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개최한 올림픽, 얼마 벌었을까?
ㆍby 심용환
우승하면 양 500마리 상금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
수많은 그리스인이 올림피아 신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선수들의 표정은 비장하기 짝이 없다. 선수가 승리를 목표로 하는 것은 당연한바, 선수의 승리는 도시국가(폴리스)의 명예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긴장은 극한에 다다른다. 경기의 시작과 동시에 함성이 쏟아지고 우승을 한 선수에게는 ‘헤라클레스의 성스러운 올리브 나뭇가지’ 계관이 씌워진다. 상금은 500드라크마, 무려 양 500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던 고대 올림픽의 모습이다. 성대한 축제이기도 했지만 치열한 경쟁의 장이기도 했다. 종목은 단출했다. 달리기 경주로 시작해, 던지기, 멀리뛰기, 레슬링 등 몇 가지 종목이 추가되었다. 고대올림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기원전 776년부터 올림피아 제전이 공식화되었고 명맥을 이어오다 로마 시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금지*한 이후 사라졌다. 사실 이전부터, 그리스 문명이 쇠퇴하면서부터 꽤 오랜 기간 올림픽은 지역의 소박한 축제였다. *당시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었는데, 올림픽이 이교도들의 축제라는 이유로 금지했다.
19세기 들어 기적처럼 올림픽이 부활한다. 고고학과 민족주의 때문이었다. 19세기 초반, 독일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대 올림피아 유적지가 발굴되었고 마침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제국에서 독립한 것이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자 르네상스적 소양이 충만했던 프랑스의 정치가 쿠베르탱은 올림픽부흥운동을 펼쳤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이 만들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그리스에서 열리게 된다. 주요 도시에서 돌아가면서 대회를 개최하는 규칙은 이때 만들어졌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올림픽을 두 번이나 개최한 나라가 되었다.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88 서울 올림픽은 지금까지도 메가 스포츠 이벤트의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물론 커다란 성공 뒤에는 씁쓸하고 속상했던 실패의 역사 또한 있다.
서울의 국제무대 데뷔 좌절기
88 서울올림픽보다 22년 전인 1966년. 서울은 제6회 아시안게임(1970년)의 개최 도시로 선정된다.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공업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 무엇보다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거대한 스포츠 행사가 필요했다. 당시 북한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상당한 활약을 펼쳤다. 1960년대 북한의 신금단 선수는 육상 400m, 800m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북한 축구팀이 이탈리아를 꺾고 아시아 최초로 8강에 진출했다. 에우제비오*만 없었다면 4강도 가능했던 실력이었다. *포르투갈의 축구선수.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과 8강 맞붙어 0-3으로 뒤쳐지다 혼자 4골을 연달아 넣으며 포르투갈에 승리를 안겼다.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국제대회를 유치하는 데는 돈도 시설도 부족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제법 컸던 경기장은 3개뿐. 동대문운동장, 효창공원의 축구장, 장충체육관이 전부였다. 국제 스포츠대회의 다양한 종목을 소화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경기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선수단과 취재진 등 국제대회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이들이 머무를 숙소를 비롯하여 각종 부대시설이 필요했다. 어디 그 뿐 인가. 김포공항에서 내려서 서울 시내로 오기까지 외국인들이 서울의 곳곳을 보게 되고, 신문은 물론이고 방송 촬영까지 이어질 텐데 당시 청계천은 물론이고 서울 곳곳에는 판자촌을 비롯해 무허가 건축물과 극빈에 시달리는 생활상이 일상이었다.
1968년, 대회 2년을 앞두고 정부는 아시안게임 개최를 포기하고 만다. 아시안게임은 태국에서 치러졌는데 중도 포기한 대가로 무려 25만 달러의 적자 보전금을 태국에 지불해야만 했다.
경기장 짓고, 도로 닦고, 아파트 세우고 제대로 준비한 올림픽 데뷔 무대
국제무대 데뷔의 쓴맛을 본 후 심기일전해서 준비한 행사가 바로 88 서울올림픽이다. 강남개발은 대규모 국제대회 개최를 고려해 추진되었고, 박정희 정권이었던 1971년 잠실지구에 80만 평의 ‘스포츠대단지 조성계획'이 발표된다. 지금도 다양한 국내외 스포츠 행사와 공연에 활용되고 있는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잠실 실내체육관, 잠실 야구장 등이 이 시기에 계획되었고 88 서울올림픽에서 빛을 보게 된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한강종합개발계획’을 발표해 한강에 대규모 시민공원을 조성하고, 강변에 도시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오늘날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가 이 시기에 완성되었고 서울 시내에 고층 건물들도 들어섰다. 광화문 교보빌딩, 여의도 LG쌍둥이 빌딩부터 목동아파트 단지, 서초동 법원 건물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무엇보다 상징적인 건물은 1985년에 완공된 63빌딩이었다. 63빌딩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교통도 정비해 1987년, 지하철 2·3·4호선이 완공된다. 지하철 2호선은 종합운동장을 비롯해 올림픽 시설을 관통하는 순환선이었고 3·4호선은 서울을 X자로 통과하며 2호선을 관통했다. 서울 전역을 아우르는 지하철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도시 개발의 절정은 마라톤 코스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원도심을 코스로 활용했던 대부분의 국가와 달리 우리나라는 한강, 여의도 아파트와 63빌딩 그리고 테헤란로를 포괄하는 강남 지역이 마라톤 코스가 되었다. 목동에서 한강변 도로가 조성된 것은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사람들에게 서울의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한 계획이었다면 마라톤은 전 세계에 생중계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섬세하게 동선을 고려했던 것이다.
마침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민주화도 이뤘기 때문에 88 서울 올림픽은 문자 그대로 ‘한강의 기적’을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실제로 올림픽 기간 동안 300만명에 가까운 관광객이 방문했고, 올림픽 방영권 수입은 약 4억 달러에 달했다. 88 서울 올림픽은 10여년만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모든 국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서울이 ‘천만 서울' 타이틀을 얻게 된 것도 1988년 이후다.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1981년 867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대회 직후 1989년에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예산 규모는 1조 32억 원에서 3조 5,585억 원으로 급증하였는데 인구도 예산도 늘면서 서울은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대도시가 되었다.
평창동계올림픽 경제효과 64조?
88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대한민국은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덕분에 우리나라는 동·하계 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8번째 국가가 되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또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안경 선배' 컬링 선수 김은정의 안경이 완판되었고, 이상화 곽윤기 윤성빈 등 선수들의 눈부신 활약은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북한응원단 파견과 이후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88 서울 올림픽이 냉전 화해의 장이었다면 평창 올림픽 또한 평화적 가치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경제적 효과는 어땠을까?
약 64조 9,000억 원. 평창 동계올림픽의 경제적 효과가 무려 64조 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언론을 통해 빈번히 인용되었다. 2011년 현대경제연구원이 추산한 금액이며 직접적 경제적 효과는 21조 1,000억 원 간접적 효과는 약 43조 8,000억 원으로 추산했다. 어떻게 이런 계산이 나왔을까?
대회 개최에 소요되는 투자 금액이 7조 2,555억 원, 외국인 관광객이 1조 2,300억 원, 내국인 관광객이 4,000억 원을 쓸 것이며, 올림픽조직위원회의 대회 경비지출과 국내 기업들의 홍보 행사 지출액 규모 또한 3조 1,000억 원으로 전망했다. 이것만으로도 10조 원대의 경제 활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파를 고려해서 직접적인 경제효과를 두 배 정도로 추산했다.
간접적으로는 ‘세계적 겨울 관광지로의 부상에 따른 추가 관광 효과’로 32조 2,000억 원을 예상하였다. 실례로 삿포로를 들었다. 일본처럼 세계적인 겨울 관광지로 급부상함에 따라 큰 수익이 오를 수 있다고 기대했다. 또한 ‘평창 및 강원도’ 같은 지역 브랜드는 물론이고 국가 이미지 또한 제고되기 때문에 여기에 11조를 더한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의 경우 경제적 효과를 두고 비판이 일기도 했다. 수십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경제효과는 보고서에 쓰여 있듯 대부분 ‘추산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고용효과 역시 ‘대체고용’에 불과하다. 토목 공사를 비롯해 특정 기간 개발 사업이 진행되지만 덕분에 지역 내에 여타의 개발 사업은 지체되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특별한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삿포로가 일본의 대표적인 겨울철 관광지이긴 하지만 그것이 올림픽 때문에 이루어진 성과가 아닐뿐더러 국제대회 한 번으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사례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긍정적인 평가들도 있었다. 평창 올림픽이 1조 4,000억 원의 소비지출 증가를 이루었고 그 결과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0.2% 올랐고 각종 경제 지표에 상승효과를 주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가 한국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보고 또한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당초 64조에 달하는 추산치에 비해 극히 낮은 수준이고 수십조에 달하는 전망을 체감하기 또한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시설 유지 비용 등 국제대회 개최 국가들이 대회가 끝난 후에 흔히 겪는 문제들 또한 반복되고 있다.
기대감을 숫자로 포장하기보다는
올림픽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올림픽마다 차이가 있다. 모든 올림픽이 88 서울 올림픽 같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서울 올림픽 이후 지방자치제가 발전하면서 각종 국제대회나 행사가 개최되기도 했지만, 풍선처럼 부풀려진 경제효과가 현실화된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서울올림픽 역시 수치로만 본다면 적자 올림픽이었다는 평가 또한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같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는 흔치 않고 중동산유국 등 새롭게 떠오른 국가들이 올림픽을 통해 홍보 효과를 기대하는 모습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알리면서 선진국으로 우뚝 섰고,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통해,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국가적 성공을 세계에 널리 알린 사례들이 있으니 말이다.
메가 스포츠 이벤트가 주는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파급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올림픽을 통해 얼마를 벌 수 있을지, 환상에 가까운 기대감을 숫자로 포장하는 관행은 뚜렷한 허실이 있다. 국제대회와 행사 유치가 지닌 수많은 문제점에 대해 국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왜 우리는 메가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해야 할까. 지역 경제의 발달?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보다 치밀하고 체계적인 관점에서의 고민이 필요하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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