국의 화폐 가치가 급락하고, 외국에서 투자한 돈도 빠르게 빠져나가며 아시아 외환 시장이 마비되었다. 이러한 여파 가운데 1997년 말 우리나라도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반해, 1990년대 중반 미국은 캐나다와 멕시코를 끌어들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해 ‘달러블록’을 강화했다. 각국의 통화를 미국 달러에 연동하거나, 달러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로화의 등장은 ‘유로블록'으로 해석되었다. 아시아만 ‘통화블록'이 없으니 아시아의 처지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유로화에 대응한 한중일 공동화폐?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 1997년 말 일본은 아시아통화기금(AMF)을 제안했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IMF가 동아시아 경제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했고, 그 대안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엔화의 국제화, 동아시아 기금 마련, 아시아 금융 블록 등을 제안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포함한 신흥공업국가(NICs)에 엄청난 자본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발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달러를 벗어나서 독자적인 엔화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경제?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또한 결코 반길 수 없었다. 오랜 역사적 은원관계가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주도의 아시아 통화블록은 또 다른 제국주의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2000년대 이후 중국은 한국과 일본을 추월해 압도적인 경제성장을 이어갔기 때문에 ‘한중일 FTA’, ‘한중일공동화폐’ 등 여러 아이디어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에 멈추고 말았다.
한중일의 경제 규모를 합치면 미국이나 유럽을 압도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 아시아는 유럽처럼 연합하지 못했을까? 해답은 통화가 아니라 역사에 있다.
반백 년의 고민, 유로화는 단순한 경제적 결합이 아니다
20세기 전반 유럽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러시아로 나뉘어 정말이지 오랫동안 싸워왔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인 장 모네는 유럽이 어떻게 해야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장 모네는 민족 국가가 아닌 유럽 공동체, 식민지가 아닌 공동 시장을 주장했다.
만약 유럽 국가들이 한 번 더 서로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면, 다시 한번 막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돈이 드는지 안다. 사회 개혁은 군비지출 압력으로 제약받거나 지연될 것이다. 유럽은 또 한 번 공포 속에서 창출되게 될 것이다(...) 번영과 사회적 진보를 누리기 위해서 유럽의 국가들은 연방이거나 혹은 그들을 단일 경제 단위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럽 단일체(European entity)’를 구성해야 한다. – 장모네,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 회고록⟫ 중
일명 모네 플랜. ‘이익을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이익을 위해 협력한다’라는 그의 비전은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고픈 유럽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과 독일의 총리 아데나워는 유럽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인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했고, 영국도 동참하면서 1950년대 유럽철강공동체(ECSC)가 등장하게 된다. 철강은 산업혁명의 핵심 자원으로 오랜 기간 분쟁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협력의 도구가 된 것이다.
협력은 협력의 역사를 낳았다. 냉전이 붕괴되자 서유럽은 낙후된 동유럽을 품으며 유럽 공동체를 확대해 갔고, 여러 단계를 거쳐 오늘날 유럽연합(EU)으로 발전했다. 유로화는 이러한 노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파시즘이나 나치즘 같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제어하고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독자적인 시장을 구축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유로화가 도입된 1999년 유럽의 경제는 2.8% 성장, 다음해에는 3.5% 성장했다. 화폐간 거래비용이 감소하고, 유로화를 쓰는 국가 사이의 거래가 더욱 활발해졌다. 국가간 환율 불확실성이 사라지면서 유럽은 하나의 시장이 되었고 그만큼 성장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로화가 만능은 아니었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미국발 금융 위기가 일어났을 때 유럽의 경제지도자들은 유로화를 기반으로 한 유럽 경제가 미국의 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국발 금융 파생상품은 유럽과도 긴밀히 얽혀 있었기 때문에 여파가 굉장했다.
또한 장점이 곧 단점. 유로화의 등장 이후 유럽중앙은행은 단일 통화 정책을 실시했고, 개별 국가의 경제 상황에 맞춘 통화 정책은 불가능해졌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간 격차를 해결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앞으로 유럽이, 유로화가 어떻게 될 것인가보다는 우리가, 우리나라가, 우리나라를 둘러싼 동북아시아가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평화를 도모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반복된 갈등의 수렁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유로화는 단순한 경제적 결합이 아닌 깊은 역사적 경험과 고뇌의 산물이다. 이제 우리도 그러한 노력을 할 때가 되었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조수희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필진 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