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와 ‘파스타’를 설계한 디자이너가 있다?
ㆍby 장하준
국수에 진심인 두 나라
한국은 세계에서 인스턴트 국수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입니다. 1년에 1인당 79.7인분을 먹는대요. 그 인스턴트 국수 대부분이 꼬불꼬불 라면이고요. 라면을 빼고도 한국인이 즐기는 ‘면'의 종류는 거의 무한할 정도로 다양한데요.
우선 밀가루로 소면, 칼국수, 가락국수를 만들어 먹고요. 밀가루에 끈기를 더하고 고온 고압으로 면을 뽑으면 세상에서 가장 쫄깃한 ‘쫄면'이 탄생합니다. 풍성한 채소와 함께 맵고 새콤달콤한 고추장 소스에 비벼 먹어요. 밀가루 반죽에 탄산나트륨을 더하면 짜장면으로 대표되는 쫄깃한 알칼리성 국수가 돼요. 한국인이 하루에 먹어치우는 짜장면이 150만 그릇이라는 놀라운 통계도 있습니다.
메밀을 재료로 한 메밀 국수, 평양냉면 국수도 있어요. 양을 늘리고 풍미를 더하기 위해 메밀 가루에 도토리 가루나 칡 가루를 더하기도 하고요. 대표적인 한국 음식 잡채는 고구마 전분을 사용한 당면으로 만들어 먹어요. 최근엔 베트남이나 태국식 쌀국수도 인기가 높아요.
한국인은 탄수화물이 많이 든 모든 곡물과 뿌리 채소를 국수로 만들어 먹어요. 밀, 메밀, 고구마, 감자, 옥수수, 카사바 뿌리, 도토리, 칡, 쌀 등등이요. 그렇지만 국수의 ‘모양’은 기본적으로 납작한 면 아니면 줄 모양 면 2가지에 불과해요.
산업 디자이너에게 ‘파스타’ 설계를 맡기는 나라
한국만큼이나 ‘면’을 좋아하는 나라가 이탈리아인데요. 이탈리아에서는 오직 밀 하나로만 파스타를 만들어요. 그러나 그 모양을 달리하는 방법으로 20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파스타를 만들어 내죠. 길다란 면 외에도 튜브, 고리, 나선, 나비, 사람 귀, 조개, 낱알, 공, 만두 등 온갖 모양 파스타가 있어요.
이탈리아인이 파스타 모양에 쏟는 애정과 관심은 엄청나요. 1980년대 초반 한 고급 파스타 브랜드에서 산업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파스타를 디자인해 달라고 의뢰하는 일이 있었어요. 소스를 너무 많이 흡수하지는 않으면서 잘 머금는 동시에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궁극의 파스타를 주문한 거예요.
주지아로는 아름답고 초현대적인 파스타 모양을 ‘설계’ 했는데요. 튜브와 파도 모양을 합친 듯한 파스타 마릴레(Marille)는 불행히도 완전한 실패로 끝났어요. 제일 큰 문제는 모양이 복잡해 균등하게 익히기가 힘들다는 점이었어요. 알 덴테(al dente)*로 익히지 않은 파스타는 상대도 않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기준에서 고르게 익지 않는 파스타는 거의 대역죄에 가까웠어요. *‘치아에 딱 붙는’ 정도로 해석 가능한 이 말은 탄탄해서 씹는 맛이 있는 정도로 조리된 상태를 뜻한다
주지아로는 마릴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자동차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폭스바겐 골프(Golf), 피아트 판다(Panda)와 같은 믿음직한 고전부터 마세라티 기블리(Ghibli), 로터스 에스프리(Esprit)처럼 럭셔리 카에 이르기까지 100가지 넘는 차를 디자인했어요.
주지아로는 마릴레 사태를 자신의 눈부신 커리어에 남은 재미있는 사건으로 여기는 듯해요. 1991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대중에게 알려진 건 파스타 덕분이에요. 심지어 《뉴스위크》에서도 다뤘다니까요. 재미있지 않아요?”
현대차의 성공 신화
국수집착증이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이 일류 디자이너가 포니(Pony)라는 차를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포니는 또 다른 국수집착증의 나라 한국의 현대자동차에서 1975년 출시한 소형차입니다.
현대차는 1940년대 현대 그룹 창업자 정주영이 설립했어요. 미국 회사 포드와 합작 투자로 설립된 현대차는 처음엔 포드가 만든 차를 조립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 1973년 현대차는 포드와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겠다고 선언했어요. 그게 바로 포니였지요.
현대차가 포니를 처음 수출한 1976년 6월, 한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에콰도르로 수출한 차가 포니 5대, 버스 1대 뿐이라는 사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외국인들이 한국산 차를 사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어요. 가발, 옷, 봉제 완구 등 값싼 노동 집약적 제품을 수출하던 한국의 자동차를요.
현대차는 그 후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어요. 1991년 현대차는 엔진을 직접 설계하는 전 세계 몇 안 되는 자동차 제조업체 중 하나가 되었어요. 21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세계 10대 자동차 제조업체 반열에 올랐어요. 1998년 라이벌 기업 기아를 인수하면서 현대-기아차가 되었고, 2009년 현대-기아차는 포드보다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2015년에는 GM 브랜드 차보다 많아졌고요.
만약 1976년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가난한 나라의 자동차 회사, 좀 시설이 괜찮은 자동차 정비소와 별 차이가 없던 회사가 30여년 뒤 포드보다 커지고, 40년 만에 GM보다 더 많은 차를 생산해 낼 것이라고 말했으면 병원에 가 보라고 했을 거예요.
누가 한국 자동차 산업 발전을 이끌었나
현대차가 전세계 자동차 산업을 선도하게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때, 창업자 정주영과 그의 동생 정세영은 야심찬 비전을 품었어요. 세계 최고 자동차 디자이너 주지아로에게 첫번째 자동차 디자인을 맡긴 것은 그 비전을 드러내는 일이었지요. 1997년까지 현대차를 이끈 정세영은 ‘포니 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어요.
그런데 현대차의 성공 스토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웅적인 기업가 한두 명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개인은 주된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긴 근로 시간을 견디며 현장에서 일한 노동자, 엔지니어, 연구원 그리고 전문 경영인이 있었죠. 외국의 선진 기술을 익히고, 이를 조금씩 개선해 고유의 생산 시스템과 기술을 개발한 주된 동력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주인공은 정부인데요. 현대를 비롯한 자동차 기업들이 성장할 때까지 보호막이 되어줬거든요. 한국 정부는 1988년까지 외제차 수입을 전면 금지했고, 일본산 차는 1998년까지 수입을 금지했어요. 이는 한국 소비자들이 수십년 간 국산 차만 타는 일을 견뎌내야 했다는 의미기도 하지요.
사실 현대차가 자동차를 독자적으로 만들 결심을 한 것도 정부가 자동차 부문을 국산화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어요. 1973년 정부는 현대차를 비롯한 국내 자동차 제조업체들에 고유 모델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자동차 제조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위협했어요. 국내에서 생산된 부품 비율을 높이라는 압력을 넣어 자동차 부품 산업 발전을 꾀한 것은 물론이고요.
개인보다 집단적 기업가 정신이 중요하다
현대차 말고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성공을 거둔 기업이 많습니다. 설탕 정제와 의류 사업으로 시작한 삼성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와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되었고, 화장품과 치약 사업으로 출발한 LG는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을 석권했어요.
제지 공장으로 시작해 이제는 네트워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생산의 주역이 된 핀란드 대기업 노키아도 비슷한 성장 역사를 거쳤어요. 노키아의 전자 부문이 이윤을 내기 시작할 때까지는 이미 시장에 안착한 노키아 그룹의 다른 기업들(종이, 고무장화, 전선)로부터 보조를 받는 한편, 정부로부터 보호 무역, 외국 투자 규제, 공공 조달 특혜 등의 도움을 받았어요.
미국마저도 현대 경제에서 ‘집단적 기업가 정신’을 통해 발전한 나라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 정부는 기초 테크놀로지 개발에 공공 자금을 동원했어요. 국립보건원은 제약 및 생명공학 연구를 진행하고 자금을 댔어요. 컴퓨터, 반도체, 인터넷, GPS 등은 미 국방부와 군부의 연구를 통해 처음 개발됐고요. 이런 테크놀로지가 없었다면 IBM도, 인텔도, 애플도 없었을 거예요.
개인의 비전으로 성공적인 기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신화는 자유 시장 경제학의 근간이지요. 물론 자본주의 초기에는 어느 정도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큰 생산, 복잡한 테크놀로지, 국제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19세기 말 이후 환경에서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노력이 필요했어요. 거기에는 기업의 리더뿐 아니라 노동자, 엔지니어, 과학자, 전문 경영인, 정부, 심지어 소비자의 노력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국수를 사랑하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를 살피다 보면, 현대 경제에서 기업은 개인의 비전이나 노력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어요. 성공적인 기업은 집단적 노력으로 만들어집니다.
Edit 정경화 Graphic 조수희
– 해당 콘텐츠는 2023.07.14.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23년 03월 출간된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발췌해 토스피드에서 쉽게 읽힐 수 있도록 구성했어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임용됐고, 2022년 SOAS 런던대로 옮겼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군나르 뮈르달 상,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바실리 레온티예프 상을 수상했다. 전세계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비롯해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 책 17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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