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유’같은 트와이스 vs. ‘레알’처럼 블랙핑크
ㆍby 유성운
걸그룹 이코노믹스 3화. 두 걸그룹의 성장 전략으로 알아보는 ‘낙수 효과’와 '분수 효과'
"얼마 전에 tvN 모 예능에 트와이스 멤버 중 한 명을 사회자로 쓰고 싶다는 섭외가 들어왔어요."
"오, 잘됐네요. 저도 그 프로그램 몇 번 봤어요."
"그런데 안 하기로 했어요."
"왜죠? 그 프로그램 인기 많던데요."
"왜냐하면 트와이스는 절대로 개별 활동을 허락하지 않거든요."
4년 전 JYP 관계자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으로 귀에 박혔던 말이다. 그는 '절대로'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보니 정말 그랬다. 당시 트와이스는 소녀시대 이후 가장 성공한 걸그룹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트와이스 멤버 9명 중 누구도 연기자나 DJ로 활동하고 있지 않았다.
소녀시대 데뷔 직후 윤아는 KBS 일일 연속극 '너는 내운명'에서 새벽이로, 태연은 MBC 라디오 '친한친구' DJ로 활약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것은 신생팀이었던 소녀시대가 정상급 아이돌 그룹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JYP는 왜 트와이스 멤버들에게 이런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일까?
JYP의 ‘아픈 손가락’ 미쓰에이
지금은 흐릿해진 존재가 됐지만, 데뷔 당시 임팩트만 놓고 보면 미쓰에이(miss A)를 능가할 걸그룹이 많지 않다. 내 기억으로는 SES, 소녀시대, 2NE1, 뉴진스 정도가 필적할 듯 싶다. 미쓰에이는 굉장한 팀이었다. 2010년 ‘Bad Girl Good Girl’로 데뷔 21일 만에 지상파 인기순위 1위를 차지했으며, 멜론 차트 1위 석권, 데뷔 후 최단 기간 대상 수상 등 데뷔 첫 해에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모든 활동이 수지에게 집중되면서 페이, 민, 지아 등 나머지 멤버들이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다. 수지가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며 영화, 드라마, CF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나머지 멤버들에 대한 주목도는 그에 반비례했다. 불화설, 왕따설이 돌기 시작했고, 2015년 이후론 음원도 발표되지 않더니 2016년에 지아가, 그 이듬해 민이 탈퇴했다. 미쓰에이는 2017년 12월 공식 해체했다.
수지는 최근에도 넷플릭스 시리즈 ‘이두나!’를 통해 건재함을 알렸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사실상 활동을 접은 상태다. 가요계에는 미쓰에이가 잠재력을 제대로 펼쳐볼 기회도 얻지 못하고 팀으로서 저평가 받았다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많다.
낙수 효과 기대한 걸그룹
인기 멤버 1명에 ‘올인’하는 방식은 2~3세대 걸그룹 사이에 널리 퍼진 성장 전략이었다. 대개 센터 역할을 맡은 멤버를 여기저기 출연시키며 팀 전체의 인지도를 끌어올린 것이다. 제각각 사정이 다르지만 그 원리는 비슷했다. 경제 용어로 바꾸면 바로 ‘낙수 효과 (Trickle-down effect)’를 기대했다.
낙수 효과는 대기업이나 부유층이 돈을 잘 벌면 사회 전반에 돈을 많이 쓰기 때문에 경기를 부양하고, 나라 전체의 GDP가 증가하면서 저소득층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개념이다. 즉, 부유층이 돈을 잘 쓰도록 도와주면 양극화가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 미국 제31대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의 재임기(1929. 3~1933.3)였다. 선거 유세를 다닐 때 후버는 “모든 차고에 자가용을! 모든 냄비에는 닭고기를!(A chicken in every pot, a car in every garage)”이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하필 그가 당선된 1929년 미국은 지독한 대공황에 빠져 들었다.
불과 2년 만에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식 가치는 공황 전과 비교해 5분의 1로 감소했고, 은행 5,000여 곳이 파산했으며 실업률은 24.9%로 치솟았다. ‘경제 대통령’을 기치로 내걸었던 후버 입장에서는 퍽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후버 정부는 대공황을 극복해보려고 기업에 특혜를 주는 등 몇 가지 경제 정책을 내놨는데 평가는 혹독했다. 당시 유명 작가였던 윌 로저스가 “상류층 손에 넘어간 모든 돈이 부디 빈민들에게도 낙수되기(trickle down)를 고대한다”고 말하면서 처음으로 ‘낙수 효과’라는 용어가 알려졌다. (사실 로저스는 비꼬는 말이었다고 한다.)
낙수 효과는 이어 1980년대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사로잡았다. 신자유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레이건은 낙수 효과를 근거로 법인세 인하 등 기업의 부담을 줄여 고용을 증대시킨다는 정책을 펼쳤다. 미국에서는 이를 레이건과 이코노믹스(Economics)를 합쳐 ‘레이거노믹스’라고 부른다. 낙수 효과는 국가 전체의 부를 증대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기본적으로는 분배보다는 성장, 형평성보다는 효율성에 우선가치를 두었다.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 총리가 비슷한 정책을 펼쳤고 ‘아베노믹스’라고 불렸다.
국내 걸그룹 가운데 미쓰에이 외에도 AOA, 애프터스쿨 등이 각각 설현과 유이에 ‘올인'하는 낙수효과 전략을 썼다. 기획사 입장에서도 불가피한 측면은 있다. 매년 걸그룹이 쏟아져 나오지만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실상 개점 휴업이나 마찬가지다. 기획사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1명이라도 이름을 알려야 그나마 그룹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중소 기획사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 심하다.
한편 경제학계에서는 낙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호주의 경제학자 존 퀴긴은 <경제학의 5가지 유령들>이라는 책을 통해 “낙수 효과는 경제 성과 측면에서는 별로 기여한 일이 없지만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데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지적한다.
실제 경제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미쓰에이의 사례를 본다면 걸그룹 세계에서는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낙수 효과에 기댔던 걸그룹 중에는 성과를 떠나 멤버들 간의 불화를 빚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같이 고생했는데 1명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그 스트레스가 적잖았을 것이다.
JYP의 각성과 트와이스의 분수 효과
어쨌든 미쓰에이를 통해 JYP는 확실한 교훈을 얻었고, 그 결과가 트와이스의 개별 활동 ‘절대' 금지였다. 아무리 쯔위처럼 인기가 많고, 다현처럼 끼가 넘쳐도 팀 전체가 출연하는 것이 아니면 개별 활동에 나서지 않도록 관리했다. 멤버 전체가 고루고루 인기를 얻어야 결국 팀의 기반이 탄탄해지고 롱런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분수 효과(fountain effect)’에 빗댈 수 있다. 분수 효과는 아래로부터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가 전체를 적시는 것처럼, 중산층과 서민에 유리한 정책으로 소비를 증진시켜 국가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개념으로 ‘낙수 효과’의 대척점에 서있다.
JYP의 분수 효과 전략은 성과를 거뒀다. 트와이스는 한국과 일본에서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는 한편 데뷔 이래 9년째 단 한 명의 멤버도 이탈하지 않았다. 멤버 간 불화설도 없었다. 최근에서야 지효, 나연 등 일부 멤버들이 솔로 활동을 시작했고, 미나·모모·사나 등 일본인 멤버들은 유닛을 꾸렸다. 2015년 데뷔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늦은 개별 활동이다.
트와이스와는 다른 분수 효과, 블랙핑크
낙수효과 전략의 실패는 이후 여러 기획사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원래 축구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말이지만 걸그룹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등장한 걸그룹은 대체로 낙수효과보다는 분수 효과 전략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블랙핑크를 비롯해 뉴진스, 르세라핌, 아이브 등은 한두명이 아니라 멤버 골고루 인기를 얻고 있고, 이는 전략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경제 전문가들도 개발도상국 기간에는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전략이 어느 정도 낙수 효과를 낼 수 있지만 국가 경제가 일정 궤도에 오른 뒤에는 분수 효과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낙수 효과라는 건 특수한 경우 ‘반짝 성장’이 필요한 경우에 국한된다는 이야기다. K팝 시장과 걸그룹 역시 거듭 성장한 끝에 이전 시대보다 탄탄해졌다. 멤버들의 개인 기량도 과거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블랙핑크는 분수 효과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블랙핑크는 튀는 개인을 억눌러 한 팀으로 살아남기보다 멤버 개개인을 모두 스타로 만들어 팀의 인기를 더 높이는 방식을 썼다. 결과는 대성공. 지수, 리사, 로제, 제니는 모두 그룹 활동 뿐 아니라 솔로곡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2021년 리사의 첫 솔로 앨범 ‘라리사'의 수록곡 ‘머니'는 스포티파이에서 스트리밍 10억번을 넘기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멤버 넷은 각각 디올, 셀린느, 생로랑, 샤넬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앰버서더로서도 사랑받고 있다. 말 그대로 4인 4색이다.
그러니까 축구에 비유하자면, 트와이스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 시절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면 블랙핑크는 갈락티코 시절의 레알 마드리드다. 2000년대 중반 레알 마드리드는 지단, 호나우두, 베컴, 피구 등 각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 스타를 끌어모으는 방식으로 축구계를 지배했다. 베컴이 축구 선수 이상의 셀럽이 되자 그를 팀에서 내보낸 퍼거슨 감독과는 정반대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두 클럽 모두 승승장구하며 좋은 성적을 냈으니, 뭐가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트와이스와 블랙핑크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걸그룹 하나 이상의 파워
그런데 두 그룹은 재계약 시점에 다다라 180도 다른 길을 걷게 됐다. 트와이스는 데뷔 7년차인 2022년 전원 재계약에 성공했다. 관련한 어떤 잡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 11월 현재 블랙핑크는 재계약에 난항을 겪고 있다. 기존 계약 만료시점이 8월이니 이미 3개월이 지났다. ‘리사가 재계약을 거부했다’ ‘로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재계약에 실패했다’ ‘누가 1인 기획사를 차렸다더라' 등 소문만 무성하다.
블랙핑크 멤버 개개인이 이미 걸그룹 하나 이상의 파워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 문제다. 예를 들어 리사 개인 유튜브 채널인 리리필름(Lilifilm)은 동영상이 25개에 불과한데도 구독자가 1140만명이다. 트와이스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1640만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다.
그러니 블랙핑크 멤버들이 재계약에 소극적인 점도 이해는 된다. 덕분에 YG엔터테인먼트에 투자한 나의 주식 계좌는 지금 온난화 시대의 북극 빙하처럼 녹아내리고 있다.
Data 바이브컴퍼니 김종민 Edit 정경화 Graphic 이은호 함영범
대학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1997년 11월, TV에서 본 SES의 I'm your girl 데뷔 무대는 강렬한 문화 충격이었다. 이후 25년간 줄곧 K걸그룹을 좋아했으며, 걸그룹과 경제학의 관계를 데이터로 들여다보는 글을 썼다. 2017년 책 '걸그룹 경제학'을 공저했다. 중앙일보 기자.
필진 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