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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사상 비용은 얼마였을까?

by 심용환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에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조상신이 가족을 돌보고 복을 준다.’ 사람을 돕는 신은 오직 죽은 자들, 그것도 가족 단위로 조상들만이 후손들을 돕는다고 믿었다. 물론 동아시아에도 옥황상제, 산신, 용왕 등 다양한 신들이 있지만 이런 자연신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관장할 뿐 인간계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조상이 후손을 돕는다는 믿음은 유교 문화에 흡수되었고, 이러한 믿음에 따라 동아시아 제사 문화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 되었다. 지금까지 가족 단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수천 년에 걸쳐 내려온 오래된 동아시아 사람들의 믿음과 전통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전통이라도 시대에 따라 형태와 모양은 변하기 마련이다. 온라인에 보이는 요즘 제사 풍경은 그야말로 각양각색.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제사상에 올리기도 하고, 피자나 치킨이 제사상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옛날 제사상에는 어떤 음식이 올랐을까?

800년 전 제사상 엿보기

시대별로 제사상에 오른 음식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제사 음식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많지 않기도 하다. 수백 년 전통을 자랑하는 종갓집 제사상도 대부분 조선 후기의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는 제사상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과거 기록은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고려 시대 의학서 ‘향약구급방'을 보면 연근, 도라지, 토란, 아욱, 상치, 무, 배추, 우엉 같은 채소를 제사상에 올렸다. 국가의 큰 제사에는 미나리, 죽순, 무청 등을 올렸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채소와 과일이 제사상에 올랐지만, 복숭아만큼은 제사상에 오르지 못했다. 공자의 제자들은 복숭아가 과일 중에 가장 하등품이고, 조상님들께 바치기에는 천박한 과일이라고 보았다. 반면,

떡은 제사상에나 올리는 귀한 음식이었다. 전통사회에서는 쌀이 귀했기 때문에 떡을 만드는 것은 사치스러운 문화였고 제사상 혹은 잔칫상에서나 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담스러웠던 제사 비용

2023년 추석 차례상 평균 비용은 30만 3,002원이었다.* 해마다 물가가 오르고 제사 비용에 대한 부담이 커지니 명절이 되면 제사상을 간소화하자는 기사가 쏟아진다. ‘옛날 제사상은 화려하지 않았다', ‘명문가일수록 제사상이 단출했다'는 식의 기사를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옛날 제사상이 간소했다는 주장은 1970년대 이후 정부 정책 영향의 결과이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조사 결과

오늘날에는 명절 차례와 가족 제사를 지내는 정도지만 과거에는 국가에서 제례를 지내고, 마을에서는 동제를 지내고, 절기마다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삶의 일부였다. 더구나 제사는 공동체의 축제였기 때문에 최대한 성대하게 치러졌다.

조선시대에도 제사상을 차리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위토(位土)’라는 제도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위토는 제사를 위한 토지로써 문중에서 공동으로 소유했던 땅이다. 위토에서 나오는 곡식을 팔아 제사 비용을 마련하거나 위토에 소작을 주어서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가문에 재산이 많고 크게 번성하면 문중을 중심으로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명절 때 차례는 물론이고 4대조에 이르는 조상의 기일에 맞추어서 일년 내내 제사를 지냈다.

일반 평민들 역시 형편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다. 형편이 어려워서 제사상이 단출할 수는 있어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경우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물 한 사발이라도 올려놓고 치성을 드려야 하는 것이 법도인바, 최초로 제사를 거부하여 진산사건(1791)*을 일으킨 윤지충은 정조의 명에 따라 목숨을 잃고 가문이 풍비박산되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의 윤지충, 권상연 두 선비가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 두 사람은 천주교 신자였으며 교리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거부했다.

1934년, 일제강점기에는 제사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서 음독자살 했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제사 비용에 대한 부담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절 가난한 백성의 고달픈 살림살이에 대한 애환을 담고 있는 기사이다.

“부부간 싸움 끝에 양재물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모친의 제사 지낼 비용을 십원만 부조해달라는 편지를 받고... 가난한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비관자살을 하였다." - 1934. 2. 19. 조선일보

갈비찜 대신 사태찜, 식혜 대신 화채 나라에서 정해주는 제사상 가이드

6.25전쟁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 정착했고, 경제성장에 버금가는 물가상승 덕분에 제사상 비용은 점차 사회 문제가 되었다.

한정된 월급에서, 날로 물가는 오르고 따라서 필수의 씀씀이가 자꾸 늘어가는데 반비례하여 제사비용으로 돌아가는 예산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종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만 전담시킬 것이 아니라 세 집에서 분담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분노를 삭이듯 침통하게 눈을 감고 계시던 숙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언이 폐지하고 이런 문제에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네 남편이 있잖아. 네 남편이, 네가 살림을 맡고서부터 젯상은 날로 형편이 없어졌어. 두고보자 보자 했더니 이건 한술 더 떠서 뭔시 어쩌고 어째? 아니 그래 갑자기 이 집이 망하기라도 했다는게냐 엉? 항창 그렇다 치자. 네 남편을 통해 얘기하는거야.” - 1973. 1. 4. 동아일보

위의 내용은 ‘제삿날’이라는 1970년대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이다. 치솟는 물가와 부담스러운 제사 비용 때문에 장손의 며느리가 제사 비용을 분담하자고 했다가 숙부들의 분노와 반발을 샀다는 내용이다. 숙부들은 ‘너가 며느리로 들어온 후 제사상이 형편없어졌다.’, ‘할 얘기 있으면 너가 아니라 네 남편이 해야 한다’ 등 모욕적인 말도 서슴치 않았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과도한 제사 비용을 해소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한다. 정부에서는 전통적인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을 줄이고, 절차의 간소화를 위한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검소한 제사상을 강제했다. 가족끼리 제사와 차례 비용을 분담하는 방식 역시 이때부터 나온 이야기다.

첫째, 제사를 꼭 맏아들이 주관할 필요는 없다. 둘째, 형식보다는 내면이기 때문에 고인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으로 제사상을 차리거나 고인의 유품 같은 것을 놓을 것을 권장한다. 셋째, 축문은 한문이 아닌 한글로 써서 조상과 자손 간의 유대 관계를 강화한다. 1970년대 유신 시절 정부는 한바탕 제사상과의 전쟁을 치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 자체를 폐지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1980년대가 되면 더욱 구체적인 제사상 가이드가 등장한다. ‘다섯 명 기준으로 2~3만 원 정도’를 적정 제사 비용으로 보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나 닭고기 사용을 권장했고 갈비찜보다는 사태찜, 버섯은 송이버섯보다는 표고버섯이나 느타리버섯, 식혜보다는 화채를 사용하면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신 체제 때 강제하던 가정의례준칙은 1999년 폐지되었지만, 90년대 초반까지 보다 실용적인 해법을 도모하며 제사 비용을 아끼려는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던 추석

사실 제사 비용보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추석을 비롯한 명절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시도였다. 1927년 조선을 점령한 일본은 공휴일제도를 법제화했다. 원시제(양력 1월 3일), 신무천황제(양력 4월 3일), 신상제(양력 10월 17일), 명치절(양력 11월 3일) 등 새롭게 마련된 절기는 철저하게 일본의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그중 신상제는 천황이 신에게 햇곡식을 바치는 제도로써 추석을 대체하는 제도였다. 우리 민족의 명절은 음력을 따라 계산되었는데 일제는 서구화를 도모하면서 양력 공휴일제를 강요한 것이다. 심지어 명절을 맞이해 단체 삭발을 강요하기도 했다. 소위 '스포츠 머리'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머리를 밀어버리라는 근본없는 문화가 생기기도 했다.

해방이 되고나니 미국의 영향을 받아 추석을 ‘추석감사일’, 즉 추수감사절과 같은 날로 만들고자 했으니 이 또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1989년이 되어서야 지금과 같이 음력을 바탕으로 한 설·추석 3일 연휴제가 만들어졌다.

놀라운 것은 이 기간에도 명절 문화는 유지가 되었다는 점이다. 공휴일이 아니더라도, 일제가 억압을 하고, 정부가 못하게 하더라도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모였고, 세시 풍속을 즐겼고, 덕담을 나누었다. 따져보니 추석은 100년 만에 부활한 셈이다. 앞으로 명절 풍경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시대에 어울리는 풍요롭고, 스트레스 없는 추석 명절 문화가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참고자료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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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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