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악마, 현직 천사? 조지 소로스의 투자와 인생

by 김동길

슈퍼 개미를 넘어, 위대한 투자가의 탄생

우리는 개미입니다. 투자의 세계에서 우리 중 대다수는 개미로 태어나서 개미로 죽습니다. 우리의 손끝은 예상 밖 수익을 가리키고 있지만, 발은 예상 밖 손실을 디디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산 주식이 급등하면 미리 더 사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좀 떨어지면 더 사야지’ 하다가 결국 매입가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 팝니다. 주가가 급락하면 손이 떨려서 저가 매수 기회를 놓치거나, 본의 아닌 장기 투자로 버티다 주가 반토막을 맛보기도 하지요. 동학이니 서학이니 수식어가 붙지만, 그래봐야 우린 개미입니다. 

가끔 어떤 개미들에게는 가슴팍에 대문자 S자가 솟아나는 유전자 변이가 일어납니다. 또한 이들 슈퍼 개미 중 어떤 이들에게는, 쑥과 마늘을 먹은 곰이 사람되는 것처럼 위대한 투자가로 바뀌는 상전이(물질의 물리적 성격이 바뀌는 것)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넘보지 못할 큰 돈을 투자로 번 사람들이죠. 이들 중 몇몇의 이름은 워렌 버핏, 손정의, 박현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극히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돈을 벌었는데(한때 최대 자산 규모 40조 원 추정), ‘열린 사회’를 만들겠다는 예상 밖 목적을 위해 38조 원이 넘는* 돈을 써버린 사람. 개미에서 위대한 투자가로, 이제는 세상을 바꾸는 거룩한 자선가로 상전이 된 사람. 그의 이름은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입니다.  *그가 설립한 Open Society 재단 홈페이지에는 그의 기부액이 320억 달러(1달러 1,200원 가정 시 38조 4천억 원)를 넘었다고 공개하고 있습니다.

작은 단서에 달린 생명줄을 부여잡고, 살아남다

1차 대전은 끝났고(1918년) 2차 대전은 시작(1939년)되기 전인 1930년, 유대인 조지 소로스는 유럽 동부 헝가리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년까지 그곳에 살았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티바다르 소로스(Tivadar Soros)의 혜안 덕분이었어요.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 20세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청년 티바다르 소로스는 육군으로 입대했습니다. 그는 이후 제정 러시아 군대와 전투를 치르다 포로가 되었고, 전쟁이 이미 끝난 1920년이 되도록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죠. 리더십과 야망이 있던 그가 수용소 내부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려는 운동을 이끌자, 수용소 책임자는 그에게 ‘포로 대표’라는 직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 자리는 자잘한 특권이 있어 나쁘지 않았지만, 티바다르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로수용소에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티바다르 대신에 선임된 포로 대표는 본보기로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전시 상황에서는 순간적인 판단이나 우연한 결정의 대가로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실제적인 이유죠. 평소에는 출근길에 8시 지하철을 탔느냐, 8시 5분 지하철을 탔느냐가 내 수명을 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신을 만날 뻔했다가 운 좋게 목숨을 지킨 티바다르의 이 경험은, 그 후 2차 세계대전에서 생존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축구장 가운데 서서 전방과 후방의 흐름을 읽고 팀을 이끄는 미드필더처럼, 어제와 오늘이 천국과 지옥처럼 다른 전쟁의 흐름을 읽고 잘 대응하여, 자신과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목숨까지 지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티바다르는 수용소에서 탈출해서 헝가리로 돌아왔습니다. 1924년에 10세 연하의 에르베제트 스주츠와 결혼하여 1926년 첫째 폴, 1930년 둘째 조지를 얻고, 변호사로 일하며 적당한 부를 쌓았죠. 하지만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헝가리와 독일 사이에 있는 폴란드가 포화에 휩싸였고, 전쟁이 종말로 치닫던 1944년 3월, 나치 독일의 탱크는 마침내 소로스 가족이 사는 헝가리로 진격합니다. 전황이 점차 독일에 불리해지자, 헝가리마저 연합국에 빼앗기면 전세를 뒤집는 건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한 독일이 전격적으로 점령해 버린 거죠. 그리고 헝가리 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가합니다. 

게슈타포의 유대인 관련 부서를 이끌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점령 당일(3월 19일) 헝가리에 도착했고, 곧바로 유대인 학살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맨 먼저 유대인 위원회를 창설하여 유대인 현황을 파악했고, 곧이어 유대인을 특수 거주 지역으로 몰아넣은 다음, 아우슈비츠와 같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 학살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었죠.  

당시 김나지움(우리의 중학교에 해당) 학생이었던 조지 소로스는 마침 이 유대인 위원회에서 일종의 아르바이트 비슷한 일을 했는데, 어떤 인쇄물을 유대인들에게 배달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조지는 아버지에게 인쇄물을 보여주었는데, 내용은 유대인 법률가들을 소환하여 추방하려는 것이었죠. 소환장은 성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통보되고 있었는데, 이미 알파벳 A, B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발부되었으므로, S로 시작하는 티바다르 소로스에게 발부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신문의 행간 속에서 전쟁 상황의 미묘한 변화를 읽어내고, BBC 라디오 독일어 방송을 청취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던 티바다르는 아들이 가져온 소환장을 보고는 곧바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차렸습니다.  

티바다르는 그동안 돈독히 해두었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주변 기독교인들의 인적 서류들을 얻어 인적 정보를 위조했습니다. 본인과 가족의 이름과 성을 모두 바꿨죠. 그 어떤 유대인스러운 느낌조차 남기지 않을 요량이었습니다. 티바다르는 엘렉 스자보, 아내 에르제베트는 율리아 베사, 첫째 폴은 야노스 발라즈, 막내 조지는 산도 카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 이름, 생일, 주소, 학교 졸업일 등을 외워 다른 사람이 되었고, 모두 흩어져 살았습니다. 모여 살다가 몰살당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죠. 또한 티바다르는 신분 위장용 위조 서류를 제공하는 등 다른 유대인들을 도왔습니다. 헝가리 거주 유대인들 약 80만 명에 달했으나, 이들 중 45~60만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티바다르 가족은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어린 소로스는 미래에 대한 아버지의 판단과 예측, 그리고 과감한 대응을 보며, 순식간에 스쳐 지나는 조그만 단서를 통해 미래의 위험과 기회를 직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투자에 대한 판단력은 이렇게 일찌감치 키워진 셈입니다.   

인식 능력의 한계를 꿰뚫는 투자 철학

이듬해인 1945년에 독일이 항복했으나, 이번에는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합니다. 티바다르는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으로 인해 유럽이 동·서로 분할되고, 이동의 자유 또한 곧 사라지고 말 것임을 직감했죠. 그래서 소로스를 먼 친척이 살고 있는 영국 런던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947년, 18세의 소로스는 영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런던정경대학(LSE)에 진학하여 철학자 칼 포퍼의 철학*에 심취했고, 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대신 금융회사에 취업했죠. 처음에는 퇴직을 권유받을 정도로 성과가 좋지 않았으나 점차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우연히 미국의 소규모 금융상품 중개(Brokerage)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잡아 1956년, 27세의 소로스는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열린 사회(Open Society)로 대변되는 칼 포퍼의 철학에 소로스가 큰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혔고, 이는 소로스 고유의 철학 개념인 ‘오류성’과 ‘재귀성’의 기반이므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나, 소로스의 인생에 중점을 둔 본 글에서는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이 부분이 궁금하신 분들은 칼 포퍼의 저작 “열린사회와 그 적들”, 유튜브 등을 참고해주세요.

남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을 예상하고 대응하여 가족 전원이 살아남은 것처럼, 조지 소로스는 금융시장에서도 남들이 예상치 못한 것을 먼저 예상하여 대응할 수 있다면 큰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당시 생소했던 신주인수권부사채(BW) 거래에서 수익을 냈고, 1950년대에 거의 최초로 기업 탐방을 다니면서 미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우량 유럽 기업을 발굴하는 분석가로 금융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부터는 소로스를 자신을 세계적인 투자가의 반열에 올린 헤지펀드(Hedge Fund)를 운용하기 시작했죠. 

헤지펀드는 주식은 물론 채권, 외환, 원자재 등 다양한 상품에 대해, 가격 상승 시 이익을 보는 매수(Long)는 물론, 가격 하락 시 이익을 보는 공매도(Short) 등 다양한 전략으로 절대 수익을 추구하는 자산운용 기구입니다. 일반인들의 투자금을 받는 뮤추얼 펀드가 아닌 한정된 투자자들의 자금만 받아 운용하므로 정부의 규제가 없었고, 그 때문에 엄청난 레버리지(돈을 빌려서 투자)를 일으켜 수익을 극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물론 손실 규모도 클 수 있어 파산하기도 쉬웠습니다). 따라서 헤지펀드는 펀드 매니저의 역량에 따라 성과가 크게 좌우되었는데, 소로스는 대학 시절부터 추구해왔던 자신의 철학에 기반하여 헤지펀드 운용에서 엄청난 성과를 냈습니다. 그의 철학은 ‘오류성(Fallability)’과 ‘재귀성(Reflexivity, 반사성으로도 표현)’으로 요약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버블 사태를 예로 설명해 볼게요.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튤립 가격이 왜 오르는지 잘 몰랐습니다. 튤립 가격이 지금까지 올랐으니, 앞으로도 오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한 뿌리에 수천만 원을 주고 튤립을 샀습니다. 이것이 오류성입니다. 시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왜곡된 인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거래를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재귀성은, 이러한 왜곡된 지식을 바탕으로 거래를 하면, 그 거래가 나는 물론 타인에게도 영향을 줘서(튤립 한 뿌리가 수천만 원에 팔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 앞으로 더 오를 것 같은 튤립을 더 사서 비싸게 팔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내게 (반사되어) 돌아온다는 거죠. 그러다가 하늘 높이 오른 가격으로 더 이상 꽃 한 송이를 사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되면 튤립 가격은 대폭락을 맞이하게 됩니다. 실제 튤립 한 뿌리의 가격은 최고 1억 원을 넘겼었다가 대폭락했어요.

다시 말해 세상에 대한 인식 능력의 한계를 지닌 인간이,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거래를 통해 나는 물론 타인에게도 영향을 주어 결국 금융상품 및 시장의 과열과 붕괴를 가져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의 불완전성을 역이용할 수 있다면 큰 돈을 벌 수도 있는 것이구요. 

투자가와 악마는 종이 한 장 차이?

조지 소로스는 지금은 미디어 출연으로 더 유명한 투자가인 짐 로저스(Jim Rogers)와 함께 1973년에 소속회사*로 부터 독립하였습니다. 소로스 펀드라는 이름(추후 퀀텀펀드로 변경)으로 헤지펀드 운용을 시작한 첫해(1974년)부터 17.5%의 수익률을 달성하여 다우존스 지수의 -24%를 크게 앞질렀고, 이듬해에는 27.6%, 76년에는 무려 61.9%의 수익률(다우 +23%)을 냈습니다. 그 이후에도 놀라운 수익률 행진은 계속되어 1980년에 102%, 85년에는 무려 122%에 달했습니다. 1974년 첫해의 자산 규모는 약 1,200만 달러였으나, 1998년에는 약 60억 달러에 달해 약 460배 커졌습니다.  * ‘Arnhold and S. Bleichroeder’라는 유서 깊은 투자은행이었습니다.

이처럼 퀀텀펀드가 탁월한 수익률을 기록했던 것은 정보 수집과 금융시장에 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시장의 움직임을 앞서 내다보고, 과감한 투자를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 군을 이스라엘 밖으로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예상보다 많은 탱크와 전투기를 잃어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이것이 기습공격을 받은 데 따른 것이라는 것이 당시 대다수 분석가의 생각이었죠. 그러나 소로스와 로저스는 리서치를 통해 이 피해가 사실 소련이 성능이 향상된 무기를 아랍에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고는, 향후에 보다 진화된 무기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수요가 폭증할 것이라는 데 베팅하여 방위산업체 주식을 쓸어 담았고, 실제로 주가가 나중에 크게 오르자 이를 팔아 큰 수익을 내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지금도 있습니다. 정부가 올해 1월 26일부터 광주 등에서 신속항원검사(진단키트)를 시범 도입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 전에는 선별진료소에서 모두 PCR 검사를 받았지만, 26일부터는 단순의심자는 신속항원검사 양성이 나와야 PCR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지요. 시범 지역에서의 결과가 좋을 경우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고, 그러면 신속항원검사 진단키트 수요 폭증과 진단키트 공급회사 주가 급등 또한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뉴스 발표 후 주식시장에 상장된 진단키트 회사 SD바이오센서, 휴마시스의 주가는 올랐습니다. 휴마시스의 경우 1월 25일 종가가 19,050원이었으나, 26일 20,500원(+1,450), 27일 21,850원(+1,350원), 28일 28,400원(+6,550원), 2.3일 34,500원(+6,100원)으로 급등했어요.* 시범 도입 당일 매수하고 다음 날에 팔아도 제법 수익을 낼 수 있었고, 운 좋게 2월 3일에 팔았다면 며칠 만에 거의 70% 가까운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주가는 다시 하락했습니다. 이러한 상승 모멘텀을 활용한 투자는 순발력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만, 보통의 개인투자가들은 자기 자금의 일부를 투자하여 수익을 내겠지만, 소로스는 투자에 대한 판단이 섰을 때 펀드 가용자금 모두는 물론, 빌릴 수 있는 모든 자금을 다 끌어모아 투자하는 엄청난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대담함의 끝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1992년의 영국 파운드화 공매도 사건입니다.  

공매도는 향후에 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자산을 타인으로부터 빌려서 팔고, 나중에 실제로 가격이 하락했을 때 싸게 사서 빌린 이에게 돌려주고, 그 차액을 얻는 거래 기법을 말합니다. 퀀텀펀드는 92년 당시 경제가 좋지 않던 영국의 파운드화의 가치가 결국 하락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기 자금 외에 무려 30억 달러를 빌리는 등 총 10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만들어 90억 달러 상당의 파운드를 공매도하는 대공세를 펼쳐, 몇 달 만에 10억 달러(1달러를 1,200원으로 계산하면 1조 2천억 원)라는 엄청난 수익을 냈습니다.  *당시 영국의 환율정책 관련 상세 내용은 ‘소로스, 1992년 ‘영국’ 어떻게 침몰시켰나’를 참고해주세요.

리서치를 통한 탄탄한 예측력을 기반으로 투자했다지만, 퀀텀펀드를 위시한 헤지펀드들의 과감하다 못해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인 투자, 특히 외환 투자는 영국과 같은 선진국은 물론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98년 러시아 국가부도와 같은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헤지펀드의 대부로 불리던 소로스는 악마라 불리며 많은 비판을 받았어요. 헤지펀드들도 이 와중에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고 파산하기도 했습니다. 퀀텀펀드 또한 1998년에 20억 달러, 2000년에는 30억 달러라는 큰 손실을 입기도 했죠.

2011년부터 퀀텀펀드는 외부 투자자금은 모두 돌려주었고, 소로스 가족의 자금만 운용하는 펀드로 전환했습니다. 과거처럼 공격적인 투자는 지양하고 주식과 채권 위주의 투자를 하고 있지만, 2022년이 된 지금도 자산운용 수익률이 Top10 안에 드는 등 성공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침도 있어서 올해의 경우 전기차 회사 리비안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큰 손실을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닫힌 문을 열어젖힌 전직 악마, 현직 천사

조지 소로스는 헤지펀드의 매니저로서 국제 금융시장과 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엄청난 투자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1979년을 기점으로 그는 ‘국적 없는 정치가’가 되어 웬만한 규모의 나라가 할 일을 대신하는 ‘걸어다니는 정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자선 사업은 197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내 흑인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는 흑인에 대한 교육 기회 차별이라는 ‘닫힌 사회’를 누구에게나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는 ‘열린 사회’로 전환시키기 위한 첫 실천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직 소련이 붕괴되지 않았던 1984년에 공산 치하의 헝가리 국민들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헝가리 안에서 구할 수 없거나 금서로 분류된 책을 수천 권 구입하여 국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어요. 또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복사기를 보급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공산 헝가리는 복사기를 이용하여 책을 복사하거나, 글을 복사하게 되면 체제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복사기 이용을 철저히 제한했습니다. 복사기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이를 사용하려면 복사할 자료의 몇 페이지 몇 번째 줄을 복사할 것인지를 신청서에 써서 제출하여, 심의를 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복사가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헝가리 당국과의 줄다리기 끝에  이러한 사업을 허락받았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생각을 공유하고 나아가 의식과 행동의 변화까지 이어지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소로스는 알바니아, 불가리아, 체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에 있달아 재단을 만들고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활동들을 하는 한편, 1991년에 헝가리에 중부유럽대학(Central European University)을 세우는 등 교육 사업에도 힘쓰게 됩니다. 1993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던 사라예보 시민들을 위해 공급이 끊긴 가스, 수도, 전기를 복구시키는 등 자선사업 영역을 더욱 확장했죠. 심지어 구 소련 붕괴 당시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던 과학자들을 위해 연금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유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학살을 겪은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사법정의 세우기, 미얀마와 인도네시아 민주화, 유럽에 흩어져 사는 집시들의 교육 및 예술 진흥, 장애인 인권 증진, 아이티 지진 복구 등 종류와 대상 국가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2010년대 이후에는 시리아, 이라크 및 미얀마의 로힝야 난민 지원,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에 대한 긴급자금 지원 등 UN과 같은 국제기구가 할 법한 일들을 그가 설립한 ‘열린 사회 재단(Open Society Foundation)’을 통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동안 재단에 무려 320억 달러가 넘는 돈(약 38조 원)을 기부했고, 재단은 180억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집행하여 열린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돈은 얼마나 악하고, 또 선한가 

닫힌 사회의 결과물인 배척과 차별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고 이름과 성까지 바꿔 살아남았던 조지 소로스. 이 시대의 지배적 가치인 돈을 다루는 금융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자리매김한 뒤, 자신의 목을 쥐고 흔들었던 닫힌 사회를 열린 사회로 바꾸는 데 그가 가진 천문학적 규모의 부를 쏟아붓고 있습니다. 1930년생이니, 2022년에 93세가 되었지만 아직 그는 이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펀드 매니저로서 그의 투자는 세상의 모든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었습니다. 90년대만 해도 그는 악마로 불렸고, 헤지펀드는 약소국을 집어삼키려는 선진국 금융가들의 사냥개로 치부되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8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이 2,000원을 넘긴 데는 그의 역할도 일부 있었을 겁니다. 저도 그 바람에 멀쩡한 직장인들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든 금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 이렇게 그의 인생을 놓고 글을 쓰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네요. 

자선가로서 그의 투자는 자신의 모든 돈을 도로 세상에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가 지향하는 가치의 구현을 위해서요. 지금 그는 천사로 불려도 하나 모자람이 없어 보입니다. 그의 재단은 약소국과 세계의 약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웁니다. 재단의 역할은 그야말로 웬만한 국가를 뛰어넘습니다.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투자가로서 시장의 허점을 찾아 과감을 투자를 했을 때는 악마로 지칭되었고, 자선가로서 철학적 지향(열린 사회)을 세상에 구현하고자 막대한 부를 쏟아붓자 천사라 불린 소로스의 인생을 들춰보며 보며 투자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합니다. 그가 벌어들인 돈에는 외환위기 시절 우리 아버지들이 실직으로 받지 못한 돈이 섞여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꽃피우지 못했던 그들 자녀들의 오래된 미래가 뭉쳐져 있을 겁니다. 한편 그가 지금 쓰고 있는 돈에는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난민들의 회복과 치유, 그리고 희망이 묻어나고 있을 것만 같아요. 

인생은 무엇이고 투자는 또 무엇일까요? 확실한 것은 소로스의 철학에 근거해볼 때, 인생과 투자를 정의한다면 분명 거기에는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오류가 열린 사회에서는 많은 이들의 논의를 통해 고쳐지겠지만, 닫힌 사회에서는 쉽게 고쳐지지 못하고 더 큰 오류를 야기할 겁니다. 그래서 인생과 투자의 정의는 계속 고쳐져야 합니다.

비단 사회만 열려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개인도 열려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나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오류가 있을 경우 이를 수정하여 개선하는 열린 자세. 아흔 살이 넘은 소로스는 아직도 자신에게는 오류가 있으며, 이로 인한 손실을 줄이려 애쓰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프레임을 만들든 편향되거나 불완전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죠. 중요한 것은 조심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영상 캡처 출처=Open Society Foundations 유튜브

Edit 주소은 Graphic 이은호, 박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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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위기를 겪었고 위기를 다루며 위기를 공부하는 사람. 성균관대 경제학부와 KDI 국제정책대학원을 졸업했고, 기획재정부 영 프로페셔널(YP)을 거쳐 한국주택금융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998년 외환위기 때문에 학업을 접어두고 취업했고, 입사 첫 달부터 월급이 나오지 않는 상황을 겪으며 경제위기 원인과 해결책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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