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발전 시기에 따라 상징적인 산업군이 그려진 이미지

가난했던 한국, 어떻게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게 됐을까?

by 심용환

전 세계가 놀란 한국의 성장 속도, 그리고 3가지 전략

한강의 기적이라는 계단을 오르고 올라, 모든 단어 앞에 ‘K’를 붙이며 자부심을 느끼는 시대가 왔다. 1945년, 주권을 되찾은 기쁨은 충만했지만 곳간 사정은 빈약했던 한국의 현실은 세계최빈국. 이후 78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가파르게 성장해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유례없는 일이다 보니 해외 학계에서도 한국의 경제 성장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분분하다. 발전국가론✱ 같은 주장이 대표적이지만 성공적인 개발 계획, 국가의 리더십, 국민들의 근면성, 공동체와 교육에 대한 열정, 수출 시장에서의 기회 등 다양하게 작용한 요소들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곤 한다. ✱선진국이 원조, 기술 이전 등의 방법으로 개도국의 경제 발전을 지원하고, 그 결과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 혜택을 얻는다는 이론.

그중에서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또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의 경험 속에 깊이 각인된 3가지는 ① 국가가 주도한 빠른 속도의 경제 개발, ② 다른 국가로부터 자금 융통(차관)을 통한 예산 확보, ③ 단계별 산업군 진출 전략이 꼽힌다.

첫 번째로 꼽은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야말로 온 나라가 경제 개발만을 위해 풀가동하던 시대다. 1961년에 실시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대표적이며, 성장 우선의 경제 개발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들에서 돈을 빌려와 국내에 자금을 융통시키는 것, 즉 차관도 무척 중요했다. 다시 돌아봐도 너무 잔인한 역사인 1945년 광복, 1950년 6.25 전쟁 발발, 1953년 휴전을 거치며 한국은 먹고살기 위해 원조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1950년대 후반이 되며 미국의 원조 자금이 끊기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 투입이 필요했는데 곳간은 텅 비어 있으니 투자금을 확보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거나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외교를 정상화하고 청구권 자금을 받은 것 등은 모두 투자금 확보와 관련이 있다.

나아가 돈을 구해오는 것을 시작으로, 빌려온 돈을 기업에 적절히 분배하고, 기업이 이윤을 내서 돈을 되갚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

돈을 빌리고, 빌려주고, 이익을 남기고, 벌어들인 수익으로 빌린 돈을 갚고, 이를 통해 국가 신용을 높이고, 높아진 신용을 바탕으로 다시 돈을 빌려 오는 것. 이런 방식으로 돈을 돌고 돌게 하는 것.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한국 정부가 개발 계획뿐 아니라 차관 관리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높이 산다.

더불어 단계적인 산업군 진출 전략이 결정적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우월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련, 중공 등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은 계획 경제 실시를 통해 여러 성과를 이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졌고, 가장 극적인 변화는 남북한에서 나타났다. 북한의 경우는 농공 병진 정책(농업 진흥과 공업화를 동시에 진행), 경공업-중화학공업 병진 정책 심지어 군사력 강화까지 모든 것을 동시에 도모했다.

국가 성장에 있어 그 모든 게 중요한 것은 맞지만 한정된 재화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성장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널리 알려졌듯 대한민국의 경제는 1960년대 식품 제조, 가발 제작, 전자 제품 조립 사업 같은 경공업, 1970년대 철강 · 조선 · 비철금속 · 기계 · 전자 및 화학 등 중화학공업을 위주로 단계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다.

특히 중화학공업 육성 단계에서는 수출 증대에 힘쓰면서 전력 시설, 도로 정비 등 사회기반시설 확충에도 만전을 기했다. 1990년대에는 세계화에 발맞춰 IT산업을 확충하는 등 단계적 경제 성장론은 현재까지도 한국 경제 발전에 중요한 기초로 작용하고 있다.

기반 시설의 힘, 한남대교의 의미

한국 경제 성장의 역사를 설명할 때 경부고속도로(1970)를 뺄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경제고속도로이자, 미국-일본-부산-서울로 이어지는 냉전 시대 경제의 대동맥이 완공된 사건이니 말이다. 총 428킬로미터, 토공량 6,000여만 제곱킬로미터, 장대교 32개, 중소교량 273개, 횡단도로 465개소, 터널 12개, 동원된 인원 893명, 동원된 장비 152만 대. 일본이 비슷한 공사에 약 3,500억 원이 든 사업을 단 429억 7,300만 원에 끝내고 말았다. 무리한 공사, 사상자 속출, 군대 자원의 투입, 보수 공사를 위한 추가 자원 투입까지 만만치 않은 후유증을 감당해야 했지만 여하간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뚫린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로 대표되는 국토 개발 사업은 대통령과 정부의 후원하에 국가 기관의 기술 관료들이 주도했다.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학문을 연마한 소수의 엘리트가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국토 계획을 세웠다. 당시 국가의 권력은 강력했기에 계획은 빠른 속도로 강력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이어져온 끔찍한 가난에 대한 저항감이 국민들 사이에 가득해 정부 주도의 사업은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국가 발전을 위해 땅을 국가에 헌납하거나 헌납이 어렵다면 저렴하게 매각해달라”는 것이 당시 정부의 입장이었다. 시·도·군·읍·면에는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군수·읍장·면장 등은 부지런히 인근 땅 주인들을 만났다. 고속도로가 개발되면 지역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나랏일에 대해서는 발벗고 도와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인심이었다.

또한 정부는 토지를 매입하는 대가로 금액을 지불하기보다 개발 후에 발생한 이득을 나누는 방식으로 부담을 줄였다. 휴게소 개발권이나 운영권을 분양한다든지, 개발하고 남은 토지를 분할하는 식이었다. 경제가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이득을 나눠준다는 발상으로 비용을 대폭 낮춘 것이었다.

경인고속도로는 경부보다 이전인 1968년에 개통되어 있었고,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이 진행되어 1973년에는 호남-남해고속도로, 1975년에는 영동-동해고속도로, 1977년에는 구마고속도로(대구-마산)가 개통되었다. 과감한 도로 건설 정책을 통해 단숨에 전 국토가 일일생활권이 된 것이다.

1980년대에도 이 흐름은 계속됐다. 1983년에는 88고속도로, 1987년에는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됐고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 서해안고속도로(인천-목포)가 연이어 건설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한남대교가 건설된다. 경부고속도로가 한창 건설 중이던 1969년 12월 25일 길이 915미터, 폭 27미터의 제3한강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강에 다리만 서른 개가 넘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제1한강교와 광진교, 오늘날 양화대교인 제2한강교만이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다리였다. 양화대교는 군 작전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사실상 서울 양 끝에 있는 두 다리만으로 사람과 물자가 이동했다.

그런데 서울 중앙에 위치한 한남대교가 개통됨으로써 강북에서 강남 일대를 관통하며 경부고속도로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난 뒤에는 수많은 다리가 강남 일대를 관통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건설된다.

1970년 마포대교, 1972년 잠실대교, 1973년 영동대교, 1976년 천호대교와 잠수교, 1979년 성수대교, 1980년 성산대교, 1981년 원효대교, 1982년 반포대교, 1984년 동작대교, 1985년 동호대교, 1990년 올림픽대교, 1999년 서강대교와 청담대교 등이다.

한남대교의 등장은 곧장 강남 개발로 이어졌고 서울이 한강을 축으로 번성했기 때문에 강변북로, 올림픽대로 같은 간선도로도 등장하게 된다. 대교의 건설과 강남 일대 아파트 단지의 건설은 기업의 토목 기술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남대교의 건설을 통해 경부고속도로 효용성의 극대화는 물론이고 도시 개발, 도시 개발에 따른 인프라 확충 등의 연쇄적인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중대한 지점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확장이 일어나는 방식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있어서 특기할 부분이다. 제철소, 발전소, 정유공장, 공항, 항만 등 중요한 거점을 만들면서 중화학 분야에서 탄탄한 산업 기반을 마련했고, 또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들어서는 IT로 상징되는 미래 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이어졌다. 없던 시설이 만들어지고, 이에 의지하여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관행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민 차'의 탄생과 기업인들의 도전

경제 성장을 국가 정책에 의한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종국에는 기업인들의 치열한 도전과 성과로 뒷받침하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기준으로 자동차 산업은 한 공장에서 연 30만 대, 기업 단위로는 연 200만 대 생산 수준을 유지해야 가능한 사업이었다.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는 포드자동차와 제휴하여 자동차 조립 기술을 쌓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곧장 한국형 소형차 제작에 돌입한다. 자동차 기업에 있어 ‘조립’과 ‘제작’은 천지 차이만큼 격차가 크다. 조립이 외국 회사가 마련한 매뉴얼을 따르는 수준이라면 제작은 자체적으로 생산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쓰비시자동차 역시 미국의 크라이슬러에 의존하던 신생 기업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투기 엔진을 제작할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가진 회사였다. 현대는 미쓰비시로부터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 섀시(자동차의 뼈대) 전체 플랫폼에 관한 기술을 비롯해 엔진 생산에 필요한 기술 등을 이전받았고, 그 외 여러 장치는 미쓰비시에서 제작한 차를 분해하면서 설계 능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스타일링, 차체 설계, 프로토타입 제작은 이탈리아의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가 이끄는 ‘이탈디자인’이 담당하는데, 현대는 이탈디자인 쪽에서 파견된 설계 기술자들과 업무를 진행하면서 여러 노하우를 습득한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자동차는 총 5개국 26개 전문 회사와 협력관계를 맺은 끝에 ‘포니’를 개발했다. 당시 기아자동차, 신진자동차 등에서 제작한 차들은 수입 모델이거나 기술 이전에 의존해서 조립된 자동차에 불과했지만, 현대자동차의 경우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 주도하며 고유 모델을 개발했다.

그리고 1975년, 회사가 생긴 지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 안에 자동차를 독자 생산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열여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가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80년대가 되면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다. 경제 발전의 성과가 쌓이면서 국내 자동차 수요가 높아지고 ‘마이카 시대'라는 말이 나왔지만 1981년 기준 우리나라 자동차 보유 대수는 고작 57만 대. 자동차 기업이 생존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대규모 수출을 통해 기업을 존속시키겠다고 결심한 현대자동차는 공장 증설을 결정한다.

포니의 뒤를 이어 ‘엑셀’이라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30만 대 생산 능력을 갖춘 자동차 공장을 세웠고, 여전히 해외 기술에 의존하는 측면이 컸지만 그간 쌓인 자체 역량도 적극 활용했다. 또한 자체 기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연구소와 시험장을 만들기도 한다.

“한 대 가격에 두 대를 살 수 있다.” 당시 미국TV에 등장한 현대자동차의 광고 문구였다. 1980년대는 일본 경제의 전성기였으며 일본 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그때 일본 차 같은 느낌이 나면서 꽤 괜찮은, 하지만 놀라울 만큼 값싼 차가 등장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5,000달러 이하로 살 수 있는 차는 동유럽에서 생산되는 차밖에 없었다. 현대는 엑셀의 가격을 기본형은 4,995달러, 풀옵션은 7,000달러로 책정한다. 풀옵션 가격이 토요타나 닛산 소형차 기본형 가격이었으니 미국의 서민층 입장에서는 너무나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986년 미국 진출 첫해에 18만 6,000대, 1987년 26만 대, 그리고 1990년대에 100만 대 수출을 넘어선 것이다. 국내에서 자동차 수요가 가파르게 높아지던 시점에 수출 시장까지 활기를 띄면서 현대는 자동차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성공은 현대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 기아자동차는 ‘봉고’ 신화를 일궜고, 대우그룹은 ‘르망’과 ‘에스페로’로 동유럽에 진출하는 등 기업인들의 성과와 노력이 여기저기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오늘날 자동차 산업은 한국 산업의 근간이 되었다.

그 시절 우리가 피하지 못한 성장통

대한민국의 1차적인 경제 성장은 주로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라고 할 수 있다. 여태 성장의 비결을 늘어놓았지만, 급격한 성장은 여러 부작용도 불러일으켰다. 정경유착, 부정부패, 부동산 투기 및 가격 급등, 서울 중심화 현상 등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다.

IMF 외환위기라는 나라가 흔들리는 사건마저도 2001년 조기 상환하면서 이겨냈건만, 눈부신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는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는 어떨까.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흐름과 외환위기의 여파 가운데 미국식 기업 모델이 적용되었고, 중국의 부상, 한류 같은 문화 산업의 발전, 속칭 MZ세대가 주도하는 새로운 트렌드의 등장 등 새로운 변화가 새로운 산업을 이끌기도 한다.

가난을 극복하자는 구호에 호응하던 시대, 황무지 같은 현실을 헌신과 희생만으로 옥토로 바꿔놓던 시기를 지난 지는 이미 오래다.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것을 최고로 여길 수 있는 시대 또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와 같은 근본적인 구조와 기조가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거의 찬란한 성공이 가능했던 이유를 냉정하게 따져보며,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다시금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 역사를 공부하고 복기해보는 것의 진의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Edit 주소은 Graphic 이은호 함영범

– 해당 콘텐츠는 2023.8.7.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토스피드의 외부 기고는 전문가 및 필진이 작성한 글로 토스피드 독자분들께 유용한 금융 팁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현명한 금융생활을 돕는 것을 주목적으로 합니다. 토스피드 외부 기고는 토스팀 브랜드 미디어 운영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되며, 토스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심용환 에디터 이미지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필진 글 더보기
0
0

추천 콘텐츠

연관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