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배경에 HEAD INSIDE라고 적힌 책 표지가 놓여 있어요.

토스 UX 헤드 “디자인이 해결하는 문제가 더 많아져야죠”

by 손현

1. 시스템을 만들던 디자이너, 스스로 ‘헤드’를 자원하다

토스에 어떻게 합류했어요? 전 직장을 그만둘 무렵 몇 가지 옵션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는데, 토스만 유일하게 디자인 시스템을 전담할 디자이너를 뽑고 있더군요. 상대적으로 작은 회사에 있을 땐 제품 관점의 프로덕트 디자인과 시스템 관점의 플랫폼 디자인을 병행했는데요. 제게 시스템을 잘 만드는 데 강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잘 안 돼도 언제든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돌아올 수 있으니 도전해 보자는 생각으로 지원했죠. 마침 토스에서 디자인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많을 것 같아 입사했어요.

시스템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스스로 ‘헤드’를 해보겠다고 했어요. 이것도 시스템을 개선하는 과정의 연장이었나요? 제 자신을 돌이켜보건대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요. 그런데 완벽한 상황이라는 건 거의 없잖아요. 늘 뭔가 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고, 그걸 해결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더 완벽한 상태로요. 그게 처음에는 ‘시스템’이었어요. 토스디자인시스템(TDS)을 만들고 나니, 이걸 넘어선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가령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위치에 있는 문제 같은 거요. 리더가 조금만 더 잘하면, 디자인 조직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인사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하셨군요. 제가 추천한 디자이너 한 분이 입사 초기 3개월 동안 울다시피 하며 출근했어요. 그 이유를 보니 야생에 신규 입사자를 던져놓고는 아무도 챙기지 않아서였죠. 누군가 ‘괜찮아, 그런 일도 있는 거지. 그럼 이렇게 해볼래?’ 알려줄 사람만 있어도 훨씬 낫잖아요. 게다가 시스템을 만들려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스템을 넘어선 제품의 문제도 눈에 들어온 거죠. 2020년 8월, 12층 2번 회의실에서 토스팀 리더 승건 님과 피플팀과 미팅하면서 “헤드를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죠.

뭐라고 하던가요? 승건 님이 “일단 한 번 해보세요”라면서 조건을 달았어요. 헤드 앞에 ‘액팅(acting)’을 붙이자고요.

액팅이요? 난생처음 들은 단어였어요. 그래도 알아듣는 척하고서 “알겠다”고 했죠. 물론 이제는 헤드로서 일종의 수습 기간을 제안한 승건 님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햇병아리 같은 사람이 와서 말했으니 얼마나 당돌해 보였겠어요. 지금도 저는 헤드 포지션에 있는 다른 분들에 비해 연차가 낮고요. 복기해 보면 ‘아, 내가 무식해서 용감할 수 있었구나’ 싶어요.

그때 디자인 조직은 대략 몇 명이었나요? 20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 저는 4명으로 구성된 디자인플랫폼 팀의 리더였고요. 그때도 온전한 팀 리더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조장 느낌?

2. 완벽주의자의 고백 “너무 힘들다, 못하겠어”

신입 헤드로 일해보니 어떠셨나요? 그동안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디자인 실무를 했는데, 헤드가 되면서 해야 할 일이 바뀌니 불안했어요. 디자인을 안 하면 나는 뭘 해야 할까. 포지션이 모호해서 커뮤니케이션할 때도 힘들었어요. 헤드를 맡은 초기에는 디자인 챕터*를 제외한 다른 직군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거든요. 제가 프로덕트 오너(PO)에게 문제 제기를 하거나 뭔가 개선해 보자고 하면, ‘다른 팀 리더가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라고 생각하는 상황이었죠. 맥락이 없으니까요. 정식 헤드로 팀에 인정받고 신뢰를 형성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 토스의 조직은 길드, 스쿼드, 팀, 사일로, 챕터, 트라이브, 디비전, 빌리지 단위로 구성된다. 그중 챕터는 직무가 같은 사람들이 모인 조직을 뜻한다. 팀은 이니셔티브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기능 조직으로 잘 변하지 않는다. 2023년 10월 기준, 디자인 챕터 인원은 107명이다.

팀원에게 제품이 실무라면, 리더에게는 사람이 실무다. (…) 다른 동료들이 일을 못하는 것을 불평하거나 ‘그 사람 때문에 안돼’하고 포기하는 건 리더에게 옵션이 아니다. 이런 조직·인사적 문제 상황과 사태 자체를 문제해결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 리더다. — 이승건, ‘토스에서의 리더십 포지션 101’ 중

하긴 토스팀에서는 인사 발령 내듯 ‘권위’를 부여하지 않잖아요. 일하는 동안 팀원 간의 권위를 얻고 신뢰를 쌓는 과정이 지난했을 것 같아요. 크게 좌절한 적도 있어요. 액팅 헤드를 맡은 지 6개월이 지나고 중간 피드백을 받았는데, ‘액팅’이란 단어를 떼지 못했어요. 디자인 직군과 달리 PO 직군에서는 아직 온전히 신뢰하는 단계가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때는 회사 체계가 덜 갖춰져 있어서 심지어 누가 피드백 했는지도 몰랐어요.

터프하군요. 피드백의 기준이 없어서 더 어려웠어요. 왜 아직 헤드로 신뢰할 수 없는지, 무얼 기대하는지 등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감상과 느낌에 불과했거든요. 제가 뭘 해야 나아질 수 있는지 답을 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다른 팀 리더에게 ‘너무 힘들다, 못하겠어’라고 말했어요. 주말에는 그 생각으로 스트레스받고, 어두워진 내면이 바닥을 쳤죠. 결국 팀 메신저에 제가 맡은 역할을 “내려놓으려고” 한다고 올렸어요.

오죽 힘드셨으면…. 그런데 제 하소연이나 고백에 어느 누구도 ‘그래, 너 못할 줄 알았어’라고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다들 공감하고 잘 들어주셨어요. 조금씩 시야가 걷히더군요.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스스로였구나.’ 피드백에 저에 대한 공격이나 비난, 질타가 담긴 건 아니었거든요. 아직 아닌 거 같다는 느낌뿐이었죠. 그런데 저만 제 자신을 압박했으니까요.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자신에 대한 기대치도 높았군요. 강박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무안하지만, 그때 쓴 장문의 글에 2~3일 뒤에 “다시 해볼게요”라고 하며 번복했죠. 굳이 액팅을 떼야할까. 이대로 10년, 20년 하지 뭐. 왜냐면 제가 이걸 챙기지 않을 때 생기는 공백들이 커서,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팀 차원에서도 가치 있었거든요. 그 뒤로는 일하는 게 더 쉽고 재밌고 여유로워지면서 자연스럽게 헤드로서의 신뢰도 쌓였어요.

이런 성향에 영향을 미친 어릴 적 기억이 있나요? 제 어머니에게 완벽주의 성향이나 강박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수납을 비롯해 살림이나 요리도 엄청 잘하시거든요. 이런 환경을 보며 자라왔으니 기질이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겠죠? 하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순 없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는 영역에서는 한없이 느슨한 대신, 신경 쓰는 영역에는 거의 모든 에너지를 써요. 선택과 집중의 문제죠.

그때 경험을 회고한 글을 보니 “성장은 계단보다는 번지점프더라”라고 적었더라고요. 계단은 안전해요. 죽을 위험도 없죠. 앞이 보이고, 그걸 차곡차곡 오르면 되잖아요. 힘들면 잠깐 쉬었다 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에게 성장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과 같아요.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는 번지점프대 앞에서 뛰어내리는 느낌이거든요. 물론 로프는 달려 있어요. 제가 신입 헤드로 잘 못해도 회사가 저를 쫓아내거나 사람들이 비판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요. 그런데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정말 죽을 것 같거든요. *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리라.’ 《오자병법(吳子兵法)》에 나오는 말로 이순신 장군이 군대를 독려하며 인용한 말로 유명하다.

두려움의 다섯 가지 요소 중에 ‘자아의 죽음’도 있잖아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단에서 받는 창피, 수치심도 큰 공포 중 하나죠. 맞아요. 다만, 그 두려움을 저 혼자만 느꼈던 거죠.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거든요.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못하겠어, 어려워, 도와줘’라고 말해도 괜찮을 거란 믿음으로 눈 질끈 감고 뛰어내렸을 때, 저는 크게 성장했던 것 같아요.

3. 리더도 신뢰 기반으로 일한다

희연 님 캘린더를 보니, ‘하루 점검’이란 일정이 늘 앞에 있더군요. 주로 뭘 하시나요? 먼저 하루에 예정된 미팅을 죽 봐요. 제 일정표는 공공재라서 비어있는 시간대가 있으면 팀원들이 언제든 미팅을 요청하거든요. 예전에는 미팅이 일처럼 느껴졌는데 요즘은 미팅을 줄이기 위해 ‘하루 점검’ 시간을 의도적으로 가지려고 해요.

미팅이 너무 많죠. 간혹 미팅을 미루면 알아서 해결될 때도 있어요. 꼭 저를 만날 필요가 없는 일들이었던 거죠. 관성적으로, 습관적으로 잡은 미팅들은 한 번씩 쳐내요. 해야 할 미팅, 안 해도 되는 미팅, 혹은 미뤄도 되는 미팅. 이렇게 정리해요. 만약 면접 일정이 있거나, 뭔가 꼭 준비해야 할 게 있으면 일정을 조정하기도 하고요.

미팅을 잘하는 노하우도 생겼나요? 처음에는 아이스브레이킹을 왜 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저는 아이스브레이킹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유형이거든요. 미팅에 앞서 사람을 배워 나가는 게 저의 첫 임무였어요. 사람마다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애니어그램, 강점 찾기, MBTI 등 성격 프레임워크 기반으로 사람을 이해하려는 공부도 많이 했어요.

공부한 효과가 있었나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동기나 미션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심은 같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들은 모두 다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에요. 외롭고 싶은 사람, 미움받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상대는 사랑받고 싶은 사람인데, 그 열망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어서 이렇게 된 걸까? 인간에 대한 호기심은 그렇게 도달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리더십 코칭도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되나요? 그럼요. 리더십 코칭을 받으면서 관점의 중요성을 느껴요. 내 관점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내가 이 상황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측면에서요.

코칭은 ‘메타인지’를 도와주는 장치다. 메타인지란 자기객관화와 같아 스스로 하기는 무척 힘들어 코치가 필요하다. 한편 코치 입장에서는 거울을 보여주는 것과 같아 그리 다양한 대화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즉 대부분 영역에서 코치와의 대화는 패턴화될 수 있다. 이것도 툴로 만들 순 없을까? 때로는 ‘코치의 생각에 대한 판단과 두려움’이 코칭 효과를 저해하는데, 툴이 대체할 수 있다면 이런 효과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 정희연, 개인 메모 중(2023.8.23.) Editor’s comment 정희연은 자신의 메모장에 코칭받은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 경험을 자기만의 생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시스템 개선을 고민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관점의 변화가 왜 중요한가요? 관점이 태도를 만들고, 태도가 결국 퍼포먼스를 만들어요. 여기서 말하는 태도는 본인이 뭔가 할 때의 태도뿐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프레임워크를 뜻해요. 상황 판단이나 결정을 위한 틀이죠. 같은 피드백을 두고도 방어적으로 대할 수 있고, 그 피드백을 잘 흡수해서 적극적으로 개선할 수도 있겠죠. 똑같은 사안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성장의 폭이 다른 것 같아요.

이걸 리더십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죠? 저는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어요. 문제상황에서도 불평하는 대신, ‘이 문제는 왜 생겼을까’, ‘이건 어떻게 풀 수 있을까’로 접근하는 거죠. 가령 팀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도 힘든 상황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대신, 팀원의 고충을 같이 해결하면 얼마나 좋을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훈련이 필요하겠는데요. 예전에 요령이 없을 때는, 제가 가진 에너지를 들이붓기만 했어요. 그걸 효율적으로 못 쓰니까, 마치 우는 아기를 달래야 하는데 이상하게 안아서 아기는 아기대로 울고 저는 저대로 힘 빠지는 상황이 잦았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제는 요령이 생겼어요. 호기심으로 접근하면, 저도 불필요한 힘을 덜 쓰게 되고요.

문제해결을 디자인하는데, 이걸 시스템으로 하다가 이제는 사람으로 하는군요. 모든 게 디자인의 연장선 같네요. 맞아요, 저는 모든 게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UX)과 연결된다고 봐요. 오늘 이 인터뷰도 저에겐 현 님이 사용자니까, 현 님의 경험을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 바라볼 수 있거든요. 그게 대화일 수도 있고, 책상 앞에 놓인 커피 맛일 수도 있죠.

그럼 헤드로서 완벽주의에 대한 관점도 바꾼 건가요? 완벽 지향을 버리긴 어려울 것 같아요. 대신 관점을 바꾸긴 했죠. 완벽하지 않은 상황을 잘못되거나 부정적으로 봤다면, 이제는 완벽하지 않은 게 일반적이라고 받아들여요. 다만 완벽해지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성장하자는 방향으로 바뀐 거죠. 완벽을 추구하는 마음은 저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리더보다는 실무자로서의 강점이겠죠.

리더로서의 강점도 궁금해요. (몇 초 뒤에 웃으면서) 만만함? 나쁜 뜻은 아니고요. 많은 팀원들이 저에게 격 없이 다가올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저는 토스 안에서 태어난 리더잖아요. 토스는 자율과 책임으로 일하고, 최종 의사 결정권자(DRI, 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 문화가 있잖아요. 이런 문화 속에서 리더도 꾸준히 신뢰를 쌓으며 일하면 좋겠어요. 그동안 제가 경험한 리더십이 많진 않지만, 잘못된 의사결정이더라도 그저 상사라는 이유로 수용되는 걸 자주 목격했어요. 이런 불합리한 권위에서도 탈피하려고 노력해요.

팀원에게 들은 말 중 기억에 남는 것도 있어요? “희연 님이 있어서 다행이다.”

존재만으로도 팀원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말이군요. 사용자 경험 개선이 필요하지만 비즈니스 지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 같을 때, 혹은 지표를 높이려고 사용자를 기만하거나 침습적 경험을 넣어야 할 때, 아무도 코멘트하기 어려울 때. 모두 제가 필요한 순간이에요. 이렇게 저의 신뢰 자산을 쓰라고 팀원들이 지지하는 게 아닐까요.

4. 정성적 가치를 설명할 수 없더라도 일단 믿는다

UX 헤드에게 꼭 필요한 덕목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정성적 가치에 대해 모두가 의심할 때, 흔들리지 않는 확신. 콘텐츠나 브랜딩 영역의 업무도 비슷할 것 같아요. 가령 “<헤드라인 인터뷰> 아티클 발행하면, 채용이 잘 돼?” 이런 질문의 답이 꼭 정량적일 순 없거든요. 모두가 의심해도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괜찮아요.

자기 확신도 중요하군요. UX 헤드는 다시 말해 UX의 최전방이에요. 최전방이 뚫리면 다 뚫리는 거예요. 만약 ‘디자인 조금 바꾼다고 해서, 티도 안 나고. 아무도 몰라보는데 의미 없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하는 순간, 이미 끝난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은, 정성적 가치를 설명할 수 없더라도 일단 믿는 것. 거기에 확신을 더하는 것.

다른 팀원이 정성적 가치를 확신하지 못해도, 희연 님에게 믿어주는 편인가요? 당연하죠. 저보다 믿음이 더 큰 사람은 많지 않아요. (웃음) 그래서 보통은 제가 디자이너들을 더 설득하죠. 정성적 가치를 정량적으로 설명할 수 없더라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면서요.

2021년부터 시작한 토스 디자인 컨퍼런스 <심플리시티>도 정성적 가치를 더 널리 알리려고 기획한 건가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어요. 토스에 오기 전부터 디자이너로서 가졌던 문제의식이 있어요. 저는 정성적 가치에 대한 확신이 크고, 디자인이 바꿀 수 있는 영역이 많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그런 사례들도 많고요. 막상 회사를 다녀보면 현실은 많이 다르더군요.

어떻게 달라요? 디자이너는 단순히 장식하고 꾸미는 사람이란 인식이 여전히 많아요. 디자이너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훨씬 더 많은데 말이죠. 🔊디자이너의 역할 범위를 좁게 설정하고 그 디자이너가 문제를 조금만 해결하면, 이 사회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총량, 문제 해결력이 작아지잖아요.

맞아요. ‘디자인’이란 말이 포용하는 범위도 꽤 크죠. 디자이너가 인정받지 못한 채로 일하고 있으니까, 토스가 채용할 디자이너도 그리 많지 않았어요. 디자이너가 능동적으로 문제해결을 할 수 없는 환경인데, 우리에겐 그런 경험을 지닌 분이 필요하니까요. 디자이너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과 문화를 바꾸고 싶었어요.

두 번째 목적은 뭔가요?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싶었어요. 그동안 토스의 디자인 조직은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어요. 대외 노출이 없다 보니, 우리 스스로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 수 없었고요. 디자인 조직이 최고 수준이라는 걸 보여주자. 보여주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심플리시티 21>에서는 저희가 일의 최전선에서 하는 고민과 배움을 전달하려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지난 5월에 공개된 <심플리시티 23>도 세련되고 좋았어요. 2021년에 비해 어깨에 힘을 뺀 느낌도 들었고요. 2021년에 너무 엘리트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면, 2023년에는 좀 더 캐주얼하고 편하게 다가가려고 했어요. 전자가 컨센서스를 바꾸는 작업이었다면, 후자는 실질적인 팁을 사수가 바로 옆에서 가르쳐주는 느낌을 지향했죠.

<심플리시티 23>의 컨셉은 어떻게 나온 건가요? 팟캐스트와 인터랙션의 절묘한 조합을 구현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역설적으로 올해 예산이 거의 없어서 더 창의적인 발상을 할 수 있었어요. 2021년에는 모든 게 처음이라 참여한 팀원들이 4~5주 동안 주말 없이 리소스를 써야 했어요. 첫해 경험이 너무 힘들어서 2022년은 건너뛰었고 2023년에 준비하면서 몇 가지 기준을 세웠죠. 첫해만큼 힘들면 안 된다. 예산은 0원으로 해보자. 그렇게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끝에 지금의 모습이 나왔어요.

△ <심플리시티 23> ‘완전히 새로운 컨퍼런스 만들기’ 중

내부 반응이나 고객 피드백도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인상적인 반응도 있었나요? <심플리시티 23>을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담으려던 것들이 많아요. 그중 기억나는 걸 꼽자면, 세상에 없던 캐주얼한 컨퍼런스를 만들어 보자. 대부분의 컨퍼런스는 각 잡고 봐야 한다는 부담이 있잖아요. 그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경험한 배움을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 끝에 담은 장치들이 많은데 듣는 분들이 이런 세세한 기획 의도까지 다 알아봐 주시더라고요. 그게 감격이었어요.

“토스는 진짜 미친놈들이다. 와 심플리시티23 미친 건가? 오디오 음성을 문장으로 볼 수 있게 하면서 단락에 맞춰 이미지도 넣네. 안 볼 수가 없잖아.” (2023.5.23. i*******)

“정성조사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고, 합류하는 팀마다 정성조사 역량을 키우려고 노력해 왔던 사람 입장에서, 이렇게 회사가 전체적으로 사용자에게 집중해서 정성조사를 하는 문화가 정말 대단하고 멋져 보이네요.” (2023.5.23. 김**)

리더로서 그리는 비전이 있나요? 종종 토스의 디자인 조직을 전 세계 최고의 팀으로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해요. 왜 그런 디자인 팀을 만들고 싶냐고 묻는다면, 저는 디자인이 해결하는 문제가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래야 세상이 더 완벽해지는 데 가까워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디자인을 통한 문제해결의 정성적 가치에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내면 좋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원래 한국에서 취업할 계획이 없었다고 들었어요.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독일로 유학 가서 아예 이주까지 할 생각이었거든요. 201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서 유행하던 단어들을 기억하세요? 웰빙, 욜로를 지나 헬조선이란 단어가 등장하던 때예요. 2016년에는 《82년생 김지영》이 출간하자마자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고요. 전반적으로 당시 20대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시니컬했어요. 아무리 봐도 한국은 기득권 중심의 사회 같고, 여기선 제 미래가 없을 것 같아 한국을 벗어나려고 했죠. 물론 대학생 때 계획이 다 지켜지는 건 아니지만요.

먼 길을 돌아 다행히 여기까지 오셨어요. 사회초년생이던 때의 저에겐 그리 좋은 리더가 없었어요. 첫 회사 때도 오히려 ‘이건 진짜 아니다. 1년만 하고 나오자’, 라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다녔고요. 저와 맞지 않는 성향의 리더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있어요. 그래서 선배나 사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잘 몰라요. 선배 없이 살아왔고, 집에서도 장녀로 컸거든요. 누가 저를 가르쳐주기보다는, 알아서 살아가는 쪽이었어요.

유학과 이민을 고민 중이던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도 있으세요? 일단 과거로 돌아가서 저에게만 조언할 수 있다면, 아무 조언도 하지 않고 싶어요. 조언 안 듣고도 잘 살아왔잖아요. (웃음) 강점 검사를 한 적이 있는데, 제 강점 중에 ‘자기 확신’ 테마가 있대요. 그동안 모두가 저만큼은 확신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자기 확신 (Self-Assurance) 많은 사람들과 달리, 당신은 다른 사람의 주장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도 말이다. 당신이 가진 다른 테마에 따라 자기 확신 테마는 조용하게 또는 요란하게 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이 테마는 견고하고 강하다. 마치 모든 종류의 압력을 다 견뎌내야 하는 배의 중심 뼈대처럼, 이 테마는 당신이 다양한 압력을 견디고 계속해서 자신의 올바른 길로 잘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도널드 클리프턴/갤럽 프레스, 《위대한 나의 발견, 강점 혁명》, p.140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는 주니어 디자이너에게는 자기 확신을 전하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믿어도 돼요. 믿으세요. 주변 친구나 선배가 아무리 조언하다고 해도 그들이 내 인생 대신 살지 않잖아요. 내 인생이 나에게 너무 중요하니까 불안한 건데, 자기 자신을 더 믿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이루고 싶은 걸 이루려고 욕망해도 괜찮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정희연은 UI 디자이너로 2018년 7월 비바리퍼블리카(토스)에 합류했다. 그 후 플랫폼 디자이너, 디자인플랫폼 팀 리더를 거쳐 현재 UX 헤드(Head of UX)로서 토스앱의 전반적인 사용자 경험과 디자인 퀄리티를 총괄하고 있다.


Words 정희연 Interview 손현 Graphic 이은호

손현 에디터 이미지
손현

토스팀에서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토스가 더욱 사랑받는 서비스, 신뢰받는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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