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지역에서 찾은 ‘나다운 삶’
ㆍby My Money Story
Story 01. 서울을 떠나온 이야기
서울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처음부터 서울을 완전히 떠날 생각은 없었어요. 지방에서 워케이션 스테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고, 스테이를 만들어놓고 저는 서울에 살면서 별도의 관리자를 두고 운영하려 했거든요.
처음엔 친구와 동업으로 시작했고, 한옥을 구한 후 리모델링을 시작했는데, 서울을 오가며 작업을 이어가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5촌2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 5촌2도: 일주일 중 5일은 지방에서, 2일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삶의 형태
해남살이의 시작은 5촌2도 형태였군요.
워케이션 스테이 ‘와카(WAKA)’가 완성되기까지 약 1년 동안 해남과 목포역 사이의 영암이라는 지역에서 아파트를 단기로 빌려 지냈어요. 동업하던 친구와 디자인을 맡아준 친구까지 셋이 함께였죠.
임시 거처다 보니 가전을 별도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풀옵션 집이어야 했어요. 해남에서는 풀옵션 단기 임대를 찾기 어려워 영암에서 집을 구했고, 해남까지 차로 30분 거리라 나쁘지 않겠더라고요. 월세도 35만 원 정도로 굉장히 저렴했어요.
원래는 동업자 친구가 해남에 살면서 와카를 관리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여러 이유로 헤어지게 되면서 저 혼자 남게 되었죠. 혼자 운영하게 되었지만, 청소 및 내부 관리는 마을 주민분을 고용해서 해결했기에 제가 해남에 매일 올 필요가 없어서 거주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도 가끔 내려오면 지낼 곳이 필요해서 알아보다가, 운 좋게 근처 빈집을 거의 무상으로 빌릴 수 있게 됐어요. 저를 예쁘게 봐주신 이웃 주민분의 소개 덕분이었죠. 빈집으로 오래 방치됐던 상태라 고칠 부분이 상당히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알아서 고쳐 쓰는 조건으로, 무상으로 지내라고 해주셨죠.
김지영이 운영중인 워케이션 스테이 와카(WAKA)의 전경
그 집이 지금 거주 중인 곳인가요?
맞아요. 그렇게 집을 고치고 지내다가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은 월 10만 원의 임대료를 내며 지내고 있어요.
빈집을 알아서 고쳐 쓰는 조건 외에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그 집 뒷마당에 주인분의 형님이 키우던 진돗개 한 마리가 묶여 있었어요. 형님이 돌아가셔서 당장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며 함께 돌봐달라고 하셨어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저는 그렇게 갑자기 집과 강아지가 생겼어요.
그 강아지 이름이 ‘멍이’인데, 멍이를 혼자 두고 서울에 오래 가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해남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고,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되었어요. 멍이는 1년 전에 하늘나라로 갔지만, 죽기 전에 낳은 7마리 새끼 중 한 마리인 ’구름이’가 지금 저와 함께 살고 있어요.
갑작스레 강아지 식구까지 생긴 셈이네요. 워케이션 스테이를 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여행을 좋아해 배낭여행으로 30여 개 나라를 다녔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스테이를 운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곤 했죠.
본격적으로 생각한 건 2020년도였어요. 당시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금융업에 대한 회의감도 느끼게 되었고,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어요. 그러다 인도 파견 근무 지원 기회를 마치 도망치듯 신청했고, 확정됐죠.
인도로 떠나기 위해 살던 집까지 모두 정리했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결국 가지 못했고, 재택근무로 인도 팀과 일을 하게 됐어요.
재택근무를 계속하다 보니 문득 ‘굳이 서울에 있을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과 쉼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워케이션 숙소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 내가 한 번 만들어보자’ 싶어 퇴사 후 창업을 준비하게 됐어요. 제가 또 실행력이 좋거든요. 많이 지쳐 있던 터라, ‘일단 새로운 일을 해보자!’ 하며 뛰어들었던 것 같아요.
많은 지역 중, ‘땅끝마을 해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정착할 생각 없이 단순히 사업 차원에서 집과 동네의 분위기만 고려했어요. 물론, 가용 예산에 맞는 집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요.
하지만 5개월 정도 전국을 샅샅이 둘러봐도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지역 부동산 블로그에서 이 집을 발견했죠. 보는 순간 ‘여기라면 괜찮겠다!’는 직감이 들더라고요. 그 길로 바로 해남으로 내려와 매매를 결정했죠.
사실 해남은 KTX도 없어 교통편이 불편하고, 서울에서 너무 멀다고 생각했기에 처음엔 고려하지 않았던 지역이에요. 하지만 이 집을 발견하고는 큰 고민 없이 결정을 내리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셔서 어릴 적부터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경상도 출신이라 그런지 전라도 지역으로는 한 번도 발령이 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해남은 제게 처음으로 지내보는 전라도 지역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정착까지 하게 되었네요.
Story 02. 해남의 프로 N잡러
워케이션 숙소 와카(WAKA) 초기 비용은 얼마나 들었나요?
대략 3억 정도 들었던 것 같아요. 초기에는 2억 정도 예산을 잡고 시작했는데, 조금 더 튼튼한 자재를 쓰고, 심미적으로 조금 더 예쁜 소재들을 고르다 보니 3억까지 늘어났어요. 퇴직금은 물론, 모아둔 금액을 모두 투자했고요. 주식 투자금도 다 빼서 넣었으니, 제 모든 자본을 사용해 시작했다고 볼 수 있죠.
창업 준비를 하시며, 지자체나 청년 지원 사업 등의 도움도 받으셨나요?
지원 사업 도움을 꽤 받았어요. 첫해에는 사회적 기업 육성 사업으로 3천5백만 원 정도를 지원받았어요. 대부분의 지원금은 인테리어나 건물 짓는 용도로는 사용하지 못하는데, 이 사업은 그런 용도로도 쓸 수 있어서 와카 초기 자본금의 1/10 정도는 도움을 받아서 해결할 수 있었어요.
또, 언더독스의 ‘드림위드 우리마을 LEVEL UP’ 사업으로 1천만 원 정도 받았고, 두 번째 해에는 관광공사의 관광 벤처기업 지원을 받았어요. 두 지원금은 대부분 홍보비 목적으로 사용했어요.
와카 운영 수익으로 자생할 수 있었나요?
와카를 운영하다 보니, 1년 중 약 50% 정도만 예약이 차더라고요. 휴가철에는 예약이 많은 편인데, 비수기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요. 해남 지역 자체가 매력적인 관광 도시는 아니거든요.
지역 자체에 관광객이 늘어나면, 와카도 자연스레 손님이 늘어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역사도 깊고, 맛있는 먹거리도 많은 지역인데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어요.
제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는 해남 지역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해남과 관련된 일들을 하나씩 찾아 시작하게 되었어요.
눙눙길 프로젝트로 진행한 축제와 전시에 활용된 포스터와 브로셔
지역 활성화 사업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일부터 시작하셨나요?
이 지역이 관광지가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경주의 ‘황리단길’처럼 활성화된 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눙눙길*’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죠. * 눙눙길의 ‘눙눙’은 ‘옥’ 글자를 180도 뒤집은 모양이며, 귀여운 느낌을 주기 위해 눙을 반복해 만든 이름이다.
황산면 옥동마을의 폐교와 빈집 같은 유휴 공간을 활용해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어요. 옥동마을은 인근 옥매산에서 나오는 옥돌로 만든 옥공예가 활발했던 60~70년대에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쇠퇴하여 소수의 장인만 남아 있어요.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이 마을이 잊히지 않도록 되살리고 싶었고, 제가 잘 살기 위해서도 현재 살고 있는 지역과 함께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눙눙길 프로젝트를 통해 옥공예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다양한 문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눙눙길을 창의적인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축제, 캠프, 전시 등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활동들을 이어 나가고자 해요.
"제가 잘 살기 위해서도 현재 살고 있는 지역과 함께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눙눙길 프로젝트 중 하나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최근 전시 프로젝트 <옥매광산 : 별들을 생각하는 밤>을 진행했어요. 눙눙길 인근의 옥매광산은 일제강점기 때 광부들이 강제 동원됐던 아픈 역사가 있는 장소예요. 이곳에서 일하던 많은 광부가 제주로 강제 징용됐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인 미상의 화재로 배가 전소되면서 118명의 광부가 완도 앞바다에서 희생당했어요.
이 비극은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뒤늦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추모비도 2017년에 세워졌어요. 당시 생존자분들은 이미 모두 돌아가셨고, 유족분들 몇 분만 남아계신 상황이라, 더 늦기 전에 이 이야기를 들어보고, 또 알리고 싶어서 팝업 전시를 기획했어요.
<옥매광산 : 별들을 생각하는 밤> 전시장 전경(김지영 제공)
눙눙길 프로젝트 같은 지역 활성화 사업은 청년 사업 지원금 혜택을 받아 보았을 것 같은데요.
네 맞아요. ‘청년 마을 공모 사업’에 사업 계획서를 제출해 3억 원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시작했어요. 눙눙길 프로젝트는 보조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수익 사업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일부를 인건비로 사용할 수 있어서 그런 부분은 보탬이 돼요.
눙눙길 프로젝트를 통해 실제로 해남에 관광객이 많아졌나요? 와카 수익으로도 이어지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아직 본격적인 관광 활성화로 이어지려면 몇 년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눙눙길 프로젝트 자체가 아직 물적 기반이 충분히 갖춰진 상태는 아니라서 꾸준히 진행하며 기반을 다지는 중이에요.
지난 봄 ‘아수라활활타’라는 예술인 캠프 축제를 열었을 때 3천 명 정도 방문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관광객 유입과 지역 활성화의 효과를 보려면 앞으로 3년에서 5년 정도는 더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예술인 캠프 축제 ‘아수라활활타’ 전경(김지영 제공)
김치 사업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칠리클럽’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해요.
해남에 동국장이라는 전통 생장을 만드는 명인님이 계셔요. 300년 이상 대대로 내려온 장을 보유한 명인 댁이죠. 그분이 담근 김치를 처음 맛보고는 ‘이걸 평생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놀러 오는 친구들도 김치 맛을 보면 꼭 “어디서 사?”라고 묻더라고요.
너무 좋은 제품과 브랜드가 만들어져 있는데, 그걸 잘 알리고 판매하는 브랜딩과 마케팅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가 그런 부분에서 보탬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칠리클럽’이라는 네이밍을 붙여 시작하게 됐어요.
추후에 눙눙길 프로젝트와도 연계해, 눙눙길에 이름을 건 식당을 열거나 다양한 연계 사업을 해나가고 싶어요.
(좌) 해남 동국장 명인 댁 마당의 장독대들 (우) 김지영이 운영 중인 김치 사업 ‘칠리클럽’의 상품들
다양한 사업을 통해서 여러 지원 사업의 도움을 받으셨는데, 지영 님만의 팁이 있을까요?
로컬 쪽으로 지원하는 사업은 서울보다 경쟁률이 훨씬 낮아서 선정 확률이 높은 것 같아요. 저의 경우 공모 사업을 먼저 알아보고, 사업계획서를 그 공모에 알맞게 맞춰서 지원하는 편이에요.
와카로 받은 지원 사업들의 경우, 건물을 짓거나 고치는 사업으로 받기는 쉽지 않거든요. 공모 사업 자체가 개인이 사업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는 게 눈에 보이면 민원이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나랏돈으로 왜 이런 걸 하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고요.
이전에는 한옥 짓는 사업에 대해서도 지원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사업들은 없어지는 추세이기도 하고, 귀농해야만 집을 짓는 부분에 지원해 주는 사업 위주이기도 해서 저는 ‘워케이션’에 초점을 맞춰 사업 계획서를 제출했어요. 코로나19 시기에 ‘워케이션’이라는 키워드가 딱 맞아떨어졌던 거죠. 그냥 ‘스테이’라고 했으면 못 받았을 거예요. 또, 로컬 지원 사업에는 ‘이 사업을 통해, 이 지역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도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지자체, 청년 지원 사업 등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찾는지 노하우나 팁도 공유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주로 ‘K-Startup*’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찾아요. 또 주변에서 정보를 공유해 주기도 하고, 역으로 주최 측에서 제안을 주는 경우도 있어요. 약간 제비가 박씨 물어다 주는 느낌이랄까요? (웃음) * K-Startup: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운영하는 창업지원 포털로, 예비 창업자와 스타트업을 위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드림위드 우리마을 LEVEL UP’과 ‘청년 마을 공모 사업’은 SNS 광고를 보고 지원했어요.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다 보니 광고들이 알고리즘으로 뜨더라고요!
와카를 비롯한 다른 사업들로 꼭 수익까지 내지는 않더라도,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한 삶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와카 자체로는 아직 원금을 회수하지는 못했지만, 건물 자체의 가치는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매달 고정적인 수익도 발생하니 시골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고요. 비유하자면, 투자 상품에 3억을 넣고 이자 수익을 받는 것보다는 안정적이라는 느낌도 있어요.
물론, 지속 가능성을 확실히 보장할 데이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꾸준히 해 나가다 보면 결국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란 막연한 확신으로 하고 있어요.
Story 03. 해남에서의 새로운 삶
지방 생활을 시작한 젊은 청년들의 큰 고민 중 하나로 주민들과의 교류 문제도 있는데, 지영 님의 경우 해남의 사회 구성원으로 잘 자리 잡으신 것 같아요. 해남의 변화를 만드는 주축으로 일하고 있기도 하고요.
초반에 옥공예 마을에 가서 사업을 시작할 때는 저희 마을 이장님께서 저의 신원 보증을 해주셨어요. “우리 마을에 와서 이런 일 하고 있는 아인데, 애가 괜찮다.” 그러니 그 마을 이장님도 저를 좋게 봐주셨어요.
와카가 자생할 수 있도록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니, 동네에서도 좋게 봐주시고 신임을 얻었죠. 지금은 황산면 주민자치회 사무국장 일도 하고 있어요. (웃음)
지역 텃세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요. 지영 님도 해남에서 텃세를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해남에서는 마을 단위로 동네를 구분하는 것 같아요. 일례로 식당에서 아주머니와 대화하다가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하셔서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니, 옆 동네에서 왔다고 하셨어요. 같은 해남이라도 옆 마을로 이사를 가면 외지인이 되어요. 옆집 할머니는 어릴 적 고산에서 오셔서 해남에서 평생을 사셨는데, 여전히 ‘고산댁’이에요.
저는 여기서 평생을 살아도 ‘서울에서 온 아가씨’로 불릴 것 같아요. 제가 만약 여기서 아이를 낳아도 ‘서울 아가씨 아들, 딸’일 거고요. 그게 한 삼대(三代)는 되어야 이 동네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대요. (웃음)
외지인이지만, 그렇다고 텃세로 인해 괴로웠던 적은 없어요. 외지인이 마을에 새로 오면 경계하는데,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 새롭게 왔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경계심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텃세로 인한 마찰은 없는 것 같아요.
동네에서 또래 친구도 사귀셨나요?
저희 마을 청년회장님이 70대시고, 막내분이 60대예요. (웃음) 차로 20분 정도 나가야 또래를 만날 수 있죠. 외롭지 않으려면 또래 친구들을 만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곳에서 처음 사귄 친구는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는 친구인데요. 제가 SNS에 ‘#해남’을 해시태그해서 올린 걸 보고 저를 알게 되어 인터뷰 요청을 했어요.
그렇게 처음 만났고, 그 친구가 본인도 귀향해서 지내다 보니, 친구들도 다 떠났고 너무 심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며 집을 하나 고쳐서 ‘모닥모닥’이라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거기 살면서 지인이 오면 게스트 하우스처럼 사용하고 있고,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벌이는 친구예요.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친구들이 연결되면서부터 저도 이곳 생활이 훨씬 즐거워졌어요.
재정적으로는 안정된 상태인가요?
마음이 안정된 상태예요. 돈은 없죠.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마음에 여유가 있고, 편안해요. 해남에 내려오고 초반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처음 와카 공사가 1년이나 걸렸는데, 중간에 이런저런 일들로 멈춰 있던 기간도 길었어요. 새로운 일을 선택하고 처음 겪어보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으로 밥도 안 넘어갔던 기억이 나요.
그때 마음이 굉장히 힘들면서도 힘든 상태가 스스로 이해가 안 됐어요. 서울에서 일할 때 주로 저를 힘들게 했던 것들은 인간관계였거든요. 여기선 그런 문제가 없는데 도대체 내 마음은 왜 지옥 같고, 실패 앞에 두렵고, 이런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건지 이유를 알고 싶어서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을 많이 읽었어요. 제가 약간 글로 배우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책에서 해답을 찾으셨나요?
책에서 답을 찾았다기보다는 마음을 돌보며 내면을 이해하고 내 마음과 친해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마음이 조금씩 편해지더라고요.
서울에선 마음이 힘들어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며 내 마음을 무시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마음을 돌보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발전에만 집중했었죠.
반대로 서울에서의 생활 중 그리운 점도 있나요?
문화적인 부분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기회가 있다는 부분인 것 같아요. 이곳에선 만나는 사람도 한정적이고, 사회적인 관계 형성에서 제한적인 점이 있어요.
‘서울로 돌아갈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나요?
자주 하죠.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이런 생각도 했다가 ‘그래도 여기 좋지’ 했다가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해남에서 저의 발을 묶고 있는 게 없어요. 그냥 떠나면 돼요. 강아지도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와카도 제가 매일 가지 않아도 잘 운영되고 있고요.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간절하게 떠나고 싶고 그럴 것 같은데,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모든 게 다 편안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한 번씩 맥도날드랑 스타벅스가 먹고 싶어질 때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확 커지기도 해요. 1시간 넘게 운전해서 목포까지 나가야 하거든요. (웃음)
해남과 가까운 대도시는 목포인가요? 그곳에는 자주 가나요?
목포와 광주인데요. 광주는 일 때문에 종종 가긴 하지만, 저에게 익숙한 도시가 아니니까 도시가 그리울 때는 서울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에는 남자 친구도 있고, 부모님도 계시니까요.
해남에서의 삶이 서울과 비교해 어떤 점이 가장 달라졌나요?
자연과 가까운 삶이 주는 마음의 위안이 있어요. 사계절을 더 잘 느끼고, 밤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고요. 서울에 살 때는 녹색갈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주말마다 등산하러 다니고, 여행을 다니며 자연을 찾아다니는 게 취미였는데, 지금은 그 취미가 사라졌어요.
또 하나는 일상의 루틴이 사라졌다는 점이에요. 지금 마치 프리랜서처럼 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은데,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흐려졌고, 내가 일할 때, 쉴 때를 스스로 정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는 직장인 생활을 하며, 정해진 생활 패턴이 있었을 것 같아요.
네, 해남에서 생활하다 보니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는 데에 서툴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또 나를 돌보기 위한 일들에서 많은 부분 외부의 도움을 받고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나 스스로를 돌보는 데 아무런 노하우가 없구나!’ 그걸 여기 와서 깨달았어요.
도시에서의 삶은 ‘나’보다는 ‘일’이 중심이 되어 정해진 것들을 하면서 살았고, 주로 배달 음식을 먹고, 바쁘면 빨래도 맡기고, 청소도 청소 요정님 부르는 그런 서비스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도시에서 내가 살았던 삶이 편리했지만, 그만큼 자기 돌봄을 스스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여기서는 그런 서비스의 부재로 인해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해야 하니까요.
“도시에서의 삶은 ‘나’보다는 ‘일’이 중심이 되어 정해진 것들을 하면서 살았고, 그만큼 자기 돌봄을 스스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와 비교해 소비 패턴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요즘은 적게 벌어서 적게 쓰는 것 같아요. 일단 가장 큰 차이는 주거 비용이 많이 절약된다는 점이에요. 옷도 거의 사지 않아서 의류비도 크게 줄었죠.
주로 드는 생활비는 식비와 주거 관련 비용인데, 도시와 비교했을 때 더 많이 나가는 항목도 있어요. 예를 들면 전기세와 유류비가 그래요. 제가 지내는 집과 와카 둘 다 단독주택이고, 집이 홀로 떨어진 형태이다 보니 겨울에는 정말 추워요. 제가 있는 황산면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다 보니 겨울에는 기름값이 정말 많이 나와요. * 2021년 전라남도가 도시가스 보급률을 85%까지 확대하기 위한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해남군 황산면과 같은 일부 지역은 아직 도시가스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역 주민들은 기름보일러나 LPG 등 다른 에너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도시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다 보니 교통비가 정말 적게 들었는데, 이곳은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해서 자차가 없이는 힘들거든요.
Story 04. 그리는 삶의 모습
재테크나 노후 준비도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지금은 사실 제 자산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몰라요. (웃음) 서울에서 회계사로 일할 때는 개인 재무제표를 그리면서 노후를 위해 이만큼 벌어야겠다는 정확한 목표가 있었어요. 매달 자산 상태를 꼼꼼히 점검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통장 잔고도 잘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어요.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길라임에게 “너는 통장에 지금 얼마나 있는지 알지? 통장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나는 부자야.”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조금 결은 다르지만, 저 또한 마음으로는 지금 더 부자인 것 같아요. 흘러가는 대로 살자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그럼, 불안한 마음이 들진 않나요?
서울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도태되는 느낌이 들었고, 불안했죠.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본인의 밥값을 해야 하고, 게으르게 살면 안 되고, 항상 뭔가를 성취하고 이루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학습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또 딱히 시골에 산다고 이런 생각이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여기 분들도 정말 바쁘게 살고, 젊은이들이 일하지 않는 모습 못 보시거든요.
그런데 이곳에서 조금 다른 삶을 살면서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찾으려고 하고, 누군가를 좇아 살지 않으려고 하니까 사회적 압박감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이곳에서 조금 다른 삶을 살면서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찾으려고 하고, 누군가를 좇아 살지 않으려고 하니까 사회적 압박감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새로운 삶의 형태로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서울에서도 저는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를 ‘나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라고 속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불안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이라도 올라오면 운동으로 그걸 억누르고, 더 바쁘게 움직여 그 감정을 묻어두고는 그 당시에는 그런 저에게 도취해 있었어요. ‘이런 나 제법 멋있어’ 이러면서요.
상상했던 지방 생활의 모습과 가깝게 살고 있나요?
저는 그래도 제가 텃밭 정도는 가꾸며 살 줄 알았어요. 서울 마포구 망원동 살 때는 한창 도시 농부가 되어보겠다고 단독주택에 살면서 베란다에 텃밭을 만들어서 주말마다 수확한 것들로 샐러드도 먹고 그랬는데, 막상 내려와 보니, 시골 생활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어요.
제가 원하는 삶의 형태를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것들을 명확히 생각하다 보면, 삶이 좀 버거워지고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내가 기대하고, 계획한 만큼 되지 않으면 해남에서의 삶은 실패한 거고, 혹은 그게 됐기 때문에 성공한 거고 이런 잣대들을 마음 안에서 생기면 그만큼 그게 나의 새로운 굴레가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해요.
그렇다면, 지금 삶의 만족도는 어떤가요?
100%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현재의 삶을 자유롭게 누리며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나 스스로를 잘 돌보면서요.
Interview·Write 김현의(A.R.E) Photo 박현성 Graphic 이은호 Edit 금혜원 송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