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은 이제 소비자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다
ㆍby 차우진
“민정이가 누구야?”
밤 10시가 넘은 시간, 함께 사는 분이 내 휴대폰을 들고 와서 물었다. 아닌 밤 중에 울린 낯선 여자 이름의 휴대폰 알림 때문이었다.
“아… 에스파 윈터야…..” (걸그룹 에스파 멤버 윈터의 본명은 김민정이다)
에스파 윈터의 ‘버블(bubble)’ 알림이었다. ‘버블’은 한 달에 4,500원을 내면 최애 아이돌과 채팅할 수 있는 서비스다. 케이팝 아이돌뿐 아니라 배우와 운동선수도 있다. 버블은 2020년 2월에 출시된 프라이빗 메시징 플랫폼으로, 팬들이 직접 스타들과 1:1 소통을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디어유*가 서비스하고 있다. * 디어유는 카카오그룹의 계열사다. SM엔터테인먼트 자회사인 SM스튜디오스가 31.16%를 지분을 갖고 있고, 2대 주주로 JYP엔터테인먼트(18.05%)가 있다. 2023년 3월,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권이 카카오그룹으로 넘어가면서 손자회사였던 디어유도 카카오그룹의 계열사가 된 것이다. 디어유의 버블은 하이브의 ‘위버스(Weverse)’와 함께 팬덤 플랫폼의 강자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베리즈(BERRIZ)'라는 이름의 신규 팬덤 플랫폼 출시를 예고했다. 디어유의 버블과는 다를 것이라고 했지만, 시장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블의 아티스트들이 베리즈로 이탈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 소식 이후의 디어유 주가는 15.4%까지 떨어졌다가 지금까지 회복 중이다.
‘700 사서함’부터 ‘버블’까지, 팬 서비스의 오랜 역사
‘팬덤 플랫폼’은 최근에 주목받는 사업이지만 사실 그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시초는 ARS 음성사서함(Audio Response System)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 즈음 시범서비스로 시작되었다가 1990년대에 ´700 전화정보서비스´로 활용됐다. 안부인사부터 스포츠/증권 뉴스에 이르는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서비스였는데, 인기가요를 듣거나 만화영화나 게임, 괴담 서비스까지 등장하며 광범위한 팬덤을 끌어들였다.
이런 음성사서함 서비스 중엔 1991년에 시작된 1세대 아이돌 팬덤의 필수 서비스였던 ‘152 사서함’ 서비스가 제일 유명하다. 팬클럽별로 개설된 사서함은 아티스트의 스케줄과 공지사항뿐 아니라 연예인의 음성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었다. 은퇴를 선언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음성사서함에 남긴 작별 메시지는 고별 음반에 수록되었고, 젝스키스와 S.E.S.의 음성 메시지 등은 아직도 회자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2007년에는 ‘UFO타운 서비스(줄여서 ‘유타’라고 불렀다)’가 있었다. 아이돌 그룹마다 고유 번호가 있어서 팬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에게 문자를 보내면 직접 답장까지 받을 수 있는 서비스였다. 인터넷 팬카페에서 팬들은 그렇게 아티스트에게 받은 답장을 자랑하기도 하고,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멤버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UFO타운은 화제를 모았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물론 이외에도 ‘다음 카페’와 ‘싸이월드’가 대규모의 팬 커뮤니티를 구성했다. 1가구 2전화의 시대부터 PC통신과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를 거치는 동안 팬들은 각각의 필요와 편의에 따라 다양한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하나의 플랫폼에서 통합 서비스가 등장했다. 팬덤 플랫폼이 등장한 맥락이다.
팬덤 플랫폼이 일반인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팬데믹으로 모든 활동이 멈췄던 그때, 콘텐츠 소비가 늘어나면서 팬덤 경제는 불황에도 끄떡없는 산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디어유 같은 서비스가 상장까지 하면서 팬덤 플랫폼은 대표적인 엔터테크 산업분야로 주목받았다.
팬이 있는 곳에 비즈니스가 존재한다
미국의 데이터 회사 루미네이트는 [2023 상반기 음악산업 리포트]에서 ‘슈퍼 팬(찐팬)’이 미국 음악 시장의 15%를 차지한다고 언급했다. 곧이어 유니버설뮤직그룹(UMG)은 하이브와 파트너십을 맺고 위버스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팬덤 플랫폼에 관심을 가진 건 유니버설뮤직그룹만은 아니었다. 워너뮤직그룹은 자체적으로 팬덤 플랫폼을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는 팬덤 서비스를 개발한 스타트업을 인수했다. 미국에서도 슈퍼 팬이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2025년 현재, 글로벌 레이블 모두 팬덤에 집중하고 있다. 왜 그럴까? 전세계 스마트폰 사용자는 55억 명을 돌파했고, 이들은 스마트폰을 자기만의 TV, 극장, 오디오, 게임기로 쓴다. 즉, 전통적인 방송 채널이나 음반 매장이 아니라 개개인의 디지털 공간이 콘텐츠 소비의 중심이 되었다. 다시 말해 지금은 55억 개의 콘텐츠 채널이 존재하는 시대다.
여기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해진다. 단순히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는 의미다.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팬덤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소비자는 기능과 가격에 끌리지만, 팬은 스토리와 관계로 움직인다. 이렇게 ‘슈퍼 팬’은 음악 산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이 차이는 수익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단순 소비자는 한두 곡의 스트리밍으로 끝날 수 있지만, 팬덤은 콘서트 티켓, 굿즈, 독점 콘텐츠 등을 구매하며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한다.
현재 팬덤 플랫폼을 주도하는 곳은 ‘위버스’다. 2019년 6월에 서비스를 시작해 사용자는 1억 명 가까이 된다. 하이브의 아티스트 뿐 아니라 SM 아티스트들과 외부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입점해 있다.
‘위버스’와 ‘버블’ 모두 해외 이용자 및 매출 비중이 각각 90%, 70%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위버스’와 ‘버블’이 케이팝을 대표하는 팬덤 플랫폼이라면, ‘메이크스타(Makestar)’와 ‘프롬(fromm)’은 신생 팬덤 플랫폼이다.
‘메이크스타’는 케이팝 아티스트의 프로젝트를 팬들과 협업하는 플랫폼으로, 보통 앨범·화보집· 팬미팅·콘서트 등을 이벤트로 제공하고 있다. 235개 국의 글로벌 팬들이 주로 사용하는 플랫폼으로 중소형 엔터테인먼트사를 위해 다양한 지원을 제공한다. ‘프롬’은 원더월을 운영하는 노머스가 론칭한 서비스로, 다양한 케이팝 아티스트와 프라이빗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스토어, 멤버십, 커뮤니티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두 서비스 모두 중소형 기획사를 위한 팬덤 플랫폼을 지향한다.
SaaS(Software as a Service) 형태로 팬덤 플랫폼을 제공하는 ‘비스테이지(b.stage)’도 있다. 위버스의 창립 멤버들이 모인 비스테이지는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나 중소형 기획사들이 직접 팬덤 플랫폼을 개설해 운영할 수 있는 서비스다. 콘텐츠 유형부터 가격까지 아티스트가 직접 자신에게 맞는 서비스를 구성할 수 있다.
팬 플랫폼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아티스트와 팬의 상호작용을 위한 서비스로 보이지만, 그 내부는 보다 복잡한 기술이 적용된다. 일단 특정 이벤트에 대규모의 팬들이 동시에 몰리는 상황에서 안정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회원 가입부터 개인 활동에 이르기까지 사용자의 모든 활동에 대한 보안 이슈도 중요하다. 여기에 콘텐츠 판매, 정기 구독 등 팬덤 플랫폼에 필요한 기술은 서버, 보안, 결제, 배송, 커뮤니티 운영 이슈 전반에 이른다.
그러므로 팬덤 플랫폼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아니라 AI와 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콘텐츠, 커뮤니티, 커머스가 연결된 복합 인터넷 사업이다.
팬덤 플랫폼의 3C(콘텐츠, 커뮤니티, 커머스)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
2020년, 위버스를 출시했을 당시 IBK투자증권 보고서는 팬덤 경제의 규모를 7조 9,000억 원 정도로 추정했다.
기존의 팬덤 플랫폼이 주로 아티스트와 팬들의 커뮤니케이션에 주목했다면, 위버스 이후의 팬덤 플랫폼은 커머스 기능을 추가해 쇼핑몰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 결과 위버스는 론칭 4년 만에 1억 다운로드를 돌파했고, 2021년부터 3년 간 아이돌 굿즈 판매로 거둔 매출액은 약 1조 2,079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팬덤 플랫폼은 여러 가지 수익 모델을 가지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멤버십으로, 팬들이 월 구독료를 내고 아티스트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기반으로 공연 영상이나 특별 영상 같은 유료 콘텐츠, 응원봉이나 스페셜 굿즈 같은 상품 판매, 팬미팅과 콘서트 등 티켓 판매 등을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위버스, 버블, 프롬, 메이크스타 등의 팬덤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해외의 팬덤 플랫폼은 한국과 달리 커뮤니케이션보다는 라이브 콘서트를 기반으로 여러 몰입형 기술이 추가되거나 신인 아티스트에게 직접 투자하는 방식도 선보인다.
래퍼 키드 쿠디(Kid Cudi)가 공동 설립하고 2022년 런칭한 ‘앙코르(Encore)’는 증강 현실 라이브 공연 앱으로, AR 앱을 통해 라이브 공연을 시청할 수 있다. 2020년에 런칭한 ‘다이스(DICE)’는 모바일 티켓팅과 라이브스트리밍을 제공하며 팬들이 다양한 굿즈를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2023년에 런칭한 ‘판타지 레코드 레이블’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팬들이 신인 아티스트에게 투자해 수익을 나누는 방식이다.
팬덤 플랫폼의 비즈니스 모델이 콘텐츠, 커뮤니티, 커머스로 작동한다면, 그 핵심은 결국 팬 참여다. 과거에는 수동적으로 아티스트의 답장을 기다리기만 했다면, 이제는 팬들이 직접 아티스트와 관계 맺는 것을 넘어 직접 콘텐츠 제작에 참여하는 방식을 지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4인조 걸그룹으로 유명한 트리플에스(triple S)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팬이 앨범명, 타이틀곡, 유닛 등에 투표해 데뷔를 결정하게 된다. 이들은 ‘코스모(Cosmo)’라는 플랫폼을 사용하고, ‘그래비티(Gravity)’라고 불리는 투표로 참여한다. 트리플에스의 기획사 모드하우스는 미국과 한국, 일본 투자사들로부터 800만 달러(=104억 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팬덤 플랫폼은 더 늘어날 수 있다
2023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콘텐츠 산업 트렌드 2023]에서 “팬덤 플랫폼을 기반으로 IP와 이종산업 협업체계 형성을 뒷받침하는 정책을 통해 콘텐츠 산업 성장의 기반을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정책 방향을 밝혔다. 2024년 9월, pwc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 미디어 산업 전망 2024–2028]에서 2028년까지 엔터/미디어 산업은 3조 4천억 달러(=4,955조 5,000억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전반적으로 커지는 중에 팬덤 플랫폼의 비전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장은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신규 팬덤 플랫폼 베리즈가 미칠 영향을 주시하고 있다. 위버스와 버블의 양강 체제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고,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슈퍼 IP(아이유, 이효리, NCT, 에스파, 아이브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가 힘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해외 팬들을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글로벌 시장의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팬덤 플랫폼은 케이팝의 전유물은 아니다. 배우는 말할 것도 없고,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팬도 있고,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팬도 있다. 최근에는 가상 크리에이터인 버튜버(버츄얼 유튜버)의 팬들이 대거 늘어나는 현상도 눈에 띈다.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팬덤 플랫폼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팬덤 비즈니스는 사실 오래된 비즈니스다. 그래서 케이팝이냐 버튜버냐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팬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비즈니스가 있다는 점이고, 기술이 접근성을 낮춰준다는 사실이다. 팬덤 플랫폼의 열쇠는 ‘플랫폼’이 아니라 바로 ‘팬’에 있다.
Edit 금혜원 Graphic 이은호
20년차 음악평론가. 2020년부터 TMI.FM(Tomorrow of the Music Industry)이란 뉴스레터를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분석하고 있다. 가끔 컨설팅과 투자 자문도 하지만, 주로 듣고 보고 읽고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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