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원인은 취약한 전세시장에 있다
ㆍby 박원갑
“전세는 돈 떼일까 봐 무섭고, 월세는 다달이 내는 돈이 아깝고….”
요즘 세입자들이 겪는 이중고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전세사기가 속출하면서 전세를 구하는 세입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다. 자칫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증금을 떼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렇다고 월세로 내자니 그 돈이 아깝거니와 번거롭다.
한국은 외국과 달리 전세와 월세 제도가 공존한다. 전세와 월세는 같은 주택 임대차 시장이지만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전세는 주거비가 저렴하지만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월세는 주거비가 과도하게 든다는 게 문제지만 전세처럼 갑작스럽게 오르고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100년 이상 된 한국의 고유한 전세 제도도 비(非) 아파트를 시작으로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다.
전세가 매매보다 불안정한 이유
“전세시장은 왜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건가요?” 전셋값이 한동안 급등하더니 최근 다시 급락하고 있다는 뉴스에 한 지인이 대뜸 물었다. 얼떨결에 “전세는 그 자체가 사금융이기 때문이니까요.”라고 얼버무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제대로 핵심을 얘기한 것 같았다.
전세 제도는 한국의 독특한 임대차 제도다. 전세 제도가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많지만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수요자 입장에서 장점이 크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장점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다. 주거 비용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전세, 자가, 월세 순으로 싸다. 외국인이 보기에 집값의 70~80%를 주인에게 맡겨놓고 조마조마하게 사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름대로 주거비를 아끼려는 경제 논리가 반영된 것이다.
문제는 전세시장이 수요와 공급의 작은 엇박자만으로도 자주 요동친다는 점이다. 전세시장은 전세난과 역전세난을 불규칙적으로 반복한다. 전세 공급이 모자라 수요자인 세입자들이 겪는 고통이 전세난이라면, 공급이 넘쳐 집주인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것이 역전세난이다.
극심한 침체국면이 오면 전세가격은 매매가격보다 더 하락한다. 전세시장은 취약한 사금융이므로 더 민감하게 움직인다. 더욱이 요즘은 전세를 구할 때 제 돈만 갖고 나서는 사람도 드물다. 타인 자본, 즉 대출을 낸다. 금리가 오르면 기존에 대출을 낸 사람도 힘겹지만 새로 구하는 사람의 부담도 늘어난다. 당연히 고가전세를 중심으로 수요가 줄어든다. 전세시장도 금리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전세 집주인이 시장 흐름에 더 순응적인 자세(price taker)를 보이는 특성도 있다. 2년 혹은 4년 뒤에 전셋값을 올려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에 시세보다 낮춰 거래를 해도 큰 손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매매시장보다 손실 회피*나 처분 효과**가 덜 작용하니 경색기에 전세가격이 매매가격보다 더 하락한다. * loss aversion. 같은 금액이라면 손실을 이익보다 훨씬 더 크게 느끼는 현상. ** disposition effect. 개인이 보유한 자산 가격이 매수가격 이하로 떨어졌을 때에는 손실 회복을 목적으로 매도하기를 주저하는 반면, 오히려 이익이 되는 자산은 바로 처분하여 추가 이익의 기회를 놓치는 현상.
반면 월세 시장은 변동성이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보증금 1,000만 원에 월 60만 원의 임대료를 받던 집주인이 갑자기 1,000만 원에 80만 원으로 올려 받기 쉽지 않다. 대체로 안정적인 흐름이다. 왜 전세시장만 유독 불안한 움직임을 보일까?
전세 제도가 확산된 배경에는 197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생겨난 금융 시장의 왜곡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수출 기업에 자금을 배정하기 위해 소비자 금융을 통제하면서 개인은 돈을 빌릴 방법이 없었다. 이러다 보니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고, 세입자에게 받은 전세 보증금은 곧 은행의 대출 역할을 했다.
이처럼 전세는 임대 수익 개념보다는 금융, 특히 사적 금융 성격이 강하다. 미국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는 금융의 가장 큰 특성으로 불안정성*을 꼽는다. 그에 따르면 금융 시스템은 안정된 균형점이 없으며 습관처럼 불안한 주기를 형성하기 일쑤다. 금융은 ‘자금 융통’의 약자다. 즉, 신용(빚) 창출 과정이다. 금융은 허공에서 신용을 창출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금융 시장은 실물경제와 달리 뚜렷한 실체가 없어 작은 변화에도 수시로 출렁인다. 어떻게 보면 전세시장은 금융(채권)을 닮아 불안정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 국내에서는 자산 가격에 낀 버블의 폭락을 전망하는 용어인 ‘민스키 모멘트(Minsky Moment’와 장 폴 로드리게(Jean-Paul Rodrigue) 호프스트라대 지리경제학과 교수가 만든 ‘로드리게 모델’이 혼용되면서 ‘하이먼 민스키 모델(Hyman-Minsky Model)’로 널리 알려져 있다. 로드리게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집값이 크게 상승하는 걸 보며 미국 경제학자인 하이먼 민스키 교수와 찰스 킨들버거 교수의 이론을 토대로 ‘버블의 단계(Phase of Bubble)’라는 로드맵을 만들어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다.
태생적으로 불안정성을 안고 있는 전세는 지속적인 안정도 쉽지 않은 구조다. 더욱이 김치, 라면, 쌀처럼 생필품과 같아 단기적인 수요 조절도 어렵다. 매매시장에서는 수요자들이 미래에 가격이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매입 시기를 미룬다. 하지만 전세 거주자들은 전세 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잘 수 없다. 따라서 정부가 대책을 내놓아도 단기적으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전세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적어도 2~3년을 내다보고 선제적 대처를 해야 하는 까닭도 이런 맥락에서다.
‘전세사기’ 후폭풍, 전세 종말 빨라진다
일련의 전세사기가 기폭제가 되면서 전세 제도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커지고 있다. 앞으로 아파트를 제외한 주거형태(다세대, 다가구, 빌라, 연립주택, 다중주택 등)에서 전세를 찾으려는 세입자들이 크게 줄 수 있다. 이들 주택은 거래가 흔치 않은 특성상 매매나 전세 시세 포착이 힘들어 세입자 입장에서는 ‘깜깜이 계약’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제도에서는 세입자가 전세계약 전, 스스로 전입세대를 열람하기 어렵다. 전세계약을 하고 난 뒤 계약서를 지참해야 주민센터에서 열람할 수 있다. 사고를 미리 막고 싶은데 이미 계약한 뒤에 전입세대를 확인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집주인의 말이 맞는지 사후 검증용일 뿐이다.
전입세대 확인서(구 전입세대 열람서)를 떼어본다고 해도 막막하다. 다가구나 다중주택일수록 선순위 임차인과 보증금 액수를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전입세대 확인서를 통해 선순위 임차인을 파악해도, 그 세입자가 전세로 사는지, 월세로 사는지는 알기 힘들다. 선순위 보증금 총액 파악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알 수 없다. 결국 집주인의 양심만 믿고 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세입자는 보증금이 높을수록 위험한 사적 계약이 될 확률이 높다.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세입자는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전세를 구할 때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한 곳을 찾거나 보증금을 낮춘 반전세나, 반월세를 구하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되면 한동안 시장에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생길 수 있다. 집주인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다. 새로운 전세 세입자를 구해야 기존 전세 세입자를 내보낼 수 있는데, 여의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집주인 입장에서 ‘보증금 돌려막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다만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보증금 지키기도 상대적으로 쉬운 아파트는 그나마 전세 제도가 명맥을 유지할 걸로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주거비 지출(housing expenditure) 비중은 총소득의 14.7%로 OECD 가입 국가 중 가장 낮다. OECD 가입국의 평균은 20%다. 저렴한 임대료 부담은 전세 제도가 유지되고 있기에 가능하다.
요즘은 내 집 마련의 사다리라는 전세의 순기능보다 갭투자와 깡통전세라는 역기능이 더 부각되고 있다. 그래서 월세 예찬론자들이 나타난다. 선진국 임대차 구조가 모두 월세니까 한국도 월세로 바뀌면 주거 문화가 선진화되는 걸까?
월세 시대를 맞으려면 의료, 교육, 주거 등 복지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 특히 과중한 사교육비 지출을 줄일 수 있는 공교육 혁명이 필수다. 외국 급여생활자의 월세 부담은 소득의 30% 선이다. 한국도 이 정도 월세를 낸다고 치자. 평범한 노동자가 월급 300만 원을 받아 월세로 100만 원을 내고, 자녀 사교육비로 50~100만 원을 내고 나면 무슨 돈으로 소비를 할 것인가. 저소득층은 더 문제다. “월세 사는 사람은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다.” 치료하기 위해 모아놓은 돈이 있어야 아플 수 있지 않느냐는 하소연이다.
월세 시대는 집 없는 사람의 주거비 부담 고통이 더 심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전세금을 모으고 그것을 밑천으로 삶의 작은 공간이라도 장만하고 싶은 서민의 소박한 꿈의 사다리가 사라질 수 있다. 가뜩이나 줄고 있는 중산층이 더욱 얕아지고 계층 간 양극화, 사회 불안이 더 심해질 가능성도 있다. 월세 시대를 마냥 반길 수 없는 이유다.
세입자 면접 보는 시대가 올까?
외국에서는 세입자를 받을 때 신분을 꼼꼼히 따진다. 며칠 전 유럽에서 월세를 구하는데 8명이 함께 면접을 봤다는 기사도 봤다. 대졸 신입사원 면접도 아니고 월세 하나 구하는데 집단 면접을 보다니, 우리에겐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외국은 한국처럼 돈만 내면 아무나 세입자로 받아주지 않는다. 독일이나 스페인에선 월세를 구하려면 서류 전형이라는 1차 관문부터 통과해야 집주인과 면접을 볼 수 있다. 서류 전형에서 애완동물이나 동거 가족 여부, 재직증명서나 소득증빙 제출은 기본이다. 무엇보다 경제력을 철저히 확인한다. 혹여나 월세를 못 내진 않을지 미리 신용도를 따지는 셈이다. 심지어 세입자의 전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지 평판 조사까지 한다. 집은 적은데 구하려는 사람이 많은 지역에선 집주인의 ‘면접 갑질’이 일상사다. 임대가 끝난 뒤 나갈 때도 입주 때 사진과 비교해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으면 보증금에서 공제한다. 주인 몰래 벽에 못을 박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도 세입자를 골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집주인은 안채에 살고 문간방에 세를 놓곤 했는데 식구가 많으면 계약을 거부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이사를 오고 나서 가족 중 한두 명은 집주인 눈을 피해 저녁에 몰래 들어오곤 했다. 요즘은 식구가 많지 않고 공간을 전체 단독으로 사용하는 독채 구조다. 집주인의 갑질은커녕 집주인을 볼일도 거의 없다.
전세를 준 집주인은 월세보다는 관대한 편이다. 세입자가 집을 함부로 쓰면 나갈 때 잔소리는 하겠지만 그냥 눈감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집주인이 집값 상승으로 보상을 받았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전세는 세입자가 도배와 장판을 직접 하는 게 관행이어서 집주인은 유지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 월세는 집주인이 그 비용을 부담하므로 전세보다는 상대적으로 엄격한 편이다.
앞으로는 한국도 준월세나 순수월세 계약이 늘면서 세입자를 가려 받을 가능성이 높다. 집주인 입장에서 세입자가 월세를 제때 내지 않고 버틴다면 골칫거리다. 명도*하는 데 시간이나 비용도 많이 든다. 월세 디폴트 방지용 자금인 보증금이 많지 않다면 선별적으로 세입자를 받을 수밖에 없다. 월세화가 진행되더라도, 당분간 외국처럼 집주인이 집단면접을 보진 않겠지만 좀 더 깐깐하게 세입자를 선택할 수 있겠다. 이런 흐름은 고액 월세시장부터 서서히 나타날 것이다. * 민법 용어. 토지나 건물 또는 선박을 점유하고 있는 자가 그 점유를 타인의 지배하에 옮기는 것.
글 박원갑 (부동산시장 분석가, 부동산학 박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부동산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강원대학교에서 부동산학 박사 학위를 각각 받으며, 균형 잡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스피드뱅크 부사장 겸 부동산연구소장, 부동산1번지 대표를 거쳐 현재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이다.
Edit 손현 Graphic 함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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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시장 분석가, 부동산학 박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부동산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강원대학교에서 부동산학 박사 학위를 각각 받으며, 균형 잡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스피드뱅크 부사장 겸 부동산연구소장, 부동산1번지 대표를 거쳐 현재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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