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와 타자 이미지

왜 대기업들은 프로야구단을 운영할까?

by 심용환

올 가을야구 입장 수입만 100억 원이라고 한다. 경기장을 찾는 관중만 천만 명, 야구장을 찾지 않고 TV나 OTT 서비스를 통한 시청자를 합치면 약 2억 5,000만 명에 달한다. 한국 프로야구는 4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거대한 팬덤을 만들었고, 팬덤만큼이나 거대한 자본과 기업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한국일보의 판매 부수를 10배 키워준 고교야구

한국 야구 열풍의 시작은 1970년대, 고교야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교야구를 논하지 않고 어찌 오늘날의 프로야구를 이야기하겠는가. 특히 ‘봉황기 야구대회'의 등장은 한국 야구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봉황기는 다른 야구 대회와는 다르게 지역 예선을 치르지 않았다. 야구부가 있는 학교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회 규모도 컸고 그만큼 많은 학생들이 야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봉황기 야구대회는 4번째로 출범한 고교야구대회로, 한국일보가 만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봉황기 야구대회가 한국일보의 전략적 승부수였다는 점이다. 한국일보는 봉황기 야구대회가 창설되기 두 해 전인 1969년 <일간 스포츠>라는 스포츠 전문지를 발간한다. 초기 발행 부수는 2만 부. 하지만 봉황기 야구대회가 인기를 끌게 된 1973년에는 발행 부수가 20만 부까지 치솟았다. 한국일보는 신문사간 경쟁에서 스포츠를 통해 우위를 점하고자 했고, 때마침 인쇄물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었다. 봉황기 창단과 고교야구의 흥행은 신문사의 사업적 성공과 궤를 같이했던 것이다.

야구하면 은행에 취업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실업야구 또한 활성화된다. 실업야구는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에 소속되어 야구를 하는 것인데, 오늘날 프로야구와 사회인 야구의 중간쯤으로 보면 된다. 1960년대 실업야구팀은 주로 은행에서 만들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은행만큼 잘 나가는 기업도 없었고, 이 시기 정부는 본격적으로 체육진흥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은행의 실업팀 창단은 필연적이었다.

1962년 기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 야구팀에 입단한 선수의 월급은 7,000~8,000원 정도였다. 당시 5급 공무원 월급과 맞먹는 액수였다. 대학 진학보다는 실업야구팀 취업이 훨씬 매력적이던 때였다. 1977년 7월 21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대졸 야구선수 100% 취직’이라는 기사가 있다. 은행은 물론이고 정부 기관, 공기업 등도 실업 야구선수에게 우대 혜택을 주었고 당시에는 고소득은커녕 안정적인 일자리도 부족했던 터라 야구선수로 시작해서 은행 직원이 되는 것은 커다란 성공으로 여겨졌다.

7급 공무원 월급이 9만 원인 시절 계약금 5천만 원 받는 야구 선수의 등장

1970년대 중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76년 롯데그룹이 ‘롯데 자이언츠’를, 다음 해에는 한국화장품이 ‘한국화장품 야구단’을 창단했다. 1977년 포항제철도 야구팀을 꾸렸고, 후에는 기업은행 야구팀을 인수하며 남은 선수들을 흡수했다. 본격적인 기업 야구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와 함께 천재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은 한층 높아졌다.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은 천재 타자 장효조, 천재 투수 최동원*. 장효조 선수는 1978년, 계약금 1,200만 원을 받고 포항제철에 입단했다. 1980년에는 최동원 선수가 5,000만 원을 받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워낙 큰 금액이라 당시 세간에는 3,000만 원을 받았다고 보도 되기도 했다. 이 금액은 입단 계약금이었고, 여전히 실업야구였기 때문에 선수 생활을 하면서는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대 7급 공무원 초임이 월급으로 9만 원, 대졸 신입사원이 20만 원, 과장급이 35만 원 정도를 받던 시절에 장효조와 최동원의 계약금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장효조 선수는 1970년대 고교야구와 1980년대 프로야구의 독보적 타자였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통산타율(0.331)을 기록하며 ‘타격의 달인'으로 불렸다. 최동원 선수는 1980년대 프로야구의 최고 투수로,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둬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에 더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결승에서 일본과 맞붙으며 그야말로 모두가 야구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이어졌다. 8회까지도 0-2로 끌려가던 상황이었지만,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홈런으로 한국은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1982년은 반일 감정으로 뜨겁던 해였다. 일본이 역사 교과서에 조선'침략'을 조선 ‘진출'로, 3.1운동을 ‘폭동'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국토청 장관이 한일병합을 미화하는 발언을 하면서 국민감정이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극적인 스토리로 일본을 제압했으니 그야말로 야구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다.

프로야구 시대의 시작

같은 해 전두환 정권은 민심을 수습하는 수단으로 스포츠를 끌어들였고,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하게 된다. 야구가 전업인 시대가 등장한 것이다. 월급이 아닌 연봉의 시대가 열렸다. 정권 차원에서 프로젝트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우선 야구단을 만들 수 있는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을 선별했다. 총 임직원 수가 3만 명 이상인 기업 중, 지나친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업종별 한 곳씩을 선정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기업 총수의 출생지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일종의 지역연고를 중시하는 태도였는데, 프로야구는 최근까지도 연고팀이 출신 지역 선수를 우선 선발해 왔다.

이런 방식으로 MBC 청룡(서울), 롯데 자이언츠(부산), 삼성 라이온즈(대구), OB 베어스(대전), 해태 타이거즈(광주), 삼미 슈퍼스타즈(인천) 등 총 6개의 팀으로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됐다. 이제는 낯설어진 기업들의 이름도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이제 막 산업화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때에 롯데는 껌으로 유명했고, OB와 해태는 제과류로 대중에게 익숙한 기업이었다.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그룹은 현대이긴 했지만 현대그룹과 프로야구의 만남은 뒤늦게 이어졌다.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추진에 부응하며 참여 의사를 밝혔던 기업은 MBC, 롯데제과, 삼성그룹 세 곳이었다. MBC의 경우 만년 2위였던 시청률을 끌어올려 KBS를 이기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MBC는 프로야구 출범 초기 야구 중계를 선도했고 ‘허구연’ 같은 스타 해설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호남 연고 그룹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금호, 삼양사 등의 유력했던 후보 기업들이 모두 거절하던 때에 해태가 등장한다. 당시 해태제과의 기업 사정은 좋지 못했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지역을 중요시 했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 40억 원의 구제금융 지원으로 해태 타이거즈가 만들어졌다. 군산상고, 광주일고 등을 기반으로 어렵사리 시작한 해태 타이거즈는 출범 당시 선수단 총인원이 15명이었지만 선동열에서 이종범까지, 초기 프로야구의 성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대기업은 왜 야구팀을 만들까?

이때부터 지금까지 한국 프로야구는 기업의 흥망성쇠를 함께 하며 발전해 왔다. 눈부시게 성장한 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팀들도 많았다. 프로야구단 운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최근에는 천만 관중을 돌파하면서 흑자를 기록하는 야구단이 많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야구단 운영은 기업에게 돈 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 관중 입장료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수입이 없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구단 수입의 70% 이상이 관중 입장료였고, 연간 관중은 250~300만 명에 관객 대부분은 성인 남성이었다. 천만 명 이상이 야구장을 찾고, 온 가족이 함께 야구장으로 나들이를 나오고, 야구단 굿즈가 날개 돋친 듯이 팔리는 모습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다면, 대기업은 왜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프로야구를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걸까?

1990년 창단한 LG트윈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LG트윈스의 성공 사례는 기업이 야구를 통해 어떻게 이미지를 구축하고, 시대적 흐름을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과 함께 출발한 MBC 청룡은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1990년 대기업 럭키금성에 야구단을 팔며 ‘LG트윈스'가 됐다. ‘LG’는 생활브랜드인 럭키(Lucky)와 가전브랜드인 금성(Goldstar)에서 따왔고 트윈스는 여의도에 있던 쌍둥이 모양의 본사 건물에서 착안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럭키와 금성사가 같은 회사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LG는 창단 첫해인 1990년 우승을 했고, 특히 1994년 두 번째 우승에서 엄청난 사회적 관심을 받았다. 새롭게 부임한 이광한 감독의 ‘자율야구’, 미남 신인 3인방의 인기와 여성 팬의 등장 때문이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이었고 군대 문화가 강했다. 하지만 이광한 감독은 자율야구를 통해 감독과 선수의 수평적 소통, 선수 스스로의 실력 향상을 도모했다. 또한 1994년 LG트윈스에 입단한 유지현-서용빈-김재현, 신인 삼인방은 발군의 실력은 물론이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성 팬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탈권위주의, 선진 시스템 도입 그리고 여성 팬덤과 한국시리즈 우승. 이러한 흐름은 1990년대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시대 분위기와 어우러졌고 무엇보다 럭키금성의 기업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야구단 LG트윈스의 엄청난 인기를 바탕으로 1995년 럭키금성은 회사명을 LG로 바꾼다. 럭키는 LG화학, 금성사는 LG전자, 럭키금성상사는 LG상사로 이름이 통일되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와 계열사를 통합해 대기업의 브랜드를 강화하는 첫시도였던 것이다. 야구 마케팅을 통해 대기업의 이름까지 바뀐 스포츠 마케팅에서의 이례적인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라운드에서 읽는 한국 대기업 이야기

LG 이외에도 많은 기업들은 프로야구에서의 성공과 기업 이미지 브랜딩 사이에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의 두산 베어스의 경우 원래는 ‘OB 베어스’였다. 야구팀 이름에 그룹명 대신, 자사 맥주 제품인 OB를 붙여 화제였는데 당시엔 맥주 시장의 80% 이상을 OB맥주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친근한 서민의 음료'를 기업 이미지에 반영한 것인데, 외환위기 이후 OB는 벨기에의 주류 회사인 인터브루에 매각되고, 두산의 핵심 사업 분야를 소비재 사업에서 중공업으로 옮기며 ‘두산 베어스'로 이름을 바꿨다.

비슷한 사례로는 ‘한화 이글스'가 있다. 한화 이글스의 옛 이름은 ‘빙그레 이글스'다. 1985년 당시 한화는 한국화약그룹이었고, 빙그레는 한화의 소비재 계열사였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국민들에게 익숙한 브랜드는 역시 소비재였다. 또 빙그레 하면 ‘바나나맛 우유'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가. 한화는 두산과 비슷한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 주홍색 줄무늬 유니폼 또한 제과 기업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추후 빙그레가 한화 그룹 계열사에서 완전히 독립하면서, 1994년부터 빙그레가 아닌 ‘한화 이글스'로 불리게 됐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2000년대 초반 연거푸 우승을 이어갔는데 이 또한 기업의 경영 전략과 맞닿아 있다. 1998년 외환위기로 한국 기업들은 무너지고 있었다. 당시 삼성은 초대 이병철 회장에서 이건희 회장으로 기업 승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등 경영'을 통해 세계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비전에 따라 삼성은 난관을 타개하며 전자와 반도체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야구뿐 아니라 배구, 농구 등 당시 삼성이 가지고 있던 스포츠 구단이 전 분야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기업 총수의 적극적 의지와 막강한 투자가 기업의 성장, 프로야구 우승 그리고 기업 이미지의 강화로 이어져 선순환을 이뤘다.

1990년대 이후 세계의 경제 환경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수많은 기업들의 흥망성쇠를 따라 프로야구단도 변해왔다. 앞으로 한국 야구사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까? 뜨겁고 즐거운 관중 문화, 치열한 경쟁과 새로운 야구 왕조의 탄생, 더불어 기업과 야구의 공생이 이루어낼 새로운 변화를 기대해 본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심용환 에디터 이미지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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