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에 오기까지 30년이 걸렸습니다
ㆍby My Money Story
은퇴 후, 몽마르트 화가가 된 민형식의 마이 머니 스토리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다 미술을 만났어요
안녕하세요. 은퇴 7년 차 민형식이라고 합니다. 미술 교사로 34년 근무했고, 정년퇴직 후 파리 몽마르트에서 그림을 그려보자는 목표를 이룬 후 화가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몽마르트 파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개봉하기도 했지요.
올해 70세에 접어들었어요. 원래도 나이를 의식하며 사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요즘에는 더욱 숫자에 대한 개념을 내려놓고 지내려 합니다. 일상도 그래요. 아침에 눈을 뜨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냅니다. 어떤 날은 사이클을 타고,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죠. 화가라고 매일 작업실에서만 시간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일부러 그리려는 마음을 가지면 외려 싫어지거든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 권유로 의과대학에 가려고 했습니다. 공부도 제법 했지만, 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할 수 있는 일 없나?’ 하는 고민을 자주 했어요. 그러다 문득 어릴 때 아버지 친구 화실에서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미술은 평생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의대 시험을 치다가 그냥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어요. 부모님은 제가 시험에서 떨어진 줄 아시죠. (웃음)
그 후 미술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원래 의대를 준비했었으니 성적이 나쁘지 않아 매학기 장학금도 받았죠. 당시 등록금이 2만 원 정도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200만 원이 넘지 않겠습니까. 졸업 후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려다 보니 직업 화가로 살 생각은 못 하고, 교사의 길을 가게 되었어요.
몽마르트에 오기까지 30년이 걸렸습니다
오랜 교직 생활을 마무리할 때쯤 아들인 민병우 감독(이하 민 감독)이 앞으로의 계획을 자꾸 묻더군요. “다 생각이 있다”고만 말했는데, 어느 날 몽마르트 언덕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털어놓았죠. 몽마르트는 참 매력이 있는 곳이에요. 세계적인 대가들의 반상회 자리라고 해야 할까요, 선술집이라고 해야 할까요. 수많은 화가가 거쳐 간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고요.
제 이야기를 들은 민 감독과 불어가 능숙한 지인이 파리에 가기 위한 준비를 도와줬습니다. 학원에 다니며 불어도 배웠고요. 몽마르트 언덕에서 거리 화가로 그림을 그리려면 우선 기간을 선택해야 해요. 1개월은 별도의 비자 없이 초청 화가로 갈 수 있고, 1년 과정은 별도의 비자가 필요하다더군요. 저는 1개월을 선택했어요. 또 어떤 장르의 그림을 그릴지도 정해야합니다. 다른 화가들이 그리는 장르와 너무 겹치지 않도록 조율하려는 목적이겠지요. 저는 야외에서 부대끼는 게 좋아 풍경화를 그리기로 했어요. 평생 미술 교사를 했다는 경력 증명 서류도 뗐고요. 우여곡절 끝에 이 서류를 파리 시청에서 보냈는데, 우리나라처럼 빠르게 일 처리가 되는 게 아니더군요. 기다리는 동안 애를 좀 탔지만, 한 자리를 얻어낼 수 있었죠.
사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파리로 교환학생을 갈 기회가 있었어요. 시험도 붙었고, 기혼자여야 한다는 조건도 충족했죠. 정부에서 생활비도 50%까지 지원해준다더라고요. 그런데 당시에는 아내가 반대했어요. 지금 생각하니 혼자라도 갈 걸 그랬습니다. (웃음) 그때 파리에 다녀왔으면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즘 같았으면 무작정 부딪혀 볼 텐데, 젊은 시절에 오히려 주저했던 것 같아요. 그 아쉬움이 내내 남아있었나 봅니다.
우여곡절 끝에 파리에 도착해서 택시를 탔는데, 한국 기사님이 운행을 하셨어요. 몽마르트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왔다고 하니 이렇게 묻더군요. “젊을 때도 와보셨습니까?” 처음 왔다고 했더니 딱 한 마디를 덧붙이셨어요. “오래 걸리셨네요.” 이 말 한마디가 제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어요.
에펠탑, 나, 세계
파리에 도착해서 먼저 답사를 했어요.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림 그릴 자리도 봐둔 다음 에펠탑으로 향했지요. 그 아래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뭐 제가 천당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입구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점심 지나서부터 어둑해질 때까지 서너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그림에만 몰두했어요. 그 장면이 영화에도 나와 있는데, 그때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에펠탑, 나, 세계. 이 세 개뿐인 느낌이었어요. 아내와 민 감독이 저를 기다리고,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지나가는데 그 누구도 개의치 않게 되더라고요.
몽마르트 언덕에서 처음 그림을 그린 날에는, 뭐랄까, 좀 과장하면 붓이 춤을 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기분이었죠. 여러 화가와 함께 있으니 혹시 제가 돌아가더라도 “한국에서 온 친구, 형편없더라” 이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비가 와도 그리고 싶은 감정이 있으면 그에 충실하려고 했지요.
폭우가 아니니까 괜찮아. 왜냐하면 지금 그리고 싶은 감정이 있거든. 그걸 비온다고 접으면 안 되잖아 다큐멘터리 <몽마르트 파파> 중
몽마르트 언덕에 가면 구역이 나뉘어 있어요. 번호가 쓰인 곳에 자리를 잡고 작업을 해야 하죠. 대략 한 40~50명 정도 되는 사람이 자격을 받고 오는 것 같아요. 매일 그 인원이 출근하는 건 아니지만요. 화가들 중에는 보통 농땡이 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웃음)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성향이 달라요. 10유로 선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작은 그림을 그려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팔듯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있고, 가끔 나와서 1000유로가 넘는 작품을 판매하는 화가도 있죠. 저처럼 뒤늦게 꿈을 좇아 온 사람도 있고요.
한번은 한국인 화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프랑스의 훌륭한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파리에 거주하며 작가로 활동하는 분이었죠. 저는 그분이 대단하고 부럽다고 느꼈는데, 경제적인 상황이 열악해서인지 상대방은 반대로 은퇴 후 이곳에 온 저를 부러워하는 눈치더라고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다들 남의 일을 부러워해요. 별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살아본 경험으로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충실히 하루를 살아간다면 모두 가치 있는 삶입니다. 물감도 색깔이 다 다르듯,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필요한 존재예요. 다양한 일과 사람들이 모여 그림이 되는 거죠.
몽마르트 언덕이 제2의 고향이죠
저는 제 개인적인 꿈이 영화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1년의 편집 기간을 거쳐 <몽마르트 파파>를 개봉했어요. 영화를 보고 민 감독이 제 아들이기 이전에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스승이더라고요.
프랑스에 다녀오고 용기가 생겨서 스페인, 쿠바에도 갈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코로나라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지요. 그래도 몽마르트는 제게 제2의 고향 아닙니까. 다시 가면 1년 동안 지내보고 싶어요.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여전히 혼자 가라네요. (웃음) 그래서 제 이름으로 된 재산은 다 줄 테니, 최저 생활비만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림 그리다 죽고 싶으니까요.
파리에서 돌아온 후에는 그림을 모아 서울 다락 스페이스, 충무아트센터, 군산 팔마예술공간, 제주도 공무원연금공단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교직 시절에도 동료 교사들과 단체전을 연 적은 있지만 개인전은 처음이었죠. 진짜 작가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파리에서는 작품을 판매하지 못했지만 전시회를 하면서 작품도 좀 팔았고요.
전시회에서 중학교 때 단짝도 만난 일이 기억에 남아요.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라 전시회가 끝나고 명동에서 술을 한 잔 했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이야기하더라고요. “내가 학교를 다닐 때 너무 가난해가, 친구들에게 쪽팔리가, 같이 놀지도 못하고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왔다.”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대학 졸업 후에는 중국에서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가 제 그림을 세 점 샀어요. 고마워서 제가 한 점은 선물로 줬고요.
제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하루하루 교직에서 충실했기에 젊을 때 꿈꿨던 파리에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4년이라는 시간이 의미 있게 느껴져요. 지금 당장 꿈이 없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하루하루 잘 살고, 할 일에 충실하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작은 소망이 있어요. 그걸 흘려보내지 말고 메모해두세요. 언제가 됐든 행동으로 옮겨보시길 바랍니다.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무언가를 따지고 계산하다 보면 시작하기 어렵거든요.
<몽마르트 파파>를 본 사람들이 은퇴 후 저에게 꿈을 이뤘다고 하지만, 그건 한 가지의 꿈이었지요. 죽을 때까지 새로운 꿈이 생길 거예요. 그걸 꾸준히 이루어 나가며 사는 게 목표입니다.
Interview 이현아 Edit 이현아 이지영 Photo 김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