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 세일 시작’ 누르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by 김경일

싸다? 비싸다? 가격에 대한 흥미로운 괴리

지금 시장에서 어떤 물건 하나를 살까 고민 중이다. 가게 주인에게 가격을 물으니 2만 원이란다. 좀 깎아 보자 싶어 1만 8천 원을 부른다. 그랬더니 주인은 “그건 좀 어렵고, 정 그러면 1만 9천 원에 가져가시죠”라고 한다. 안 그래도 갖고 싶던 것을 천 원 깎아서 살 수 있게 되어 기분이 내심 좋아진다. ‘내가 흥정을 좀 할 줄 안단 말이야’라는 뿌듯함이 고개를 든다. 비록 그것이 가게 주인으로서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2만 원인 물건을 10% 할인해서 1만 8천 원에 사게 되면, 대다수가 자신이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구입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물건 값을 공개하기 전에 실제 저 물건이 얼마면 사겠는지 매겨보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격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1만 5천 원, 즉 25%나 싼 가격부터 추정을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물건 가격이 2만 원이라고 미리 알려준 다음 흥정을 시작하라고 하면 대부분이 10% 정도 내린 1만 8천 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불일치다. 우리는 어떤 물건이나 대상에 대해 미리 가치를 매겨놓지 않으면 상대방이 설정한 가치의 틀 안에 덥석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영미권 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리한 쇼핑객(Smart Shopper)’을 위한 조언에도 이런 말이 등장한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했다면, 그 물건의 가격표를 보기 전에 가격을 마음속으로 미리 매겨두어라.” 왜 그래야 할까? 미리 가격을 매기지 않고 상대방이 매겨놓은 가격표를 보는 순간 이미 판매자가 원하는 범위 안에서만 사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 제시된 가격은 생각보다 강력한 기준점이 된다

〔 50% 파격 세일! 100만 원 → 50만 원 〕 

한 테이블 위 가격표에서 50만 원은 재료비, 인건비, 유통비, 부가가치 등이 포함된 합리적인 가격일 수도, 상술로 인해 부풀려진 가격일 수도 있다. 100만 원이 원래 가격임을 인지하고 나면 50% 할인에 흡족해하며 장바구니에 담을 확률은 훨씬 높아진다. ‘내 예산 안에서 이 정도라면 저 물건은 살 가치가 있다’라는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소비는 사라지고 ‘100만 원짜리를 50만 원에? 지금 사야겠네’만 남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것의 가치를 평가할 때 상대방이 책정한 임의의 가격이 가격표에 써 있으면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닻 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부른다. 심리학에서 널리 알려진 현상인데, 이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짚어보면 ‘사람들은 어떤 것의 실제 가치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나마 비교는 쉽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기에 비교에 용이한 정보나 숫자가 주어지면 그것이 임의로 설정된 것이거나 심지어 무의미한 무작위의 숫자여도 사람들은 판단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닻’에 내가 좌우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가치를 매겨 놓아야 한다. 구매를 고려하는 품목이 있다면 내가 얼마나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를 틈틈이 생각해 놓아야 한다. 그게 없다면 순식간에 일어나는 거래의 순간에 항상 상대방의 기준점으로부터 출발해 그 부근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게 될 수밖에 없다. 금전적으로 무언가 손해 보는 거래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평소에 이런 범위 설정에 소홀하기 때문임을 잊지 말자. 

내가 얻는 것 vs. 상대방에게 줄 것 무엇을 먼저 꺼내야 할까

이번에는 반대로 판매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위에서 살핀 것처럼 심리적 ‘닻’이 존재한다면 나에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와 관련해 재치 있는 연구를 한 사람들이 있다. 독일 로이파나(Leuphana) 대학의 심리학 교수 요한 마요르(Johann Majer) 연구팀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참가자들에게 가상의 회사에 대한 주식을 서로 분배하는 협상 게임을 하게 했다. 참가자 절반은 제안(offer)을, 나머지 절반은 요청(request)을 먼저 하도록 했는데, 둘의 차이는 일종의 맥락 차이이다. 전자는 내가 상대방에게 무엇을 줄지에, 후자는 내가 무엇을 가져올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메시지도 각각 이렇게 달랐다. 제안하는 사람들은 “주식 15주를 각각 O달러에 드리겠습니다”, 요청하는 사람들은 “각각 3불에 주식 O주를 요청합니다”라는 말을 해야 했다. 물론 상대방은 역제안을 할 수 있었고 양측이 합의할 때까지 협상을 계속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협상의 시작을 상대방에게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한 사람들이 요청으로 시작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보는 공통적인 협상 결과를 낳았다. 

이 실험 결과를 해석해보면, 협상에 임할 때 내가 하는 첫 마디가 상대방이 얻게 될 것(내가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해당 제안이 닻 내림 효과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이 거기서 많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종적인 결과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해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 만약 나의 첫 마디가 요청의 형태라면, 상대방은 저절로 자신이 포기해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당연히 포기할 것들을 먼저 생각하면 거부하고 싶기 때문에 나의 말을 더 무시하거나 공격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결과가 나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해지고 마는 것이다. 

협상과 흥정은 우리 일상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모든 관계에서 발생한다. 당연히 우리는 그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결과를 얻고 싶다. 역설적이게도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포기해줬으면 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얻을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면 첫 제안을 던질 때 무조건 내게 유리한 것보다는 나와 상대방 둘 다에게 합리적인 수준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다. 패를 숨기는 사람보다 숨기지 않는 사람이 더 자주 승기를 잡는다는 것 또한 심리학에서 관찰한 사실이다. 설령 내가 보여준 패에 상대방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도 여전히 나는 얻을 것이 있다. 상대방이 협상에 조금도 관심 없음을 알고 내 시간을 아낄 수 있지 않겠는가.


Edit 주소은 Graphic 이은호

– 해당 콘텐츠는 2023. 1. 27.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토스피드의 외부 기고는 전문가 및 필진이 작성한 글로 토스피드 독자분들께 유용한 금융 팁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현명한 금융 생활을 돕는 것을 주목적으로 합니다. 토스피드의 외부 기고는 토스팀 브랜드 미디어 운영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되며, 토스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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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인지심리학자이자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결정, 문제해결, 창의성에 관해 연구했다. 다양한 기관・매체에서 강연하며 ‘생각의 작동 원리'를 알리고 있다. 인지심리학을 바탕으로 ⟪지혜의 심리학⟫과 ⟪적정한 삶⟫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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