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가구의 경제생활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by 사소한 질문들

아이들에게 신뢰의 표시는 ‘손’입니다. 친구와 손을 맞잡기도 하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기도 하죠. 엄지를 이어 걸며 깐부를 맺기도 하고요. 어른들에게 신뢰의 표시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돈’이겠죠. 누군가와 매일 생활비를 함께 쓰고, 자산의 대부분인 주택비용을 분담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가족’의 요체는 혈연이나 혼인 계약서보다 ‘돈을 섞을 정도의 신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로 혈연이나 혼인 외의 동거가족들도 결코 가볍고 간단한 관계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외롭지 않을 권리》라는 책을 통해 혼인과 혈연 외의 동거 가구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 주장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생활동반자는 혼인이나 혈연으로 이뤄진 민법상 가족이 아닌 두 성인이 합의하에 함께 살며 서로 돌보자고 약속한 관계를 말하는데요. 생활동반자가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복지 혜택, 법적 권리 등을 규정하고 배우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생활동반자법입니다. 

동거는 이미 흔하고 다양합니다. 몇 달 같이 살아보는 건 결혼 준비의 일부가 되었고, 결혼식 이후에도 혼인신고를 서두르지 않습니다. 비혼 1인 가구로서의 삶이 길어지면서 상황과 성향이 맞는 친구끼리 의지하면서 살기도 합니다. 사별과 이혼으로 첫 번째 결혼생활이 끝난 중・노년들도 재혼 대신 뜻이 잘 맞는 이성친구나 동성친구와 새로운 가족을 꾸리기도 합니다.

tvn은 최근 다양한 생활동반자 가족을 다루는 <조립식 가족>이라는 관찰 예능을 시작하기도 했죠. 친구이자 동료인 댄서 모니카·립제이 가족은 이미 6년째 동거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년째 함께 살던 배우 현봉식·김대명 가족은 새로운 가족으로 배우 이천은을 맞이하며 둘에서 셋으로 재조립 되었죠. 개그맨이자 커플 유튜버 임라라·손민수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을 결혼이 아닌 동거로 실천합니다. 

같이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헤어지거나 사망하기까지. 동거 가구가 마주하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 합니다. ‘동거’는 더 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지만, 동거 가구는 여전히 경제적 사각지대에 놓여있거든요. 우선 함께 살기 위해선 집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동거 가족이 공동명의로 전세를 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재산 관계가 복잡해지니 집주인이 해줄 리가 없죠. 은행에서도 공동 명의로 전세대출을 받을 수 없고, DSR* 기준도 적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집을 공동명의로 구입한다면, 주택담보대출도 공동명의로 받는 게 좋겠지만 이 역시 1금융권에서는 제약이 많습니다. 1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은 집값 안정을 위한 정부의 주요한 정책수단이라 은행의 자율성이 매우 한정적인데, ‘생활동반자 가족’은 아직 정부 정책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총부채 원리금 상환 비율.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빚을 기준으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상한선을 정하는 방법

어떻게 돈을 구해서 입주를 했다고 칩시다. 그 순간부터 생활비는 펑펑 나가기 시작합니다. 당장 이삿짐센터와 입주청소는 누구 돈으로 계약하고, 이삿날 자장면값은 누가 쏴야 할까요. 물론 생활동반자 사이에도 생활비 분담에 대한 약속을 할 수 있고, 더 꼼꼼히 하자면 계약서를 쓸 수도 있습니다. <조립식 가족>에서 모니카·립제이 씨 가족은 반반씩 내고, 현봉식·이천은·김대명 씨 가족은 가사노동, 헬스 트레이닝 등 서로가 필요한 일을 해주며 생활비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약속이 항상 잘 지켜지진 않는다는 겁니다. 생활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러다 보면 한 사람이 대출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일도 생깁니다. 혼인 관계에서는 이혼 절차를 통해 생활비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경우 배상하도록 하고, 또 생계를 위한 채무는 함께 책임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사노동 등으로 생활에 기여했다면 재산을 분할 받을 권리를 인정합니다. 이런 법 제도는 가족 구성원 각자, 특히 경제력이 약했던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점차 개선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거 관계에서는 생활비와 같은 경제적 분쟁이 있을 때 서로의 권리를 합리적으로 지키기 어렵고, 피해는 약한 쪽이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민사소송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 때 짜장면 값은 내가 대신 내준거다, 이 소파는 선물이었다” 모든 것을 일일이 기록하고 살기란 어려울 테니까요. 

생활동반자 관계가 길어진다면 둘이 헤어질 때 공동형성재산, 즉 둘이 함께 살면서 이룬 재산을 어떻게 나눌지도 문제가 됩니다. 혼인한 부부의 경우, 공동형성재산은 둘 모두의 권리로 봅니다. 특히 가사노동, 돌봄 노동 등도 경제생활에 동등하게 기여했다고 보죠. 생활동반자 관계의 공동형성재산 권리는 아직 정해진 틀이 없고, 서로의 선의에 기대해야만 합니다.

고령화로 인해 이혼·사별 후 중노년에 동거를 시작해도 수십 년간 생활이 이어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노년 커플의 경우 혼인신고로 가족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기 싫어 혼인신고를 꺼리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상속 문제는 빈번히 일어납니다. 

많은 한국 남성 노인들이 밥을 할 줄 모릅니다. 혼자된 남성 노인이 여성 노인과 생활동반자 관계를 맺으면서, 여성 노인은 가사와 돌봄 노동을 제공하고 남성 노인은 ‘나중에 집 한 채 해주겠다’는 암묵적 약속이 있었다고 해봅시다. 노인을 위한 보편적 경제 안전망이 부족하고, 특히 여성노인의 빈곤율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이런 관계는 사실 꽤나 흔합니다. 노인 동거 커플은 법적 상속권이 없기 때문에 죽기 전에 자산을 증여할 것으로 약속하는 경우가 많죠. 두 사람이 특별히 문제가 없이 잘 산다고 하더라도 여성 노인은 ‘저 양반이 집을 해주기 전에 가버리면 어쩌지’란 걱정을 하게 되고, 남성 노인은 ‘집 해줬다가 바로  떠나버리면 어쩌지’라는 걱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유언장에 쓴다고 하더라도 법적 가족들이 유류분* 등 상속권을 주장하면, 온전히 상속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상속받은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정한 상속인을 위하여 법률상 남겨 두어야 할 일정 부분. 자녀의 유류분은 법정 상속분의 50%, 형제자매는 30%의 유류분율을 주장할 수 있다. – 편집자 주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2019년 한 금융사에서 ‘인생동반자 신탁’이라는 일종의 유언대용 신탁상품을 내놓습니다. 유언대용신탁은 위탁자가 금융회사에 유언과 함께 자산을 맡기고 운용수익을 받다가 위탁자의 사망 이후 미리 위탁한 유언대로 자산을 상속하는 상품입니다. 생활동반자와 같이 민법 상 상속인이 아닌 대상에게 자산을 남기기 위한 것이죠. 혈연·혼인 외 가족의 상속권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대안책입니다. ‘인생동반자 신탁’이 성립하기 위해선 신탁 자산이 민법 상 상속대상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 민법은 혼인·혈연에 따른 촌수 순서로 상속권을 인정하고 있는데, 금융기관에 맡긴 자산마저 민법 상 가족에게만 남겨진다면 굳이 이 상품을 쓸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데 신탁 자산에 대한 상속권이 민법 상 가족에게 있는지는 법률상 다툼이 좀 있습니다. 2020년 수원지법은 신탁 자산은 민법상 상속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 대법의 결정이 남아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얘기인가요. 중요한 건 금융사는 법적 쟁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상품을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생활동반자 가구의 상속과 재산분할 문제가 흔하고, 특히 상속할 자산이 있는 층에선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제도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죠.

주택, 대출, 세제, 보험, 상속, 재산분할 등 경제적 문제에서는 서로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합니다. 여기엔 법과 정책 외에도 다양한 금융상품과 관례도 포함됩니다. 시장은 이미 달라진 가족의 모습과 욕망들을 반영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토스가 깜짝 놀랄 서비스를 내놓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법적 제도의 지체가 계속되는 한 개인과 시장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2013년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는 60대 여성 노인 A 씨의 투신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A 씨는 여고동창인 친구 B 씨와 고등학교 졸업 후 40년을 함께 살아왔고 주로 가사노동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B 씨가 말기 암 판정을 받게 됩니다. A 씨는 같이 살던 아파트 등 재산의 명의를 본인으로 바꾸려 했지만, B 씨의 조카가 나타나 상속권을 주장합니다. 결국 A 씨는 B 씨와 20여 년을 함께 산 아파트도 남기지 못한 채, B 씨의 사망소식조차 뒤늦게 듣게 됐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조카의 주장이 법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A 씨와 B 씨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낙관 하에 재산권을 정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극을 맞게 됩니다.

사이가 좋고 인생이 잘 풀릴 땐 뭘 해도 다 좋죠. 문제는 갈라설 때, 사망할 때, 돈이 없을 때입니다. 위의 사례 처럼 생활동반자 가족은 혼인·혈연으로 이뤄진 법적 가족과 달리 국가로부터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없고, 경제적 분쟁이 있을 때도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생활동반자법(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안)은 2014년 국회에서 처음 논의되기 시작되었으나, 아직 법안도 제대로 발의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도 21년 4월 ‘제4차 건강가정 기본계획’에서 혈연·혼인으로 한정된 현행 민법상 가족의 한계를 인정하고, 동거 가족을 위한 입법 추진을 검토하기로 하였습니다. 22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현행 법·제도의 한계로 실재하는 생활공동체가 차별 받고 있다면서 생활동반자법과 같은 법률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고요. 

혼인과 혈연으로 한정된 법적 가족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은 점차 우리 사회에서 흔하고 평범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법은 평범한 사람들, 큰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난관을 만나도 합리적으로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마음이 존중받는 사회가 오길 기대합니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Writer 황두영

입법 노동자로 일하다가, 정치와 정책에 대해 글도 쓰고, 방송도 한다. 국회에서 ‘생활동반자법’을 추진하며 법의 초안을 만들었다. 2020년 생활동반자법 등 혼인.혈연 외 가족구성권의 필요성을 주장한 책 《외롭지 않을 권리》를 썼다. 다양한 삶과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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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질문들

세상의 중요한 발견은 일상의 사소한 질문에서 태어납니다. 작고 익숙해서 지나칠 뻔한, 그러나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를 조명하며 금융과 삶의 접점을 넓혀갑니다. 계절마다 주제를 선정해 금융 관점에서 풀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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