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의 Next Level과 용도지역 유니버스
ㆍby 얼랩
에스파(aespa)의 싱글 을 처음 들은 때는 지난 7월이다. 에스엠 소속으로 2020년에 데뷔한 그룹이며 “I’m on the Next Level”이라는 가사에 맞추어 손으로 ㄷ자를 만드는 안무가 유행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노래를 들어보기는 처음이었고, 강력한 훅에 다른 사람들처럼 반복 재생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들은 데뷔부터 화제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에스파의 세계관 설정이다.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세계관을 만드는 일이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저마다 캐릭터를 강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기반으로 콘텐츠 비즈니스를 창출하고자 우리가 알고 있는 마블 유니버스와 같은 자신들만의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파의 세계관 설정은 보다 복잡하고 진지해 보였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들어보지 못한 많은 신조어들도 필요했다. 나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일종의 아바타 아이(ae), 이들이 살고 있는 플랫(FLAT)이라는 세계, 나와 아바타와의 연결인 싱크(SYNK), 나비스(naevis), 포스(P.O.S)….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단어는 바로 ‘광야(KWANGYA)’였다. 에스엠은 의 가사에도 등장하는 광야에 대해 <SM Congress 2021>을 통해 작게는 에스파가, 크게는 에스엠이 펼쳐나갈 에스엠 컬처 유니버스(SM Culture Universe, SMCU)라는 세계관의 배경 무대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에서 광야는 폐허의 모습으로 혹은 근미래적 이미지의 도시 형상으로 시각화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에는 아예 광야의 GPS 좌표(37°32’40.2″N 127°02’40.0″E)가 공개되었는데, 이를 구글 지도에서 입력하면 에스엠이 입주한 성수동 신사옥에 핀이 꽂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작사 사옥이 바로 그 광야라니 거창한 의미부여에 비하여 조금 김 빠지는 결론이지만, 세계관을 바탕으로 콘텐츠 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납득할만한 설정이다.
도시계획이 만들어 낸 이 구역의 광야 비즈니스
에스엠의 성수동 신사옥은 2000년대 초반, 서울숲 조성과 같이 추진된 뚝섬 상업용지 계획의 결과물이다. 이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사연이 있다.
1950년대부터 경마장으로, 일부는 골프장으로도 사용되다가 시설이 이전되거나 사용이 종료된 뚝섬 일대는 1990년대 이후에는 상암, 마곡 등과 함께 개발계획만 무성한 ‘브라운필드(brownfield)’*가 되었다. 서울시의 거점 개발 대상지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고 돔구장을 만들거나 관광단지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에 이어 서울시청 이전 부지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 도시계획에서 주로 산업화로 인한 오염부지 및 매립지를 일컫지만, 보다 넓은 개념으로 유휴지(previously- developed land)까지 포함하여 산업유산 및 유휴공간까지 브라운필드로 간주하기도 한다. 미국 환경청(EPA)은 방치되거나 사용되지 않고 남아있거나, 혹은 환경오염 또는 오염의 가능성 때문에 산업과 상업시설의 확장 및 재개발에 어려운 부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서울숲 계획을 확정한 서울시는 대로변 일부 부지에 상업용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개통 예정이었던 분당선 역사 계획에 맞춰 개발을 활성화하고 중심지 기능을 실현할 목적으로, 용도지역을 자연녹지지역에서 일반상업지역으로 상향 변경하는 것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개발지에 주로 추진되는 택지개발사업에서 자연녹지지역이 주거지역이나 상업지역으로 상향되는 사례는 있었으나, 뚝섬과 같은 기존 시가지 안의 자연녹지지역이 일반상업지역으로 상향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기 때문이다*.
* 개발밀도가 낮은 용도지역에서 높은 용도지역으로 변경되는 것을 상향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자연녹지지역 → 제1종일반주거지역 → 제2종일반주거지역 → 제3종일반주거지역 → 준주거지역 → 일반상업지역 순으로 개발밀도가 증가한다. – 저자 주
용도지역이 변경된 이후 서울시는 부지 매각에 나섰다. 대림산업(현 DL이앤씨)은 2005년에 매각 대상 부지 중 하나인 뚝섬 지구단위계획구역 특별계획구역(일명 뚝섬 상업용지) 3구역을 매입했고, 직접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해 2008년에는 모든 세대가 100평형 단일 면적으로 구성된 주상복합 분양에 나섰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 침체 및 수요 한계로 거의 전 세대가 미분양으로 남아 사업을 중단했고, 이후 이 부지는 수년간 공사 펜스만 세워진 채 빈 땅으로 남았다.
대림산업은 2017년이 되어서야 평형대를 하향 조정하고 ‘아크로 서울포레스트’라는 이름을 붙여 주거시설 분양에 성공했다. 상위계획*에 따라 같은 부지에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한 업무시설과 문화시설 공사 역시 재개되어 2021년 초에 준공됐다. 현재 에스엠이 업무시설로 임차한 곳이다. 이 건물에는 현대글로비스 본사와 쏘카 서울 오피스 등도 입주한 상태다.* 특별계획구역 1구역은 주상복합으로 개발이 완료됐고, 4구역은 부영에서 매입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2구역은 고밀 개발 대신 성동구민 체육센터로 이용되고 있다. – 저자 주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 광야의 사전적 의미처럼 제 용도를 찾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35만 평의 뚝섬 땅이 어떻게 20년 이상의 시간을 지나 공원과 복합시설로, 그리고 미래의 콘텐츠를 지향하는 기업의 사옥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어있는 땅이기에 다양한 개발 가능성과 잠재력을 시험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무규칙, 무정형, 무한의 영역’이라는 세계관 내에서의 의미에도 부합한다. 이 이상 ‘광야 비즈니스’에 적합한 곳이 있을까.
도시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의 용도지역 변경
에스엠은 태초에 광야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태초 이전에 용도지역 변경이 있었던 셈이다. 아니, 용도지역이 무엇이길래.
국토계획법에 따르면, 한국의 도시계획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장기적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도시기본계획
- 도시를 개발하고 정비하기 위한 도시관리계획 (용도지역 포함)
그중에서도 용도지역은 토지의 이용 현황은 물론, 미래의 이용 방향까지 고려하여 지정하는 도시관리계획의 하나이며 모든 토지에 빠짐없이 부여되어 있다. ‘주거지역’이나 ‘상업지역’, 혹은 조금 더 세분화된 분류인 ‘제2종일반주거지역’, ‘일반상업지역’과 같은 명칭이 바로 용도지역의 예시다.
용도지역은 공간을 중복해 지정하지 않는다. 특정지점에 정해진 용도지역이 두 개 이상인 경우도 없다. 물론, 용도지역간 경계와 필지 경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필지 안에 여러 개의 용도지역이 지정되어 있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신라스테이 역삼이 위치한 언주로 517의 경우 하나의 필지이나 전면 도로변은 언주로변을 따라 일반상업지역으로, 이면부는 제3종일반주거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 인접 단지와의 통합 재건축이 논의되고 있는 여의도 삼부아파트도 일부 필지가 두 개의 용도지역에 걸쳐있음을 알 수 있다. 한 필지 안에 다양하게 지정된 용도지역이라 하여도 공간적 영역은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해진 용도지역은 토지이용이나 건축물 용도, 건폐율이나 용적률, 높이와 같은 건축물 밀도의 기준이 된다. 뚝섬 상업용지의 종전 용도지역인 자연녹지지역은 말 그대로 녹지 확보가 목적이므로 건축물은 4층 이하를 원칙으로 하며, 용적률도 50%까지만 허용된다. 반면 상향된 용도지역인 일반상업지역에서는 다른 용도지역과 달리 조례상 규제도 반대로 접근한다. ‘건축할 수 있는 건축물’이 아니라 ‘건축할 수 없는 건축물’을 명시할 정도로 거의 모든 종류의 건축물이 허용되며, 용적률은 800%까지 개발 가능*하다.
* 서울시 도시계획 조례 상 일반적 기준. – 저자 주
용도지역은 변경될 수 있다. 뚝섬 상업용지의 사례처럼 더 개발 가능한 방향(상향)으로 변경되곤 하는데, 도시의 공간구조나 위계에 걸맞은 개발을 실현하거나 장래의 합리적 토지이용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발 밀도가 낮아지는 변경을 반길 주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신규 개발 촉진보다 기존 시가지 관리 목적이 더 큰 서울시는 용도지역 상향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특히 2010년대부터는 용도지역 상향에 부응하는 기반시설 기부채납*과 분명한 개발 당위성 확보를 전제로 상향을 허용하고 있다.
* 개발사업 시 일정 부분의 토지에 공공시설을 설치해 국가나 지자체에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
서울시 안에서도 용도지역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르다. 개별 자치구는 기존 용도지역을 상향하거나 상업지역과 같은 고밀의 용도지역을 확장하려고 하고, 결정권이 있는 서울시는 이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개발밀도 상향이 가져올 자산가치 상승은 물론, 주변지역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파급효과까지 고려하면 당연한 입장이다. 뚝섬 상업용지의 계획 및 매각 과정에서도 서울숲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고자 무리하게 용도지역을 상향하려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요지는 도시계획 원칙보다 개발이익을 위해 마치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듯 손쉽게 용도지역을 변경한다는 내용이다.
용도지역이 만드는 새로운 공간과 일자리
용도지역은 꼭 상향되고 변경되어야 가치 있는 걸까? 다시 성수동으로 돌아가 준공업지역을 살펴보자. 성수동에는 서울의 다른 동네보다 훨씬 더 다양한 용도지역이 혼재되어 있다.
서울숲 북측 주거지에 지정된 제1종·제2종일반주거지역부터 한강변에 대규모 재개발 사업을 앞두고 지정된 제3종일반주거지역, 뚝섬 상업용지의 일반상업지역, 상업용지와 연계된 개발을 목적으로 지정된 성동교 남측의 준주거지역과 서울숲의 자연녹지지역까지 몇 걸음만 옮기면 다양한 용도지역의 스펙트럼을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준공업지역은 한강을 제외한 성수동 전체의 절반 정도로, 약 62만 평에 걸쳐 지정되어 있다.
공업지역 중에서도 공업용도 자체를 수용하기 위해 지정하는 일반공업지역이나 전용공업지역과 달리, 준공업지역은 공업과 함께 주거, 업무, 상업 기능의 보완이 필요한 입지에 지정된다. 서울의 공업지역은 모두 준공업지역이다. 성수동 외에도 구로·가산 디지털단지, 마곡일반산업단지와 같은 산업단지, 주거지와 소규모 공장, 지식산업센터가 혼재하는 영등포구, 구로구, 강서구 일대가 대표적이다.
지난 몇 년 간 성수동의 준공업지역은 지식산업센터 신축이 급증하며 양적으로 확장하는 동시에, 질적으로도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공장보다는 IT 산업 위주로 업종이 재편 중이다. 소셜벤처나 공유 오피스, 투자사의 성수동 진출은 과거 성장과는 다를 준공업지역의 미래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용적률 상한 400% 대비, 현재 건축되어 있는 용적률이 낮은 부지가 많다는 점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서울시는 《2030 준공업지역 종합발전계획》에서 “준공업지역은 서울시의 유일한 산업공간 및 일자리 공간으로서 기여도가 높은 공간”이며, 서울시 전체 일자리의 10.3%, 제조업 일자리의 32.6%를 차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준공업지역이 일자리 기반으로서 지닌 가치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2021년 초에는 주택 가격 급등에 대한 대책으로 준공업지역을 고밀 개발하여 서울시 내에 주택공급을 확대하려는 정책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전체적인 산업기반 확보 측면에서만 보면 주거 용도로 전환하는 건 지양해야 하겠지만, 이 역시 다양한 용도의 건축물 입지가 가능하다는 준공업지역의 특성을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야나 일자리만 용도지역의 결과물인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용도지역은 일반주거지역이다. 그중에서는 제2종일반주거지역의 면적이 가장 넓다. 아마도 대부분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일 것이다.
가장 자주 발생하며, 대상 면적이 큰 용도지역 변경 역시 일반주거지역 내 종세분 변경이다. 이는 주로 정비사업이나 지구단위계획 수립을 통한 공동주택 건립 시 이뤄진다. 어쩌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나 아파트 단지 역시 긴 시간을 거쳐 이루어진 용도지역 상향의 결과물일 수 있다. 집을 사거나 팔 때, 혹은 임대차 거래를 할 때 계약서와 함께 서명하게 되는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를 자세히 보면, 거래대상 물건이 위치한 부지의 현재 용도지역을 찾을 수 있다.
즐겨 찾는 공원이나 다니는 학교와 같은 공공시설에도 용도지역은 있다. 주로 개발밀도가 낮은 자연녹지지역이나 일반주거지역인 경우가 많은데, 별도의 도시계획시설 관련 규제가 있기 때문에 일반 대지와 개발여건은 다르다.
용도지역이 현실로 구현되는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도 있다. 시내 곳곳 공사장 가림벽에 붙은 공사개요에는 층수나 용적률, 용도와 같은 건축물 개요와 함께 해당 부지의 용도지역이 명기되어 있다.
용도지역의 미래
용도지역은 1930년대에 법제화된 이래, 산업화 과정에서의 대규모 개발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토지이용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도시 기능을 나누고 개발을 촉진하는 데는 개발 가능한 용도와 밀도가 명확하게 주어지는 현재의 용도지역 체계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상당 부분 개발이 완료된 도시에서는 단순화된 용도지역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특성이 서로 다른 지역을 용도지역이 같다는 이유로 동일하게 규제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고, 지역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괄 규제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도지역제의 한계를 넘고자 여러 논의가 진행 중이다. 보다 세분화된 용도지역을 만들거나 건축물의 형태가 아닌 이용자의 행태를 기준으로 용도지역을 재편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몇 년 전부터 서울시가 추진 중인 연구용역은 용도와 밀도, 입지를 고려하여 주거지역을 최대 11개로 세분하자는 중간 결론을 도출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상가 공실률이 높아짐에 따라 상업지역 지정에 앞서 공실률을 사전에 모니터링 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인스타그램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목적지를 미리 확인하고 바로 찾아가는 시대, 배달이 일상화된 시대의 용도지역 체계는 어때야 할까. 재택근무가 어느새 일상이지만 누군가는 사무실에 모여 근무하는 것이 생산성이 높다고도 하던데, 이런 사회에서 업무시설이 주로 모이게 되는 상업지역의 모습은 이전과 같을 수 있을까. 광야를 지난 용도지역의 미래를 생각해본다.
Edit 손현 Graphic 김예샘, 박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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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에 근무하며 법과 제도로 이루어진 도시계획을, 부동산이라는 결과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아파트를 비롯하여 대규모 복합시설과 도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동산 개발사업을 경험하였습니다. 주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이야기하고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도시를 산책합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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