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를 듣지 않는 시대에 여전히 음반이 중요한 이유
ㆍby 차우진
“세븐틴이 진짜로 인기가 많아요?”
어느 기업 특강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마침 2024년 상반기에 세븐틴의 음반 판매량이 530만 장 이상을 기록했다는 뉴스가 나온 후였다. 2024년 4월 29일 발매된 [17 IS RIGHT HERE]의 판매량 외에 이전 앨범들도 108만 장 이상 판매되며 세운 기록이다. 이로써 세븐틴은 2024년 기준, 예전 앨범을 100만 장 이상 판매한 최초의 케이팝 그룹이 되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최신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는 2024년 상반기에 미국에서만 466만 장 (스트리밍/다운로드 등 총합, 앨범만 집계하면 247만 장)이 판매되었다. 세계 최고 가수라고 불리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앨범 판매량보다 세븐틴 앨범의 판매량이 더 높은 것이다.
그런데 실감은 나지 않는다. 주변에서 실제로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븐틴이 진짜로 인기가 많냐?”라는 질문을 한 사람도 바로 이게 의아했을 것이다.
“음반 판매량은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음반 판매량의 딜레마
음반 판매량이 중요했던 건 아티스트의 성장과 음악 회사의 수익성을 판단하는 데 핵심적인 지표였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아티스트들을 찾아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음반 판매량이다. 비틀스의 누적 앨범 판매량은 4억 2,500만 장이고, 마이클 잭슨은 3억 4,000만 장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퀸, 마돈나 등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가수들은 대부분 1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마이클 잭슨의 대표작 [Thriller]는 1억 2,0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20세기 최고의 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앨범 판매량이 곧 스타성, 완성도, 영향력 등을 판단하던 기준이던 20세기에 메인스트림 팝스타는 보통 천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했다. 그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으려면 반드시 음반을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 무료 혹은 유료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뮤직비디오도 음원을 대체하고 있다. 초연결 시대에 음악은 언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되었다. 이렇게 낮아진 접근성은 음원의 가격을 거의 무료에 가깝게 만들었다. 지금 음반을 구매하는 것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크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음반 판매량이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과거에 음반 판매량은 음악과 아티스트의 대중적인 영향력과 수익성을 파악할 수 있는 핵심 데이터였지만, 지금은 음반을 ‘굳이' 구매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팬의 규모를 가늠하는 데이터 중 일부로 여겨진다.
그런데 제아무리 열성팬이라도 음반을 수집하는 기쁨 때문에 같은 앨범을 여러 장 중복해서 사는 건 아니다. 특히 케이팝의 팬들은 같은 앨범을 여러 장 사야 할 이유가 따로 있다. 많이들 알고 있듯, 멤버들의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서, 혹은 팬 사인회 추첨에 응모하기 위해서다. 이런 경우에 음반은 ‘음악이 담긴 종합 선물 세트'인 동시에 ‘포토카드의 부록'이거나 ‘추첨을 위한 입장권'이 된다. 음반샵 주변이나 길거리에 케이팝 그룹의 음반들이 대량으로 버려지는 건 그 때문이다. (예전엔 보육원이나 아동후원단체 등에 ‘기부'했지만 거기서도 CD는 처치 곤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요즘엔 그냥 버려진다.)
음반의 가치가 떨어진 건 인터넷과 MP3 때문이다. 이전에는 음반이 곧 음악이었다. 하지만 음악이 디지털 파일 형태로 음반에서 분리되자, 음반은 플라스틱 쪼가리에 불과해졌다. 그런데도 가격은 1만 원이 넘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이렇게 애매해진 음반을 판매하기 위해 여러 실험이 벌어졌다. MP3 추출을 막기 위해 복제 방지 기술을 반영하거나, 고급 소재로 음반을 제작하거나, 음반에서만 들을 수 있는 미공개 트랙을 숨겨 놓거나, 심지어 관련된 소설책을 함께 묶어서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이후 미국과 한국의 대응 방향이 달라진다. 미국의 음악 산업은 ‘콘서트'로 이 위기를 돌파했지만, 한국은 어떻게든 음반을 판매하는 방향을 고수했다. 앨범을 포토북으로 만들거나, 포토카드를 넣거나, 커버를 다양하게 만들거나 등등. 이런 방향은 강력한 팬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케이팝을 ‘육성 시스템'이나 ‘엔터테인먼트 패키지' 등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나는 케이팝이야말로 팬덤 기반의 사업 구조를 매우 촘촘하게 구축한, ‘팬에 최적화된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음반은 ‘반드시 팔리는 제품이자 마진율*도 높은 제품'이 된다. 케이팝 산업은 이런 구조에서 20년간 성장할 수 있었다. *한 기사에 따르면, 4대 기획사의 대표 그룹 앨범 마진율은 평균 170%에 달한다.
음반 판매량으로 본 케이팝,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랜덤 카드 만들고, 밀어내기 하고 이런 짓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제발. (중략) 알음알음 다 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이게 뭐 때문에 수치가 올라가는지… 시장이 비정상이 되고 나중에는 주식시장도 교란돼요. 그거 다 팬들한테 부담으로 전가돼. 럭키 드로우로 소진해야지, 팬 사인회 해야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는 기자회견 중에 이렇게 얘기했다. 랜덤 포토카드, 앨범 밀어내기 등 케이팝 산업의 관행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음반)밀어내기'는 기획사가 판매자에게 미리 판매 수량과 비용을 받은 뒤 그 물량을 공급하는 관행이다. 사입 방식 같지만, 판매량을 맞춘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 판매자는 미리 구매한 물량을 소진하기 위해 팬 사인회 같은 이벤트를 포함해 진행한다.
예를 들어 어떤 케이팝 그룹의 팬 사인회 비용이 최소 5억 원이라면, 음반 판매처는 이 그룹의 음반 5억 원어치를 매입한 뒤 팬 사인회 추첨을 통해 물량을 소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5억 원'은 케이팝 그룹이 팬 사인회에 출연하는 출연료가 된다. 팬도, 판매자도, 아티스트도 행복하지 않은 구조다. 이렇게 집계된 판매량은 특히 발매 첫 주의 판매량, 즉 초동 판매량의 데이터가 되고, 보도자료로 기사화되어 케이팝 그룹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지표가 된다. 이런 구조에서 팬들은 본의 아니게 음반 판매량 경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판매처는 음반을 소진하기 위해 음반 한 장당 추첨권 한 장을 제공한다. 이 구조에서 팬은 당첨되기 위해 여러 장의 음반을 구매할 수밖에 없다.
민희진 전 대표의 지적대로, 케이팝 음반의 판매량은 팬들의 반복 구입으로 달성되는 경우가 많다. 2023년 3월,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팬덤 마케팅 소비자 실태조사*’에서 음반 구매 목적 1위는 음반 수집(75.9%), 2위는 음악 감상(66.7%), 3위는 굿즈 수집(52.7%), 4위는 이벤트 응모(25.4%)로 나타났다. *2021~2022년 사이에 발매된 주요 케이팝 음반 50종과 관련한 조사로 응답자는 500명이었다.
이 결과는 팬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음반을 구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3위를 차지한 ‘굿즈 수집(52.7%)’ 중 랜덤 굿즈를 얻기 위한 구매 경험은 194명이었고, 평균 4.1개의 같은 앨범을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외 팬 사인회 등 이벤트 응모를 목적으로 음반을 구입한 경우는 102명으로, 평균 6.7개를 구매한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실물 CD를 통한 음악 감상은 5.7%에 불과했고, 83.3%가 음원 및 동영상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다고 답했다. ‘음악 감상'이라는 음반의 기능은 이제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팬덤 마케팅과 관련해 개선해야 할 사항으로는 15.2%가 ‘굿즈의 랜덤 지급 방식'을 꼽았고, 67.8%가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라고 답했다.
음반 판매량 중심의 케이팝 산업에 팬들만 회의적인 건 아니다. 2024년 4월, 골드만 삭스는 “케이팝의 음반 판매량은 오염되었다"는 제목의 리포트를 발행했다. 케이팝의 성장 잠재성은 매우 높지만, 음반 판매량을 성장 지표로 삼기는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앨범 중심의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 대신 오프라인 콘서트 관객이야말로 케이팝의 성장세를 측정하기에 더 좋은 지표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특히 팬데믹 동안 오프라인 활동의 부재로 앨범 판매량이 급증했고, 지표가 더 왜곡되었다고도 말했다.
지난 20년간 케이팝 산업은 앨범 판매량에 의존하는 구조를 가졌는데, 이제는 바야흐로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은 중요하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이유로 음반은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케이팝의 음반 판매량은 판매량 자체가 아니라 반강제로 판매하는 방식이 문제다. 음반은 여전히 레이블에게는 수익성 높은 상품이자, 팬들에게는 의미 있는 수집품이다. 스트리밍 시대에 음반을 구매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제품을 소장하고, 아티스트를 후원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건 수십 년 동안 달라지지 않은 앨범 구매의 동기다.
2024년 9월 21일과 22일, 서울 마포구의 문화비축기지에서는 제13회 서울레코드페어가 열렸다. 서울레코드페어는 음악 애호가들과 레코드 수집가들에게 인기 있는 이벤트로 케이팝보다는 재즈, 인디, 록, 힙합 등 장르 음악 레코드가 주로 판매되는데 한정판을 구매하기 위한 줄이 아침부터 늘어섰다. 이런 문화가 한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2008년부터 수백 개의 로컬 레코드 샵이 참여하는 레코드 스토어 데이(Record Store Day)가 이어지고 있다. 2008년은 아이튠즈가 미국 음악 산업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해였고, 미국 음악 산업의 구조가 음반에서 음원으로 전환되던 시점이었다. 처음에는 음악계에 불어닥친 디지털 혁신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행사였지만, 현재는 레코드 문화를 장려하는 행사가 되고 있다.
실제로 음반 판매량도 늘고 있다. CD와 바이닐(LP)을 포함한 물리적 음반 매출은 3년 연속 증가해 2023년 51억 달러(6조 7549억 5000만 원)를 기록했다. 심지어 바이닐*은 3년 연속 CD 판매량을 앞지르고 있다. 물론 이 음반을 구매한 사람들이 모두 음반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다. 턴테이블도 없으면서 바이닐을 구매하고, 벽에 걸어놓는다. 대부분의 음악 팬들에게 바이닐은 특별한 상품이라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2024년 3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힙노시스 : LP 커버의 전설]에 출연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바이닐 커버를 ‘작은 미술품'이라고 정의한다. 고가의 예술품을 살 수 없는 젊은이들에게 바이닐의 커버 아트는 미술품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스트리밍 시대에 음반이 중요한 이유는, 팬이 음반을 사기 때문이다. 팬들의 구매 행위는 결국 아티스트와 음악의 영향력을 시장에서 증명하는 지표로 이어지며 팬을 음악 산업을 움직이는 주체로 만든다. 음악 산업은 애초에 불확실성이 높은 분야다. 한 번 성공한 음악이 계속 성공하지 않는다. 그런데 팬들은 굳이 듣지도 않을 음반을 사고, 먼 길을 돌아 콘서트장과 페스티벌에 간다.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아니라 뚜렷하고 분명한 동기를 가진 팬이 중요한 이유다.
팬이 시장을 움직이고, 팬이 문화를 만든다
음악 산업은 아티스트, 사업자, 팬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아티스트는 음악을 만들고 완성하는 존재다. 작곡, 작사, 편곡, 퍼포먼스, 연주가 모두 포함된다. 사업자는 이런 음악을 판매하고 유통하고 아티스트의 권리를 보장하며 시장을 형성하는 주체다. 그리고 팬은, 이 모든 비즈니스 구조 위에서 비로소 문화를 만드는 존재다. 팬이 음악을 소비하고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방식이 곧 문화다. 케이팝이든 힙합이든 록이든 국악이든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업자야말로 아티스트와 팬에게 헌신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티스트가 좋은 커리어와 결과물을 만들도록 지원하고, 팬들이 건강한 문화를 유지하도록 후원할 때 전체 음악 산업은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음반 판매 관행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플라스틱 사용과 탄소 배출을 줄여 지구 환경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찾고, 여러모로 불편한 팬 경험을 향상하고, 몇 세대에 걸쳐 이어질 문화적 유산과 책임을 고민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Edit 송수아 Graphic 이은호
20년차 음악평론가. 2020년부터 TMI.FM(Tomorrow of the Music Industry)이란 뉴스레터를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분석하고 있다. 가끔 컨설팅과 투자 자문도 하지만, 주로 듣고 보고 읽고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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