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배한성의 스트레스 테스트가 건네는 교훈
ㆍby 김동길
지난 두 편의 글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국가나 세계에 영향을 준 거시경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리스크 관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거운 소재를 다루다 보니 제 글도 무겁고 길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앞으로 세 편에 걸쳐, 국가보다 작은 단위인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개인 차원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해요. 한 사람의 인생을 톺아보며 그의 리스크는 무엇이었는지, 이를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얻고자 합니다.
참고로 개인을 다룬 세 편의 글은 자서전, 뉴스 등 공개된 자료를 통해 특정인의 삶을 리스크 관리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본문 속 주인공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서술하려고 애썼으나, 그럼에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저자인 제 불찰임을 밝힙니다*. * 사실관계가 틀린 부분이 있다면, 토스 콘텐츠팀 메일(content.team@toss.im)로 제보 주세요. 반영하겠습니다. – 편집자 주
살아남거나, 망하거나: 스트레스 테스트
상장기업은 자본금을 모두 날리면 상장폐지가 됩니다. 남의 돈을 받아(예금) 빌려줘서(대출) 수익을 내는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게 자본금 관리는 더 중요하죠. 그래서 거의 모든 은행들은 ‘위험자본한도’를 관리하고 있어요.
위험자본한도는 감내 가능한 최대손실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보통 자본금보다 작게 설정하고, 사업을 할 때 이 한도를 넘어가지 않도록 관리하죠. 가령 은행의 자본금이 1조 원이고 위험자본한도가 6,000억 원이라면 금융기관은 최대손실이 6,000억 원 이내가 되도록 대출의 양과 질을 관리합니다. 그래야 실제로 6,000억 원의 손실을 보아도, 남은 4,000억 원의 자본금으로 계속 사업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다양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어떤 아이템의 유행을 예상하고 그쪽 시장에 진출했는데 예상과 달리 유행하지 않아서 손실을 보는 등 잘못된 사업전략 집행과 같은 내부 요인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고, 코로나19의 대유행에 따른 여행산업 침체처럼 외부 요인(외부 충격)으로 자기자본조차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맞기도 하죠.
은행들은 극심한 외부 충격이 발생했다고 가정하고, 이때 최대손실이 얼마인지, 자본금은 얼마가 남는지 계산합니다. 갑자기 국고채 3년물 금리가 2%에서 4%로 폭등하고, 코스피 지수는 3,000선에서 2,000선까지 하락하는 상황을 가정해볼까요. 그러면 금융기관이 보유한 채권 가격은 크게 폭락하고, 신규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금이 부족할 것 같으면, 즉 살아남기 힘들겠다 싶으면 증자를 하고, 대책*도 세웁니다. 이러한 손실 계산과정을 ‘스트레스 테스트’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금융기관에 스트레스(충격)를 줬을 때, 어떻게 되는지 보겠다는 것이죠. * 실제로는 (유상)증자보다 후순위채 발행 등을 통해 자본을 보강해요. 후순위채는 말 그대로 채권, 즉 부채이지만 은행감독기준을 만드는 국제결제은행(BIS)에서 후순위채만큼은 자본금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은행 등은 이를 통해 자본확충을 많이 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 연준과 재무부는 은행들에게 스트레스 테스트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재무부 장관인 티모시 가이트너가 쓴 동명의 회고록 《스트레스 테스트》에 따르면,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공표를 계기로 미국 금융기관들이 앞으로 존속 가능할지 신뢰성 우려를 떨쳐버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죠. 현재 스트레스 테스트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많은 금융기관에서 정기적으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트레스 테스트는 개인에게도 유용합니다. 살면서 개인 또한 극심한 외부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가까운 사람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나, 사업 실패, 실직 등이 이에 해당하겠죠.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내가 계속 살 수 있는지 점검하고, 계속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것이 개인을 위한 스트레스 테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금융기관처럼 내가 받는 충격을 숫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입니다.
접근을 좀 달리해볼게요. 인생 선배들은 어떤 스트레스 상황을 맞았는지, 또 그걸 어떻게 겪어냈는지 그냥 들여다보는 걸로요. 꼭 숫자가 아니더라도, 거기서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국민성우 배한성의 스트레스 테스트
제가 쓰는 내비게이션 앱에서 얼마 전 성우 배한성 선생님(이하 배한성, 존칭 생략)의 목소리가 나오더군요. 미국 드라마 <맥가이버>에서 주인공 목소리를 연기한 게 벌써 30년 전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현역으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의 삶을 조사하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이번 글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죠.
배한성은 1966년에 데뷔했어요. 이후 셀 수도 없이 많은 라디오 드라마, TV 방영 외국 드라마 및 영화 성우는 물론, 라디오 및 TV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한국의 정상급 성우입니다. 1945년생으로 여든에 가까운 나이이지만, 여전히 여러 매체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방송인으로서 크게 성공한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배한성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습니다. 극심한 외부 충격을 적어도 두 번 이상 겪었거든요. 첫 번째는 그가 다섯 살 때 겪은 부친의 월북, 두 번째는 40대 초반에 겪은 배우자의 사망입니다.
첫 번째 충격, 부친의 월북
그의 자서전 《열정을 담은 천의 목소리, 배한성》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그의 아버지는 배한성이 다섯 살이던 1950년, 모친과 배한성, 동생을 서울에 두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전쟁이라는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이 부재한 상황은 어린 그가 감당하기에는 경제적, 정서적으로 너무 큰 충격입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자녀들을 경제적으로 부양할 상황도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배한성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 등 온갖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는 알람 시계 살 형편이 되지 않아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 무렵, 약수터 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를 듣고 일어나 조간신문을 배달하고, 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석간신문도 배달했다고 회고합니다.
한편 그에게 중학교 입학은 도약의 기회라기보다 큰 도전이었습니다. 학비를 내기도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배움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지만 겨우 입에 풀칠하는 형편에 중학교를 진학한다는 건 사치로 여겨졌다. 배한성, 《열정을 담은 천의 목소리, 배한성》, p.45
공부를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배한성은 명문중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대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무명의 신설 중학교에 1등으로 합격해 진학하게 됩니다. 고등학교도 은행으로 쉽게 취직할 수 있었던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되, 주간에는 일을 하면서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야간과정을 선택했고요.
결국 다섯 살 때 겪은 부친의 월북이라는 스트레스는, 그가 성우 시험에 합격했던 22살이 되던 해까지 경제적 극한 상황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는 재능이 넘치던 어린 소년의 진로와 꿈을 막았고, 소년 가장으로 나서게 만들었습니다. 저라면 이 정도의 경제적 충격에 삶을 포기해 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정서적으로도 당시 상황은 버티기에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배한성은 모친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갑자기 닥친 풍파 앞에서 어머니는 너무도 유약한 분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내가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단지 그래서 어머니에 대해 애증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모성 결핍이라고 해야 할 만큼 당신 감정만 앞세우시던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은 평생 섭섭함으로 이어졌다. 배한성, ‘먼저 간 아내와 어머니를 벅차게 만나는 날’ (조선일보, 2018.8.3)
부친의 부재. 모친에게도 무언가를 충족받지 못했던 그 시기를 도대체 어떻게 견뎌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했던 열망이 어린 시절의 그를 지탱해준 건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자신의 한계에 절망하고 주저앉기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그의 자세가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과하게 만든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아닐까요.
실제로 그는 영화배우가 되려고 유명 배우의 집 앞에 진을 쳤고, 임권택 감독 영화에 캐스팅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외모의 한계 때문에 캐스팅되지 못하자, 결국 이를 받아들이고 은행원이 되고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마저도 손의 상처가 있어 좌절되고 말았죠. 계산 필수품이었던 주판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으니까요.
고2 무렵, 배한성은 성우 모집 공고를 보고는 접었던 배우의 꿈을 성우로 꽃 피울 수 있겠다고 판단합니다. 고졸 자격을 얻으려고 사촌 형의 이력서를 위조까지 하면서 성우 시험을 치르죠. 이 시험에서는 낙방했지만, 2년 뒤에는 합격해 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 상황을 결국 이겨내 버립니다*. * 배한성은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학) 1학년 재학 중에 TBC동양방송(현 JTBC) 성우 공채에 합격했습니다.
미래를 꿈꾸는 것은 양날의 칼입니다. 무언가가 되고자, 하고자 하는 열망과 절박함은 로켓 추진체처럼 현실의 땅바닥에서 꿈꿔왔던 미래의 하늘로 나를 끌어올려주는 힘이 되죠. 하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의 고통도 큽니다. 그러니 하늘로 내달리되, 나와 주변 상황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외모나 손가락 등 자신의 한계가 명백하다면, 원래 꿈꿨던 영화배우만 고집할 게 아니라 은행원이나 성우 등 조금 낮은 고도라도 괜찮다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유연함이 큰 충격을 이겨나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두 번째 충격, 배우자의 사망
43살의 배한성에게 두 번째 충격이 닥쳤습니다. 배우자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6년 라디오 드라마 성우로 시작해 외국 영화와 드라마 더빙, 라디오 DJ 등으로 활동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던 1987년의 일이었습니다. 배한성에게는 10대의 두 딸도 있었죠.
배한성은 당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창 엄마 손이 많이 갈 나이의 두 딸을 데리고 살아가던 시절, KBS2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생방송을 마치고 집에 오면 새벽이었다. 밀린 설거지나 빨래를 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내야 했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잠자리에 들 때 베개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던 적도 있고, 혼자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물이 흘러서 선글라스를 끼곤 했다. 배한성, 《열정을 담은 천의 목소리, 배한성》, p.182
그의 큰 딸은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편찮으신 날에는 아버지가 직접 내 도시락을 싸주셨다. 혹시라도 샐까 비닐랩에 두껍게 싸주신 반찬들을 하나씩 풀면서, 이른 아침 부엌 한편에서 익숙지 않은 손놀림으로 도시락을 준비했을 아버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이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배지인, ‘성우 배한성씨 맏딸 배지인씨’ (조선일보, 1997.12.15)
배우자의 부재는 혈육의 부재와는 또 다른 형태의 충격입니다. 경제적 충격은 부친 부재 때보다 덜 할 수 있겠지만, 정서적 충격은 더 클 것입니다. 내 슬픔도 감당하기 힘든데, 두 자녀의 슬픔까지 위로하고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아버지의 역할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죠. 내 앞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도미노 핀 같은 주변 상황에서 내 뒤에 서 있는 두 딸을 지키기 위해 흔들리고 상처 입어가며 버티고 서 있는 핀 하나 같다고 해야 할까요.
몇 년 뒤 배한성은 좋은 분을 만나 재혼함으로써 이 위기를 벗어납니다. 두 딸도 잘 성장하여 자신의 자리를 찾은 걸로 보이고요. 물론 그의 매우 내밀한 가정사라 타인이 이러쿵저러쿵하는 일이 조심스럽습니다만, 이런 큰 위기를 이겨낸 배경에는 배한성의 처절한 헌신이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해석해 봅니다.
그 외에도 충격은 많았다
배한성은 그 외에도 수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잘 나가는 라디오 드라마 성우였으나, TV가 보급되면서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가 식어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죠. 또한 1980년 신군부(新軍部)*의 언론통폐합으로 재직 중이던 TBC 동양방송이 KBS와 합쳐지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고, 1990년대에는 외화 더빙의 자막 대체로 인해 성우 일자리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 1963년 전두환, 정호용, 노태우, 김복동 등 대한민국 육사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했던 군대 내 사조직. – 편집자 주
그는 지속적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며 이런 위기들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라디오 드라마 성우로 일을 시작해 TV 방영 외국 드라마, 영화 성우를 거쳐 라디오 DJ, TV 방송 진행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작품 하나하나에 엄청난 열정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그는 영화 <엘리펀트 맨>의 희귀병 환자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고자, 환자와 똑같이 얼굴 근육이 뒤틀려 침이 흘러나오는 상태를 연출하기 위해 실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건 물론, 침이 계속 흘러나오도록 사탕을 물고 더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성과는 방송계에도 두루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홈쇼핑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소개한 상품은 가구였다. 평상시에도 가구에 관심이 많아서 가구에 대해 공부하려고 앤티크 교육 강의도 들으면서 꼼꼼하게 준비해 갔다. 준비를 열심히 한 탓인지 운이 좋았는지 구매 전화가 쇄도해서 매진이 됐다. 매진까지 되는 경우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라서 그 후 출연 섭외가 많아졌다. (…) 특히 나를 믿고 나 자신의 이미지가 더해진 상품을 사는 고객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무책임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섭외가 들어오면 제품 정보를 꼼꼼하게 알아보고 잡지나 책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대본 형태의 메모를 직접 쓰기도 했다. (…) 발모제를 소개할 때는 의학서적까지 뒤져봤다. 배한성, 《열정을 담은 천의 목소리, 배한성》, p.194
배한성의 인생이 건네는 말
살다 보면 큰 충격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중 누군가는 그 충격에도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국민성우 배한성은 큰 충격을 여러 번 겪었지만, 일어나고 또다시 일어나서 지금껏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떨쳐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배한성의 업에 대한 열정, 자신의 한계 상황에 따라 이를 조절했던 유연성, 배우자를 잃은 슬픔에도 굳건했던 가족을 향한 헌신, 그리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가지 업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배한성은 엄청난 충격 속에서도 자신의 자본금을 모두 소진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성장했지요. 극심한 외부 충격으로 숨이 막힐 때, 그의 삶이 내 숨을 고르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버팀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글을 읽고 배한성 선생님에 대해 관심을 더 갖게 되었다면, 제가 언급한 책과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배한성의 인생은 제 글보다는 그의 책과 글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모친을 떠나보내며 남겼던 소회를 옮깁니다.
(4화에서는 헝가리계 미국인이자 투자가인 조지 소로스를 다룰 예정입니다.)
Edit 손현 Graphic 김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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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겪었고 위기를 다루며 위기를 공부하는 사람. 성균관대 경제학부와 KDI 국제정책대학원을 졸업했고, 기획재정부 영 프로페셔널(YP)을 거쳐 한국주택금융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998년 외환위기 때문에 학업을 접어두고 취업했고, 입사 첫 달부터 월급이 나오지 않는 상황을 겪으며 경제위기 원인과 해결책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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