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브의 ‘After LIKE’가 채 3분이 안되는 이유
ㆍby 유성운
걸그룹 이코노믹스 4화. ‘1곡=4분’이라는 공식은 깨졌다
X세대 담론이 시작되던 1992년, 그룹 015B가 발표한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라는 곡이 큰 인기를 끌었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아름답고 애틋한 단어들로 포장하던 이전 세대 노래들과 달리 직설적이고 담백한 화법으로 풀어간 가사가 "역시 X세대"라는 반응을 얻었고, 각종 가요 차트의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이 노래가 정말 특이하게 느껴졌던 점은 무려 1분 넘게 이어지는 전주였다. 노래가 시작되고 정확히 1분 20초 동안 키보드와 기타, 드럼 연주 소리만 나온다. 파격적인 시도가 높이 평가받던 90년대에도 굉장히 특이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처음엔 음반기획사 대표는 이렇게 긴 전주에 반대했다고 한다. 015B 멤버들의 고집으로 강행된 것인데 결과는 대박이었으니 '자본에 맞선 아티스트의 고집이 만든 빛나는 승리'랄까. 스스로 연습해 실력을 갖춘 이른바 싱어송라이터들의 황금시대였고, 아티스트들의 발언권이 강했기에 가능했던 얘기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노래가 요즘 나왔다면 어땠을까?
the shorter, the better
아이브의 ‘After Like’는 재생 5초 만에 "또 모르지. 내 마음이 저 날씨처럼 바뀔지"하며 가사가 시작된다. 35초만에 후렴으로 들어가고, 53초면 1절이 마무리 된다. 앞에서 본 '아주 오래된 연인들'에서는 아직 전주가 흘러나오는 시간이다.
‘After Like’의 총 길이는 2분57초.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4분 17초에 비하면 1분 20초 가량 짧다. ‘After Like’ 만이 아니다. (여자)아이들의 '톰보이', 아이브의 '러브 다이브', 블랙핑크 ‘Shut Down’ 모두 3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동안의 노래가 나름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췄다면 이제 대부분 '기'는 건너뛰고 바로 '승-전-결'이 진행된다. 노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데이터가 명확히 보여준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카라가 등장해 2세대 걸그룹의 막을 연 2007년부터 2023년까지 연도별 걸그룹 노래 평균 재생 시간을 비교해봤다. 그 결과 2007년 3분54초였던 걸그룹 노래들은 차츰 짧아져 2015년 3분 27초가 됐고, 2023년에는 3분 5초로 줄었다.
데이터는 멜론차트에서 그 해 Top10안에 들어간 걸그룹 곡만을 대상으로 비교했다. 즉 대중에게 인기를 모았던 노래들의 시간이 짧아진 것이고, 대중들이 시간이 갈수록 짧은 노래를 좋아하게 됐다고도 볼 수 있다.
걸그룹 별로 나누어 봐도 마찬가지다. 2세대 대표 걸그룹인 소녀시대 곡들의 평균 길이는 3분 46초였지만, 3세대 트와이스는 3분 22초였고, 4세대 아이브는 딱 3분이었다.
30초 전쟁
4년 전 나영석 PD가 내놓은 ‘금요일 금요일 밤에'라는 예능 프로그램은 15분 짜리 짧은 콘텐츠 6개를 한 바구니 안에 담은 파격적 구성이었다. 어쩌다 그런 구성을 구상하게 됐냐고 물었다. 그는 “어느날 ‘신서유기'에 대해 시청자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본방송이 아닌 방송 클립을 보는 분들이 많더라. 시청자가 10분 보고 다른 일을 하다가 또 10분 보는 패턴을 가졌다면, 제작자가 거기에 맞춰야 하지 않겠나"라고 대답했다.
얼마 전에는 점심 시간 유튜브로 MBC 사극 '연인'을 보고 있는 후배에게 "밥 먹고 드라마까지 볼 시간이 되냐"고 물었다. "20분짜리 요약본으로 보기 때문에 충분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제 회당 30분 넘는 드라마는 지루하다"고 했다.
전달 기술과 플랫폼이 발달할수록 모든 형식의 콘텐츠가 확실히 짧아지고 있다. 노래 길이도 마찬가지다.
가요 한 곡의 길이는 오랫동안 4분 내외로 인식돼 왔다. 그건 20세기 대중음악 확산에 기여한 축음기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 1887년 미국의 에밀 베를리너가 처음 레코드판을 만들었을 때 한 면에 4분 정도의 용량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레코드판 양면을 합쳐 4분 길이 노래 2곡이 들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이런 방식은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됐고 '1곡=4분'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그동안 카세트테이프, CD, MP3, 스트리밍 등으로 노래를 듣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가장 익숙한 길이는 여전히 4분 안팎이었다.
하지만 현재, K-Pop의 주 소비자인 10~20대에게는 틱톡과 같은 숏폼(Short-form)이 가장 자연스러운 콘텐츠고, 이들에게 전주를 몇 초 더 들려주는 건 사치가 됐다. 아이브의 ‘After Like’처럼 3초 만에 가사가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변화다.
가요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K-Pop이 짧아지는 현상은 2000년대 후반부터 나타났다. 바로 유료 음원 서비스가 시장에 정착하면서다. 음원 사이트는 대개 1분까지 미리듣기를 무료로 제공하는데, 그러다보니 제작자들이 1분 안에 클라이맥스까지 집어넣느라 곡이 압축됐다는 설명이다.
여기에는 돈 문제도 걸려있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는 가입자에게 일정한 월 구독료를 받는데, 구독료는 청취 수에 따라 아티스트들에게 일정 비율 배분된다. 그런데 어떤 음원이든 30초 이상을 들어야 1회 재생으로 인정된다. 즉, 30초 이상 귀를 잡아끌어야 비로소 아티스트의 지갑에 돈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노래의 도입부는 원래 중요했지만, 그 중요도가 훨씬 올라갔다. 기억하기 쉽고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가 더 빨리 나와야 한다. '30초 전쟁'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주 오래된 연인들'처럼 1분 20초 동안 전주만 나오면? 당연히 스킵이다.
‘1곡=4분'이라는 공식을 만든 것도 깬 것도 모두 기술 혁신에 따른 변화인 셈이다.
무대 완성도가 중요한 K-POP
노래가 짧아진 데에는 K-POP 장르 특유의 구조도 반영됐다. 바로 ‘안무’의 중요성이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K-POP에 대한 눈높이가 워낙 높아 무대 완성도에 정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안무가 정말 중요한데 노래 길이가 짧으면 아무래도 무대 완성도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K-POP이 해외 시장에서 주목을 받았을 때 가장 돋보인 점이 '칼군무'였다. 적게는 4명에서 많을 땐 15명에 달하는 구성원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안무를 맞추는 것에 놀란 것. 안무만으로도 숨을 헐떡일 판인데 노래까지 소화하니 K-POP을 경이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활동량 많은 안무를 기본으로 하는 K-POP 가수들 입장에서는 노래 길이가 짧을수록 더 안정된 호흡을 바탕으로 노래와 안무에 신경을 쓸 수 있다.
또 하나, 4세대 걸그룹에서 멤버 수가 줄어든 현상과도 무관치 않다. 에스파(4명), 르세라핌(5명), 뉴진스(5명)처럼 4~5명으로 구성된 걸그룹이기에 3분 남짓한 노래도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멤버 수가 8~13명인 소녀시대, 트와이스, I.O.I, 우주소녀의 노래가 이렇게 짧았다면 멤버들이 한 소절도 혼자 부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갈수록 노래가 짧아지는 상황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과거 2세대 걸그룹 포미닛(4minute)의 이름은 '4분 안에 각자의 매력으로 사로 잡겠다'는 의미였는데, 이제 포미닛은 사치다. 올해 새로 나온다면 투미닛(2minute)이 적당하지 않을까.
Data 바이브컴퍼니 김종민 님
Graphic 이은호・허유진
대학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1997년 11월, TV에서 본 SES의 I'm your girl 데뷔 무대는 강렬한 문화 충격이었다. 이후 25년간 줄곧 K걸그룹을 좋아했으며, 걸그룹과 경제학의 관계를 데이터로 들여다보는 글을 썼다. 2017년 책 '걸그룹 경제학'을 공저했다.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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