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시대가 올까

by 김동조

<트레이더의 글로벌 마켓 읽기> – 2편

2021년 2월 12일까지 나스닥 지수는 9% 넘게 반등했다. 연초 0.91%였던 미국의 10년 국채 금리는 같은 기간 동안 1.21%까지 30bp 가량 올랐지만 주식 시장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2월 25일까지 보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10년 국채 금리는 1.52%까지 올랐고 지수는 하락했다. 특히 2월 25일 하루 동안 미국채 10년 금리는 14.4bp 올랐고 나스닥 지수는 3.52% 하락했다. 국내외 매체들은 금리 상승이 주가 하락을 촉발시켰다고 보도하기 시작했고 인플레이션이 찾아오고 있다고 예언하는 사람도 늘었다.

2월 26일, 영국 중앙은행(BOE, Bank of England)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앤디 홀데인은 <인플레이션: 호랑이의 꼬리?(Inflation: a tiger by the tail?)>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인플레이션’이라는 길들이기 힘든 호랑이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내용이었다. 누가 호랑이를 깨웠을까. 홀데인에 의하면,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충격에 대한 정부와 중앙은행의 강력한 대응이 호랑이를 깨웠다. 이제 중앙은행은 이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지 상당히 도전적인 숙제를 안게 되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코로나19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항공사 매출은 급감했고 온라인 쇼핑은 크게 늘었다. 재택근무는 일상화되었고 해외여행은 할 수 없게 됐다. 큰 변화지만 그보다 훨씬 큰, 어쩌면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을지도 모를 변화가 생겨났는데 바로 공격적인 재정정책이다.

코로나19 이전의 세계경제는 디플레이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달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류 경제학자들이 우려하고 있는 추세는, 각자의 표현은 달라도 분명히 디플레이션이었다.

재무장관과 하버드 대학 총장을 지낸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이러한 현상을 ‘secular stagnation’이라고 불렀다. ‘구조적 장기침체’로 흔히 번역되는 이 말은 어렵게 들리지만, 설명하기 힘든 구조적인 이유로 경제가 침체 상황에 서서히 빠져드는 것을 말한다. 더 쉽게 이해하자면 ‘일본화(Japanification)’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 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처럼 경제가 디플레이션으로 빠지는 것을 말한다.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지기 전까지 세계경제의 문제는 디플레이션이 아니었다. 20세기 세계경제에서 디플레이션은 금융위기 전후로 간헐적으로 나타난 적은 있었지만 곧 사라졌다. 거시 경제학의 세계에서 가장 두려운 대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플레이션이었다. 인플레이션은 화폐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을 찍을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하는 한 피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였다.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곧 돈의 가치를 망가뜨릴 힘도 가졌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화폐가 존재한 이후 많은 권력들이 그 힘을 쓰고 싶은 유혹을 참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3년 독일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1마르크였던 신문 가격이 8000만 마르크까지 올랐다. 평생 모은 돈 10만 마르크가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된 것이 평범한 독일인의 삶이었다. 히틀러 등장의 배후에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함께 인플레이션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는 호황을 누렸는데 그런 호황을 구현한 것은 케인즈 경제학이었다. 과감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사용해 미래의 소비를 현재로 끌어와 경제를 살린다는 발상은 케인즈 이전에는 없었다. 2차 대전 이후 1세대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는 엄청난 생산성 향상과 어마어마한 실질 임금의 상승을 경험했다*.

* 1970년대가 되면서 성장이 멈춰버렸고 이때 통화주의가 등장한다. – 저자 주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1973년 1차 석유파동과 1978년 2차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경제의 치명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미국의 소비자 물가지수(CPI)는 1차 석유파동으로 1974년 1월, 12%까지 올랐고 2차 석유파동으로 1980년 3월, 14.8%까지 올랐다. 미국의 10년 국채 금리가 정점을 찍은 것도 이때였다.

세계는 인플레이션 공포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 해결 방안은 당시 미 연준 의장이었던 폴 볼커의 어깨에 달려있었는데, 그는 과감한 금리인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겠다는 연준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인플레이션 기대를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셈이다.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은 하락했다. 미국의 10년 국채 금리는 1981년 9월, 15.8%를 기록한 후 하락하기 시작했다. 소비자 물가지수는 금리가 떨어지기 전인 1980년 3월, 정점인 14.8%를 기록한 후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성장도 빠르게 위축되었다.

△ 미국 정책금리와 CPI / 출처: Bloomberg, OECD, FRED

하루짜리 단기 금리를 10년짜리 장기 금리보다 높게 올려버린 상황에서 경기위축은 피할 수 없었다. 경기위축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플레이션을 반드시 잡겠다는 의지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물가는 하락했고, 금리와 유가도 하락했다. 세계경제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일이 똑같이 벌어질 때 지금의 연준이 볼커의 연준과 같은 선택을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폴 볼커의 금리 인상은 기대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경기를 급격하게 침체시켰다. 총수요의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아닌, 원유 가격 급등이 초래한 인플레이션을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통해 통제하려고 하자 경기침체(stagflation)가 발생했다.

만약 1979년처럼 비용 측면에서의 충격으로 인플레이션이 급등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볼커 의장의 연준이 그랬던 것처럼 금리를 올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리를 인하하여 총수요를 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준이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굳이 그걸 표현할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인플레이션 기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준은 원유 가격 급등이 금리인상이란 잘못된 결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원유 가격의 영향을 많이 받는 소비자 물가지수 대신 근원 소비자 물가지수(Core CPI)를 암묵적인 인플레이션 타깃으로 사용하고 있다.

△ 미국 소비자 물가지수와 근원 소비자 물가지수 추이 / 출처: Bloomberg, FRED

1979년의 2차 오일쇼크에 대응해 20%까지 기준 금리를 올린 폴 볼커의 통화정책 이후, 세계경제는 또렷한 흐름 하나를 갖게 되었는데 바로 물가와 금리의 하락이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주요 경제의 금리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통화 사이클에서 연준은 금리를 올린 적도, 내린 적도 있었지만 추세적으로 보면 올린 것보다는 더 내려야 하는 사이클이 곧 찾아왔다.

기준금리는 계속 하락해서 현재 미국의 기준 금리는 제로가 되었다. 기준 금리가 제로라는 말은 기준 금리보다 만기가 긴 다른 금리들도 높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장기 금리인 미국의 10년 국채 금리는 3월 2일 기준, 1.4%에 불과하다. 영국의 10년 금리는 0.68%, 일본의 10년 금리는 0.12%, 한국의 10년 금리는 1.97%다. 독일은 심지어 마이너스로 -0.35%다. 그나마 모두 최근에 꽤 오른 것이 그렇다.

△ 미국 정책금리와 CPI / 출처: Bloomberg, OECD, FRED

물가 수준도 꾸준히 하락했다. 미국의 소비자 물가는 2021년 1월 기준, 전년대비 1.4% 정도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5%를 넘었던 물가는 2000년대 중반 5%를 하회하기 시작했고, 2010년대에는 5%를 넘은 적이 없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 연준은 2%를 암묵적인 인플레이션 타깃으로 삼았는데 이 범위를 벗어난 적이 많지 않았다.

왜 소비자 물가는 계속 하락했는지,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금리가 하락했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석은 나오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이전까지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서, 추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세계경제는 모두 디플레이션을 경험한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란 두려움이 있었다.

일본이 디플레이션에 의한 장기침체를 경험한 지 한 세대가 지났다. 그동안 디플레이션이 발생한 원인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처방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중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두 명의 접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요 측에서 원인을 찾는 폴 크루그만의 접근과, 공급 측에서 원인을 찾는 에드워드 프레스콧의 접근이다.

수요에서 원인을 찾는 크루그만의 시각에서 보면, 디플레이션은 총수요 부족 때문에 발생한다. 이를 치유하는 방법은 과감한 통화와 재정정책의 사용이다. 크루그만은 공격적인 금리인하뿐 아니라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도입해서라도 디플레이션 기대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에 대한 책임감을 버리고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인플레이션을 만드는 데 적극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심지어 중앙은행의 독립성조차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양적완화 정책은 흔히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작동 방식은 그렇지 않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돈을 마구 뿌려서 통화량을 늘리는 것과 다르다.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통화량이 아니라 본원통화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과 가계가 부채를 늘려서 반응하지 않으면 중앙은행이 아무리 본원통화량을 늘려도 통화량은 늘지 않는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이 생길 때까지 본원통화를 무제한 늘리겠다고 시장과 대중에게 믿음을 줘야 한다. 만약 기준 금리 인하만으로 부족하면 양적완화라고 불리는 자산매입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마이너스까지 금리를 인하하고, 통화정책만으로 부족하면 과감하게 재정지출을 늘리는 재정정책까지도 써야 한다.

공급에서 원인을 찾는 프레스콧의 시각에서 보면, 일본 디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은 잠재 성장률 하락이다. 경제활동 인구 감소, 노동시간 감소*, 총요소 생산성 하락이 잠재 성장률을 하락시킨 것이다. 총요소 생산성이 경제활동 인구 감소와 노동시간 감소를 상쇄할 만큼 충분하게 증가하지 못한 것이 일본 경제의 가장 본질적 문제였다는 것이다.

* 1988년 일주일에 44시간이었던 일본의 노동시간은 1993년 40시간으로 급감했다. – 저자 주

그는 일본 경제의 총요소 생산성이 급감한 원인으로 일본 기업의 해외 이전(off-shoring)을 꼽는다. 일본에서 해외로 이전한 공장의 생산성이 자국에 남아있는 공장의 생산성보다 더 높았다. 즉, 해외로 진출할 만한 역량이 있는 회사들은 대체로 생산성이 높은 회사였다는 뜻이다.

이는 비슷한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한국 경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프로스콧의 주장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정책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의 기본 아이디어들이 노동시간을 감소시키고, 기업의 해외 이전을 늘리고, 총요소 생산성을 하락시키기 방향과 연관되어 있다.

한편 디플레이션은 막기 어렵다. 통화정책을 과감하게 사용해 금리를 인하하고, 자산을 매입하고, 재정을 쓰는 일이 그 당시에는 공격적이었던 것 같아도 사후적으로 보면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본 중앙은행(BOJ, Bank of Japan)도 당시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플레이션을 우려할 만큼 과감한 금리인하와 양적완화를 사용했지만 디플레이션을 벗어나지 못했다.

재정정책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정부가 재정 확대 정책을 사용하려면 매번 심각한 정치적 반대와 싸워야 한다. 또한 정부 재정의 증가가 민간 투자를 구축하는 경제학의 본질적 문제와 직면한다. 그래서 재정을 늘리려는 때마다 지금이 재정을 공격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타이밍이며, 생산성 향상을 위해 효율적인 곳에 재정을 사용한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재정정책은 사실상 죽은 정책이었다. 효과가 없어서라기보다는 현실 정치에서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통화정책과 함께 공격적인 재정정책의 필요성이 컸지만 결국 미미한 정도로 사용되는 데 그쳤다. 2016년에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도 미국의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위해 과감하게 재정을 쓰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재정 사용에 신중한 공화당의 기존 노선과는 상당히 결이 달랐기 때문에, 야당인 민주당의 협력 아래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정말 가능하다면 미국의 미래를 바꿀 정책이라고 전망했으나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그만큼 현실 정치의 제약이 심하다.

이 흐름을 코로나19가 바꿔 놓았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은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강력한 재정정책을 사용했다. 워낙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여건 덕분이다. 미국이 디플레이션 위험에서 벗어나 오히려 인플레이션이란 호랑이를 깨울 수도 있다는 우려는 코로나19가 촉발한 초유의 완화적 재정정책에서 기인한다.

△ 미국 정책금리와 10년 국채 금리 / 출처: Bloomberg, FRED

올해 경기가 반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은 연준이 목표로 하는 2%보다 높은 선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때 매체들은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겠지만, 2020년의 낮은 성장률과 물가로 볼 때 이러한 물가 수준의 반등은 충분히 예상할 만하다. 혹시라도 물가 반등을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온 것으로 착각할까 봐 연준은 미리 조치를 취해 두었다. 통화정책을 평균물가목표제(average inflation target)로 관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물가가 일시적으로 암묵적 목표치인 2%를 벗어난다고 해도 금리를 평균 수준으로 관리할 것이기 때문에 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연준은 기저 효과에 의한 물가 상승을, 노동 시장 부진을 털어낼 수 있을 정도의 경기호조로 착각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또한 시장에게 인플레이션만 보지 말고 고용시장도 함께 보면서 성급하게 금리가 올라 금융 여건을 긴축하지 말라는 신호를 줄 것이다. * 관련 기사: “인플레이션 온다” 美민주당 내에서도 고개드는 우려 (조선일보, 2021.3.9) – 편집자 주

시장이 경제를 낙관할 때 장기 금리는 오른다. 실제로 경기가 좋아질 때는 좋은 현상이지만 장기 금리의 상승은 역설적으로 경기가 좋아지는 것을 방해하는 면이 있다. 시장은 인플레이션 관련 지표가 나올 때마다 경직되겠지만 적어도 2023년까지는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대신 초점을 다른 곳에 맞춰야 할 것이다. 코로나19라는 비극적 사태가 디플레이션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중요한 분기점에 있다.

Edit 손현  Graphic 이은호, 이홍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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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조

투자회사 벨로서티 인베스터 대표. 경제와 금융에 관한 독립적인 분석을 제공하는 유료 블로그 ‘김동조닷컴(kimdongjo.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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