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쇼맨⟩, 오늘의 운세와 재테크 팁의 공통점은?
ㆍby 박병률
무려 180여 년 전에 자신의 직업을 ‘쇼맨’이라고 밝힌 남자가 있다. 고단했던 산업 혁명의 시대, 일에 찌든 사람들에게 웃음을 찾아주고 돈을 번다는 발상에 은행은 그저 “무모해서 대출 불가”라는 답만 주던 시절이었다. “땅콩을 판다(싸구려 볼거리를 제공한다)”며 무시하는 상류층의 비웃음 앞에서도 그는 자신이 쇼맨임을 자랑스러워했다.
“당신이 팔아 먹는 건 다 가짜잖아요?” “이 미소도 가짜 같습니까? 관객이 느끼는 즐거움은 진짭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혹평하는 비평가 앞에서도 늘 당당하던 그의 이름은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 이하 바넘). 미국 쇼 비즈니스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바넘과 스타트업 CEO의 평행 세계
화려한 앙상블이 돋보이는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시대를 열어젖힌 바넘의 인생을 모티브로 했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넘은 열정적인 구애 끝에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쟁취했으나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다. 다행히 그에게는 특기가 있다. 풍부한 상상력과 이를 스토리텔링으로 엮는 능력이다.
바넘은 1841년 뉴욕 브로드웨이의 한 모퉁에 있는 허물어져 가는 박물관을 인수한다. 그리고는 ‘바넘의 아메리칸 뮤지엄’이라는 간판을 단다. 바넘은 이곳에서 기괴한 것을 대중에 보여주는 ‘프릭쇼(freak show)’를 시작한다. 왜소인, 턱수염이 난 여인, 키가 엄청 큰 남자, 온몸에 문신을 한 사나이, 공중곡예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프릭쇼는 그에게 흥행과 비난을 동시에 안겨준다.
수많은 윤리적·도덕적 논쟁과 함께 저질, 사기꾼이라는 비난에도 개의치 않던 바넘이지만 B급 연출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만은 분명했다. 그는 촉망받는 주류 연출가인 칼라일을 영입하고, 스웨덴의 유명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의 미국 전국 투어를 성사시킨다. 마침내 상류층 관객의 기립 박수를 받는 바넘. 그는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있을까. *멘델스존, 쇼팽, 슈만 등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19세기 소프라노 가수로 스웨덴 화폐에도 등장한다.
이제 와 돌아보면 바넘의 삶은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청년 CEO들과 빼닮았다. 그는 오로지 열정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맨손으로 새로운 영역의 비즈니스에 뛰어든다. 성공은 쉽지 않았다. 미국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을 잔뜩 가져다 놓으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박물관을 단두대, 밀랍으로 만든 나폴레옹, 아프리카 기린, 코끼리 박제 등으로 채웠다. 하지만 박물관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라면 파산이 불가피한 상황. 집으로 돌아가서도 표정이 어두운 그에게 어린 두 딸이 힌트를 준다.
“박물관에 죽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맞아요. 살아 있는 것도 필요해요. 인형 말고 인어나 유니콘 같은 거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바넘의 머릿속을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다. 그는 왜소인 가정을 찾는다. “공연을 준비 중이네. 우리 쇼에 나와주지 않겠나?”
피봇팅으로 박물관을 살리다
살아 있는 사람과 동물로 볼거리를 바꾼 박물관의 진귀한 풍경은 마침내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넘의 이런 경영 전략을 ‘피봇팅’이라고 부른다. 피봇팅(pivoting)은 원래 ‘축을 옮기다’라는 뜻의 스포츠 용어로 몸 중심축을 한쪽 발에서 다른 쪽 발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농구나 축구, 아이스하키에서 공격수들이 피봇팅 기술을 이용해 수비수를 따돌린다. 경제학에서 피봇팅은 기존의 사업 아이템이나 사업 모델을 다른 아이템이나 모델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업 방향 전환’ 정도로 해석하면 자연스럽다. 다만 기존 사업을 접고 완전히 다른 사업을 하는 업종 전환이 아니고, 기존 사업을 유지하면서 수익을 내기 위해 방향을 살짝 트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대리점으로 여행 상품을 팔던 사업자가 온라인으로 상품 판매 채널을 바꾼다면 피봇팅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날로그 사업을 하던 기업들이 디지털 사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디지털 피봇팅’이라 부르기도 한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피봇팅은 흔한 전략이다. 스타트업은 사업 모델이 무르익지 않아 벽을 만나는 일이 허다한데, 이때 발 빠르게 방향을 전환해 탈출구를 찾는 것이다. 넷플릭스는 원래 비디오테이프 대여업을 하다가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바꿔 대박을 냈다. 배달의민족도 처음에는 모바일 전화부 사업을 하다가 배달 플랫폼으로 전환해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스포츠에서 피봇팅을 잘하려면 축이 되는 발의 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경영에서도 성공적인 피봇팅을 하려면 축이 되는 본업에 대한 탄탄한 이해는 기본이다.
피봇팅에 성공한 바넘은 또다시 벽에 부딪치고 만다. 사기꾼이라는 딱지는 좀처럼 뗄 수 없었고 상류층은 여전히 자신을 비난한다.
“상류층을 공략하고 싶소.”
바넘은 수익의 10%를 주는 조건으로 촉망받는 연극인이자 연출가인 필립 칼라일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칼라일은 바넘의 서커스 단원들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소개하며 상류 사회에 노크한다. 바넘이 이때 연회에서 제니 린드를 만나는 것은 또 한 번의 결정적 한 수. 제니 린드의 미국 순회 공연이 성공하면서 바넘의 사업은 상류층까지 확대된다. 이른바 스케일 업(scale up)이 된 것이다. 스케일 업이란 규모(scale)를 확대(up)한다는 뜻으로 사업의 영역이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을 뜻한다. 최근에는 스타트업 중 빠르게 성장한 벤처 기업을 스케일 업했다고 말한다.
바넘 효과, 오늘의 운세와 재테크 팁의 공통점?
“가장 고귀한 예술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위대한 쇼맨⟩에도 인용된 실제 바넘의 말로, 쇼에 대한 그의 철학은 명확했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직접 무대에도 섰으며, 자신에게 독심술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대로 관객들을 불러낸 뒤 그들의 성격을 줄줄 읊었다. 관객들은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바넘이 숨겨진 성격을 속속 맞추는 것을 신기해하며 마술이라고 생각했다.
1940년대 말 미국의 심리학자 버트럼 포러(Bertram Forer)는 바넘이 부리는 마술의 비밀을 풀어냈다. 포러는 학생들에게 각각의 성격을 테스트한 뒤, 진단서를 보고 0점(전혀 맞지 않음)부터 5점(아주 정확함)으로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는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내용의 진단 결과를 돌렸다. ‘당신은 겉으로는 자신감에 넘치지지만 실제로는 소심하다’, ‘당신은 가끔씩 말도 안 되는 공상에 빠질 때가 있다’, ‘당신은 때때로 덤벙대다 실수를 많이 한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딱 내 얘기”라며 평균 4점이 넘는 점수를 줬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바넘이 이런 심리를 잘 이용했다는 것에 착안해 이를 ‘바넘 효과’라 부른다. 또 심리학에서는 포러가 이를 과학적으로 처음 증명했다며 ‘포러 효과’라고도 부른다.
토정비결이나 사주, 혈액형 심리학, 별자리 운세 등은 바넘 효과를 잘 이용한다. ‘분주하지만 실속이 없다’,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침착하게 처신하라’ 같은 말은 딱 내 얘기로 들리기 좋다. 요즘은 MBTI를 신봉하는 현상에서도 바넘 효과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그리고 바넘 효과는 마음이나 상황이 힘들수록 강하게 작용하는 특성도 있다. “도를 아십니까”라며 접근하더니 “얼굴에 근심이 끼어 있다”고 하면 진짜로 큰 근심에 잠겨 있던 사람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속내를 간파당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에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고수들이 전해주는 주식, 부동산, 재테크 팁들도 바넘 효과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잘 아는 종목에 들어가라’ ‘멀리 보고 가치 투자를 하라’ 같은 조언은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투자 원칙이지만 조급하게 움직이다 번번이 투자에 실패한 내 얘기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바넘도 ⟪돈 버는 법 20가지⟫라는 책을 썼다. 많은 미국인들이 머리맡에 두고 잤다는 이 책이 말하는 부자 되는 비법은 뭘까? ‘빚을 지지 마라’, ‘끈기를 가져라’, ‘무슨 일이건 최선을 다하라’, ‘내 자리에서 최고가 돼라’, ‘남에게 베풀어라’, ‘고객에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하라’, ‘친구라도 담보 없이는 보증 서지 마라’, ‘신문을 읽어라’, ‘희망을 가지되 지나친 공상은 피하라’, ‘유용한 기술을 배워라’ 등이다. 무림 고수의 비법은 따로 있지 않았다.
바넘 효과는 기업의 인력 관리에도 적용된다. 매니지먼트 전문가 완자오양이 쓴 ⟪일잘러의 무기가 되는 심리학⟫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섭섭하지 않게 보상하겠다’, ‘당신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인재다’처럼 회사가 모든 직원에게 건네는 상투적인 칭찬이 바넘 효과를 이용한 심리 기술로 등장한다. 이런 칭찬만으로도 직원의 어깨는 으쓱해지고, 더 열심히 일하고픈 동기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회사는 신경을 마비시키는 몇 마디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 더 높은 노동생산성을 끌어낼 수 있다. 완자오양은 이를 ‘바넘의 함정’이라고 표현했다.
서커스의 고객 감동 서비스는 100년이 넘도록
인터넷에서 바넘을 검색하면 그의 직업은 쇼맨이면서 저자, 출판업자, 정치가, 그리고 자선사업가라고 나온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스케일 업했다. 여러 직업 중에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서커스였다. 1871년 시작한 ‘바넘&베일리 서커스’는 지상 최고의 쇼라고 일컬어지며 크게 성장했고, 링링 브라더스에 인수 합병된 1919년부터는 ‘링링 브라더스와 바넘&베일리(Ringling Bros. and Barnum&Bailey) 서커스’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이들은 146년 동안 공연하다가 2017년 5월 공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우리 역사와 비교하면 조선의 고종 9년부터 문재인 대통령 취임까지의 시기다.
영화 ⟨위대한 쇼맨⟩은 팩션이다. 바넘의 생애를 뼈대로 하지만 스토리 전개의 상당 부분은 픽션을 섞었다. 실제로 그의 삶이 파격적이고 드라마틱했던 만큼 평가도 엇갈린다. 돈을 벌기 위해 장애인과 흑인, 동물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는데, 이들에게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해줬으며 인종적 학대를 하지 않았다는 반박도 있다. 바넘은 링컨의 노예 해방을 지지하며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꾸기도 했다. 때문에 영화 또한 ‘바넘을 너무 미화했다’는 불편한 시각과 ‘쇼 비즈니스를 만든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긍정적 시각이 공존한다.
휴 잭맨이 주연한 ⟨위대한 쇼맨⟩은 음악과 화려한 볼거리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이런저런 논란은 사가들에게 맡기고 영화 OST인 ⟨This is me⟩, ⟨Never enough⟩, ⟨The Greatest Show⟩ 등을 즐겨보자. 속이 뻥 뚫리면서 눈과 귀가 충분히 행복해졌다면 됐다. 그것이 바로 바넘의 쇼 철학이었으니까.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비즈니스의 시작과 끝은 고객과 함께다”라고 말했다. 고객 감동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던 바넘은 100년을 앞서간 기업인이었다.
Edit 주소은 Graphic 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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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제부장. 공학 전공 후 경제부 기자가 되었을 때의 좌충우돌이 쉬운 정보 전달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경제라는 쓴 커피에 영화라는 연유를 넣어 달콤한 연유라떼를 내어놓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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