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 수를 세는 장면

4세대 걸그룹은 왜 멤버 수가 줄었을까?

by 유성운

걸그룹 이코노믹스 1화. 규모의 경제와 걸그룹 멤버 수의 상관 관계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역작 <총·균·쇠>에서 인류의 생산 수단이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전환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 이제 사냥은 그만하고 농사나 지어볼까"하고 생업을 바꾼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한동안 수렵·채집과 농경을 동시에 했는데, 단위 면적당 생산성이 뛰어난 농경으로 점차 무게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 그러고 보니 너무 농사만 짓는 거 아냐?'라고 자각한 때는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는 것.

내가 4세대 걸그룹을 보는 기분이 그렇다. 2022년 한 해 동안 해외 연수차 영국에 있었는데, 2023년 서울에 돌아와보니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2020~2021년에도 4세대 걸그룹들이 활동했지만, 그때만 해도 ‘차세대 걸그룹이 등장했구나’ 싶었지 지금 정도는 아니었다.

출처: 써클차트

요즘은 너도나도 뉴진스와 아이브, 르세라핌 이야기를 한다. 걸그룹이 절대 넘볼 수 없을 것 같던 보이그룹 음반 판매량과의 격차도 80 대 20에서 65 대 35 수준까지 좁히고 있다. 명실상부 4세대 걸그룹이 K-POP의 대세가 됐다.

4세대 걸그룹은 여러모로 이전 2~3세대 걸그룹들과 차별화 된다. 그 중 하나는 규모가 확 줄어 들었다는 점이다. 2~3세대 걸그룹은 소녀시대·트와이스(9인조), 러블리즈(8인조), 에이핑크·AOA(7인조)처럼 7인 이상 걸그룹이 많았다. 우주소녀처럼 13인조 걸그룹도 있었다. 멤버 수는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였다. *소녀시대는 2014년 제시카가 탈퇴하면서 8인조가 됐다.

그런데 4세대 걸그룹은 거꾸로다. 블랙핑크 4인조, 르세라핌 5인조, 뉴진스 5인조, 피프티피프티 4인조, 그나마 많다고 할 수 있는 아이브가 6인조에 '불과'하다. 

블랙핑크를 4세대 걸그룹으로 구분한 이유

이것은 내가 걸그룹 멤버 중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선택지가 줄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이 점이 조금 아쉽지만 이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4세대 걸그룹 당 평균 멤버 수는 과거 세대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

The More, The Better

전근대사회 조상들은 아이를 많이 낳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일단 의료 기술과 위생 상태가 취약한 탓이 컸다. 누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일단 힘 닿는 데까지 많이 낳아둬야 했다.

자녀는 소중한 재산이자 미래의 보험이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농촌에서는 밭으로, 도시에서는 공장으로 내보냈다. 자식은 일손을 보태고 돈을 벌어오는 존재였다. 대단히 먼 옛날 이야기 같지만 1960년대 대한민국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K-POP도 마찬가지. 책 <걸그룹 경제학>이 나올 때만 해도 2~3세대 걸그룹 시대였는데, 새로운 걸그룹이 나올 때마다 멤버가 점점 많아졌다. 걸그룹 평균 멤버 수는 1세대 3.8명에서 2세대 5.5명으로 5명을 넘어서더니 3세대에서는 8.4명까지 늘었다. 2007년 소녀시대가 9인조로 나왔을 때 '이렇게나 많이?'라고 생각했던 게 뉴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은 것이다.

몇몇 기획사 관계자를 만나 이유를 물으면 대개 비슷한 답변이 돌아왔다. "누가 뜰지 알 수 없으니 많을수록 안전하다"는 것이다.

걸그룹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사업이었다. 보이그룹과 비교해 팬덤이 작았고, 티켓 파워도 약했다. 그러다 보니 예능 프로그램 등에 나가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게 더 절실했는데, 일단 멤버 수가 많으면 ‘그 중 하나는 터지겠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컨대 걸스데이만 해도 기획사에서 혜리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초기에는 민아에 대한 주목도가 더 높았다. 그런데 혜리는 MBC 예능 ‘진짜 사나이'에 출연해 ‘아잉’ 한 마디로 일약 스타가 됐다. 이달의소녀도 마찬가지. 츄가 가장 먼저 뜰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나. 그렇게 멤버 한 두 명이 유명해지고, 팀이 뜨기 시작하면 '대박'도 기대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성공 모델은 9인조로 데뷔한 소녀시대였다. 데뷔 초기부터 윤아는 드라마, 태연은 라디오, 티파니는 음악방송 MC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각자의 팬덤을 형성했다. 심지어 데뷔 초 태연 팬카페의 회원 수가 소녀시대 전체 팬카페 회원 수보다 많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A 기획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10명짜리 그룹이 있고, 멤버 각각 1,000명의 팬을 확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그 그룹은 곧장 1만 명의 열렬한 지지층을 얻는 거잖아요.

‘소녀시대 2호선’ 이론이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멤버 한 명 한 명의 매력에 차례로 빠져 들다 보면 소녀시대 팬덤의 무한 순환 열차에 오르게 되고,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규모의 경제

경제학에서 말하는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봐도 다인조 걸그룹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규모의 경제란 생산량이 늘어남에 따라 단위당 생산 비용이 줄어드는 것을 뜻한다.

고속버스 한 대에 탄 승객이 10명이든 30명이든, 한 번 운행하는 데 드는 기름값과 통행료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더 많은 승객을 태울 때 1명당 운행 비용은 그만큼 감소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처음 자동차 공장을 세우려면 대규모 설비를 갖추는 데 많은 비용이 투입된다. 그런데 일단 공장을 짓고 나면 이후 자동차 생산량을 늘리는 데 들어가는 추가 비용은 크지 않다. 자동차를 1000대 생산할 때와 1만대 생산할 때, 1대당 생산비용은 오히려 1만대를 만들 때 훨씬 적게 든다.

이를 걸그룹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일단 기본 질문. 멤버 수가 많을수록 소속사가 지출하는 비용이 늘어날까? 물론이다. 그러나 멤버가 N명 많아질 때마다 비용이 그에 비례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B 기획사의 한 이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4인조 걸그룹을 준비 중이라고 할까요? 네 사람 숙소로 방 2개짜리 빌라를 구하는 것이 보통이에요. 그러다가 6인조로 계획이 바뀌어 2명을 충원하면 어떨까요? 숙소를 새로 구하기보다는 원래 빌라에 2층 침대를 들이고 방 하나를 3명이 나눠 쓸거예요. 늘어난 두 사람 분의 식비, 전기세나 수도세 등 생활비는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니고요.

멤버 수와 상관 없이 한 걸그룹이 데뷔하기까지 드는 고정비용, 즉 앨범과 뮤직비디오 제작비, 홍보비가 몇십 배는 크기 때문이다.

멤버 1명이 늘어날 때마다 드는 추가 비용보다 기대 수익이 더 빠르게 커졌다. 이를 고려하면 멤버 수를 늘려서 ‘대박’ 날 가능성을 키우는 쪽이 현명하지 않을까. 그게 2~3세대 걸그룹 시대의 전략이었다.

4세대 걸그룹, 전략의 전환

그렇다면 4세대 걸그룹은 왜 이런 장점들을 버리고 규모를 줄인 것일까.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① 소수 정예-명품 전략

6~7년 전만 해도 기획사들을 만나면 다들 "트와이스 같은 그룹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소녀시대를 잇는 가장 완벽한 걸그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블랙핑크 같은 그룹을 만들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 4세대 걸그룹의 이상적 모델은 블랙핑크다. 멤버는 불과 4명. 네 명 모두가 글로벌 초셀럽이다.

제니는 샤넬, 로제는 이브생로랑과 티파니, 리사는 셀린느와 불가리, 지수는 디올과 까르띠에의 글로벌 앰버서더로 활약 중이다. 거기에 모두 싱글 음반을 내서 미국 빌보드 차트에 오를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예전 같으면 걸그룹 한 팀이 이룩할 성과를 멤버 전원이 각자 내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바라봄직한 아름다운 결과다. 하지만 멤버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성공시키려면 멤버 각각의 역량 수준을 특출나게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려면 육성부터 홍보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은 물론이고 막대한 금전적 투자도 필요하다.

10인조 걸그룹에서 이게 가능할까. 아마 10명을 이런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준비만 하다가 데뷔 시기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

2~3세대 걸그룹 기획자들도 멤버 전원이 S급이면 좋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멤버 7~10명 중 1~2명만 노래를 잘하면, 다른 멤버들은 춤 또는 랩을 맡으면 됐다. 상큼하고 예쁜 소녀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는 것만으로도 시장에서 먹혔다.

하지만 이제 K-POP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대중의 기대치도 올라갔다. 한일 걸그룹 오디션 '프로듀스 48'에서는 한국 연습생과 일본 현역 걸그룹 멤버가 경쟁했는데 한국 연습생 수준이 더 높았다. 그런 실력을 갖추고도 데뷔하기가 어려운 것이 지금의 K-POP이다.

적당히 준비된 10명을 데뷔시키고, 그 중 1~2명이 예능에 나와서 웃고 떠들어서 팀을 띄우는 시대는 지났다. 블랙핑크처럼 멤버 전원이 명품이 되지 않는 이상, 주목받기가 어려워졌다.

그 결과 3세대 걸그룹 평균 멤버 수는 8.4명이었는데, 4세대에서는 6.5명으로 줄었다. 한 마디로 소수 정예 명품을 내세우는 시장이 된 것이다.

매년 데뷔하는 걸그룹은 2014년 37개 팀으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드는 추세다.

같은 맥락에서 매년 데뷔하는 걸그룹 수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걸그룹 데뷔 팀의 수는 2007년 10개 팀에서 점점 많아져 2014년 37개 팀으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후 감소 추세에 접어들어 2022년에는 25개 팀이 데뷔했다. 물론 25개 팀도 적지 않은 수지만, 준비가 철저한 걸그룹만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②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

5일 큐브엔터테인먼트는 소속 아티스트 서수진과의 전속계약이 해지됐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2월 학폭 의혹으로 활동을 중단한 지 약 1년만의 일이다. 지난해 2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수진을 학폭 가해자로 지목한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피해자의 언니라고 밝힌 작성자는 자신이 목격자이고 증인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며 수진의 악행을 폭로했다. -스포츠월드, 2022년 3월 6일

여기서 해당 사건의 진실 공방을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해 몇년간 주가를 올리고 있던 걸그룹 (여자)아이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멤버 간 왕따 논란이 일었던 AOA의 사례도 있다. 당시 멤버 중 한 명이 왕따 문제를 호소하자, 팬들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수사는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AOA는 얼마 못 가 사실상 해체됐다.

사회적 공정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연예인들의 학교 폭력이나 왕따 논란은 팀의 존폐를 좌우하는 문제가 됐다. 이런 분위기는 4세대 걸그룹이 한창 만들어지던 시기 확산됐고, 그룹별 멤버 수에도 영향을 끼쳤다.

기획사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리스크를 줄여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멤버 수를 줄이는 방법이었다. 멤버가 많을수록 리스크도 커지니, 차라리 '확실한' 소수만 데뷔시키는 편이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체계적인 관리가 어려운 중소형 기획사일수록 더욱 그렇다.

작년에 데뷔한 한 걸그룹 기획사 이사는 “1차적으로는 연습생 본인에게 확인하지만 학교 친구들을 통해서 평판조회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데뷔조로 키우던 5명 중 2명에게 문제가 발견되어서 결국 그 데뷔조를 해체하고 새로 다른 팀을 만들어서 데뷔시켰다”고 말했다.

정말 미래가 촉망되는 연습생을 애지중지 키웠는데, 데뷔를 앞두고 ‘학폭’ 과거가 확인됐으니 기획사 입장에서는 땅을 칠 일이다.

그래서 아예 어린 나이에 데뷔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정말 보석 같은 연습생이라면 일찌감치 노출시켜 논란 가능성을 차단하자는 것이다. 지나친 감도 있지만 어쨌든 주목받으면 사고를 칠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아이브의 장원영은 2018년 '프로듀스48'로 데뷔했는데 당시 나이는 고작 14세였다. 이쯤 되면 소속사에서 장원영을 얼마나 아꼈는지가 느껴진다.

K-POP이 언제까지 승승장구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4세대 걸그룹이 마지막일지, 5세대 걸그룹이 나오면서 새로운 질서가 생성될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4세대 걸그룹은 변화하는 시장의 요구에 발맞추려는 K-POP 기획사의 노력이 가져온 산물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멤버 수는 줄었지만, 각자의 실력은 더 향상됐고, 이들이 빚어내는 합에 세계 시장은 열광하고 있다.

Data 김종민 님(바이브컴퍼니) 제공


Edit 정경화 Graphic 이은호 엄선희

유성운 에디터 이미지
유성운

대학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1997년 11월, TV에서 본 SES의 I'm your girl 데뷔 무대는 강렬한 문화 충격이었다. 이후 25년간 줄곧 K걸그룹을 좋아했으며, 걸그룹과 경제학의 관계를 데이터로 들여다보는 글을 썼다. 2017년 책 '걸그룹 경제학'을 공저했다.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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