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가능할까?
ㆍby 사소한 질문들
운전을 하다 보면 지옥 같은 곳을 만날 때가 있다. 악마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빌딩 지하 주차장의 내리막길, 기둥과 기둥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커브 길을 만날 때면 이렇게 투덜거린다. ‘분명 운전 안 해본 놈이 설계했을 거야.’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기반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해 디테일을 잡아내기란 쉽지 않다. 좋은 접근성을 갖춘 서비스를 만드는 일, 또는 모두를 만족하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을 구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유니버설 디자인 *이란 성별, 나이, 장애, 언어 등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말한다. 공간, 제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은 올라갈 수 없는 계단 옆에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로 만들거나, 계단을 몇 단 올라야 했던 옛날 버스와 달리 휠체어 탄 사람도 편하게 탑승할 수 있는 요즘의 저상버스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 비슷한 개념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인클루시브 디자인(inclusive design)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통칭했다. – 편집자 주
온라인이나 모바일 영역에는 유니버설 디자인과 더불어 ‘접근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7년 6월, 버튼 하나 없는 애플의 첫 번째 아이폰 출시 소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장애인에게 청천벽력 같았다. 버튼의 위치를 손으로 만져가며 전화를 걸 방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접근성이 사라진 건 아니다. 애플의 음성인식 기술이 점점 좋아지면서 이제 아이폰은 오히려 시각장애인도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진화했고, 접근성도 나아졌다.
아이폰 시리(Siri)로 “보이스오버(VoiceOver) 켜줘”라고 말하면, 아이폰의 화면 읽기 도구가 바로 가동된다. 이 기능으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볼 수 있고, 셀카도 촬영할 수 있다. 셀카를 찍을 때면 “중앙에 위치한 얼굴”, “가장자리 왼편에 위치한 얼굴”이라고 안내한다. 모든 행동은 아이폰에 설정된 목소리가 친절히 설명해 준다. 이 기능을 만들 때 많은 시각장애인이 직접 참여했거나, 직원 중 시각장애인이 있는 게 분명할 정도다. 그렇지 않고서는 담아내기 힘든 디테일로 가득하다.
언어의 접근성을 높인 사례도 있다. 미국의 가구 브랜드 허먼밀러의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가구는 아직 자동화되기 어려운 영역인데, 의자는 특히 더 그렇다. 의자 하나를 만들려면 보통 수십 명의 사람이 라인에 붙어 20~30개의 공정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한다.
당시 미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생산직종에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많이 일하고 있었다. 그중 영어를 쓸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았는데, 허먼밀러의 생산라인에서는 이들을 위해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조립 방식을 전부 그림으로 풀어놨다. 누구든 이 라인에 들어오면, 화이트보드를 꼼꼼히 보고 조립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케아와 레고의 조립 설명서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에 같은 제품을 파는 두 기업의 설명서에서 글자가 거의 없다. 각 나라말로 텍스트를 표기하지 않은 까닭이 단순히 비용이 더 들거나 번거롭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접근성 관점에서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그림으로만 표현된 설명서를 보고 얼마든지 조립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요새 나오는 레고는 그림만 보고 만들기엔 너무 어렵지만… 이건 난이도의 문제다.)
유니버설 디자인 핵심은, 가능한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문턱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예 없앨 수 있다면 더욱 좋다. 누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렵고 힘들 수 있는 영역임을 인지하고, 발견하고, 그것을 쉽게 기능하도록 계속해서 바꾸어 나가는 일을 유니버설 디자인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나는 시각장애인이 아니고, 휠체어를 타지도 않는다.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의 감각을 상상할 수 있을 뿐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어설픈 이해와 공감은 오히려 이상한 결과물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어떤 불편한 상황에 대한 공감의 밀도가 짙어질수록, 좋은 서비스나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올라간다.
네이버에서 일할 때 <어둠속의 대화>라는 전시 공간*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적이 있다. 이 공간은 공원, 도로, 카페 등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구현해 놓고 완벽한 어둠으로 밀폐시킨다. 그러면 누구나 순식간에 시각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다. * 시각 장애를 경험할 수 있는 체험형 전시로 현재는 서울 북촌과 경기도 동탄에서 관람할 수 있다. 이 전시를 한국에 가져온 엔비전스는 2009년에 설립된 사회적 기업으로, 2012년부터 네이버의 접근성 개선 방안에 대한 자문을 제공 중이다. – 편집자 주
그곳에 들어가 앞을 더듬으며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하는데, 도움을 주는 가이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장애인이다. 이미 그 공간에 익숙해진 가이드가 관람객을 이끌고 간다. 어두운 공간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전봇대 같은 사물에 걸려 앞으로 가기 어려워지면 가이드가 나타나 친절하게 도움을 준다.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관람객은 뒤바뀐 입장에서 예상치 못한 불편함을 경험한다. 도로가 얼마나 위험한지, 사소한 소음이 얼마나 큰 공포를 주는지,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시각에 많이 의존하고 영향받고 있었는지 말이다.
당시 협업했던 와이즈건축의 장영철 소장은 무척 열의에 찬 분이었다. 안국역에서 북촌에 있는 <어둠속의 대화> 전시장까지 실제로 눈을 가리고 걸어가며 그곳에서 일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출퇴근을 할 때 어떤 환경인지 경험해 보고 싶어 했다. 그 경험은 시각장애인들이 일하는, 건물의 전시 공간 외 영역을 설계하는 데에도 반영됐다. 출근 동선은 손잡이만 잡고 가면 되도록, 내부는 지팡이 없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일반 관람객과의 동선도 명확히 구분했다.
협업하는 동안 의외의 사실들도 알게 됐다. 시각장애인 대부분은 시력이 전혀 없는 전맹(全盲)이 아니라, 매우 뿌옇게 보이는 수준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한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점자를 정밀하게 읽는 것은 시각장애인에게도 대단히 어렵고, 심지어 제품이 아닌 야외 공간에서 빠르게 점자를 인지하려면 꽤나 힘든 훈련이 필요하다고.
야외 공원의 지도, 건물의 내부 지도까지 우리는 열심히 점자를 넣지만 그것이 많은 시각장애인에게 생각보다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은 지폐를 구분할 때도 미세하게 있는 오돌토돌 반점을 인지하는 대신 지폐 크기로 인지하여 구분한다.
‘아, 나는 이 분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구나.’ 시각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다. <어둠속의 대화>는 그런 의미에서 좋은 서비스였다. 짧은 시간에 시각장애인의 입장을 강렬히 경험하고 그분들이 느낄 여러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한편 ‘제대로 된 유니버설 디자인’ 을 접하기 쉽지 않은 이유도 존재한다. 그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 돈과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굳이 이것까지 해야 하는 게 맞나, 고민에 빠지는 일도 종종 있다. 그래서 어떤 건물들은 사회 차원에서 꼭 고려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세부 지침을 만들기도 한다.
네이버 사옥 그린팩토리를 만들 때의 일이다. 2층까지 뚫린 로비의 큰 공간을 도서관으로 만들고, 그 사이 커다란 계단을 만들어 넣었다. 도서관에는 IT나 디자인 관련 최신 서적을 구비하도록 했다. 동네 주민부터 전공 공부를 하는 학생들까지 멀리서도 많이 찾아왔다.
그런데 휠체어를 탄 사람은 당연히 그 계단을 이용할 수 없었고, 2층으로 가려면 꽤 긴 구간을 돌아 2층으로 가는 주차장용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갈 수 있었다. 가까운 엘리베이터는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라서, 일반 손님을 보안구역 안으로 통과시키기 어려웠다. 라이브러리에 별도의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만들려면 억대에 가까운 돈이 들어가야 했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분은 한 달에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으니… 우리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궁금하신 분은 분당 정자동 그린팩토리 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하시길 바란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때도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건축법 상 엘리베이터 버튼은 휠체어를 탄 사람도 누를 수 있는 높이에 달아야 한다. 그래서 높은 곳에 달려 있는 버튼과 낮은 곳에 달려 있는 버튼이 각각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게 좋은 설계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휠체어를 탄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이 둘 다 편하게 누를 수 있는 교집합의 영역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달면 된다. 여러 개를 달 필요도 없고, 휠체어 탄 사람을 굳이 배려한다고 티 내지 않아도 된다. 티 내지 않는 것, 그게 참 어렵고도 중요하다.
최근 빠르게 늘고 있는 패스트푸드나 카페 프랜차이즈 매장의 키오스크를 보며, 접근성 측면에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불편하다. 그 키오스크는 아이도, 노인도, 외국인도 쓰기 힘들고, 장애인도 쓰기 힘들며, 심지어 IT 회사를 나름 오래 다닌 40대 남자인 나조차도 힘들다.
매장에서는 일하는 직원 한 명 줄이는 것이 이익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름 절박한 마음으로 도입한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키오스크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며 뭘 누를지 고민하고 있는 나를 저 멀리서 해맑은 얼굴로 바라보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노라면 ‘현타’가 온다. 도대체 누굴 위한 키오스크인가.
물론 이 또한 좋아질 것이다. 음성 지원도 되고, 언어 지원도 되며, 필요하면 직원이 달려 나와 직접 주문을 받는 프로토콜도 생길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역시 키오스크 앞에 서면, 끄응, 어렵다. 맨 처음 화면은 대부분 매장에서 먹을지 포장할지 선택하는 내용인데, 결제 뒤에 가면 포장 옵션이 한 번 더 나오는 이유도 모르겠다. 어떤 키오스크는 이게 버튼인지 아닌지 인식이 어려워 누르지 않고 기다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실력 있는 UI 디자이너분들, 제발 이것 좀 어떻게 해주세요.)
“우리는 너를 배려하고 있어”라고 외치듯 이야기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너는 장애인이잖아. 배려받아야지“, “너를 위해 이런 걸 준비했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부터 어떤 식으로든 일반인과 장애인의 경계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장애인으로 하여금 내가 장애인임을 끊임없이 인지시켜 준다.
모두에게 동일한 편리성을 제공하면서, 차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함께 하는 유니버설 디자인.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만, 굳이 인식시킬 필요조차 없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여자, 남자, 노인, 어린아이, 장애, 비장애. 이런 구분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과 제품, 서비스가 점점 늘어나, 서로의 다름에 대한 차별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dit 손현 Graphic 이은호
Writer 이은재
오늘의집(버킷플레이스) PB 비즈니스 총괄. 네이버와 라인에서 공간 만드는 일과 IP 사업을 오래 했고, 레어로우에서 가구 만드는 일을 한 후 지금은 오늘의집에서 일하고 있다. 좋은 공간을 만드는 일,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일, 좋은 제품을 만드는 일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고 믿으며 득도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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