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나 부자 됐어요!”
ㆍby 얼랩
△ 드라마 <펜트하우스>
“아저씨, 나 부자 됐어요!”
2020년 11월, 한강변 재개발 투자로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얼마 전 시즌 3로 종영한 SBS의 드라마 <펜트하우스> 속, 배우 유진이 맡은 오윤희다.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재개발 추진 문건을 입수한 그는, 현실을 벗어나려는 절박한 마음에 이 정보를 믿어 보기로 한다. 그렇게 구역 내 아파트를 한 채 매입한 후, 무산되었던 재개발 사업이 당장이라도 시작되진 않을까 인터넷을 찾아보지만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결국 대출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아파트를 되팔기로 한다.
매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려던 순간, TV 뉴스에 이 구역을 제2의 강남으로 개발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된다. 부자가 되었다는 반사적인 외침은 여기에서 나왔다.
재개발 추진이 곧 가격 상승이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등식을 현재의 서울에서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오윤희는 다른 등장인물의 도움으로 결국 이 드라마에서 최고의 주거지로 그려지는 강남의 초고층 주상복합 ‘헤라팰리스’에 입주하게 된다.
△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장면. 오윤희가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건네받은 재개발 문건을 살펴보고 있다.
2021년 초, 드라마 밖 현실세계에서는 공공 택지개발과 주택공급을 전담하는 LH에서 몇몇 직원들이 개발정보를 유용해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전부터 공공연했을 개발정보 유출과 투기 행태가 드라마와 겹쳐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개발 소식을 미리 입수하고 이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자산을 증식하는 식의 전개는 늘 있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생각해왔던 것이다. 대대적으로 밝혀지지만 않았을 뿐.
재개발 정보는 이렇게 암암리에 유통되어야 하는 걸까
몇 년 전에는 대규모 택지 지정 소식이 사전에 유출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고, 철도나 도로와 같은 기반시설 개설 정보를 개인적 투자에 이용해 문제가 된 사례도 있었다.
신도시나 대규모 택지개발사업 대상지를 발표하는 경우, 강제성 있는 행정절차가 시작되기 전까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재개발사업, 재건축사업과 같은 정비사업이라면 사업이 추진되기 전에 도시계획에 반영되어 있으며, 그 계획은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다.
바로 ‘도시·주거환경 정비기본계획(이하 정비기본계획)’이다. 이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시정비법)’에 따라 인구 50만 이상의 도시라면 의무적으로 수립하는 계획이다. 서울은 물론 광역시와 모든 대도시에 수립되어 있다. 시흥시, 의정부시, 광명시, 파주시 등과 같이 인구 기준으로 의무 수립 대상은 아니나 정비사업이 활발한 도시의 경우에도 수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비기본계획은 10년 단위로 수립하는 중장기 계획으로, 5년마다 타당성을 검토하여 그 결과를 계획에 반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도시계획 체계상 최상위 종합계획인 도시기본계획이 도시의 장기적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면, 정비기본계획은 주거지역 전체에 대한 정비 방향을 제시하는 하위계획이자 부문별 계획이라 할 수 있다.
△ 서울의 도시계획 체계 (출처: 서울시 도시계획 포털)
정비기본계획은 도시정비의 목표를 설정하고 개별 구역의 정비계획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에 지정되어 있던 정비예정구역과 정비구역의 적정성을 먼저 검토하고, 정비구역에 대해서는 해당 구역의 공간 범위, 사업시행방식, 단계별 사업시기 등의 향후 사업방향을 정한다. 계획 수립 주체인 지자체가 주민들로부터 정비사업 요청을 받거나, 추진 의향을 묻는 절차를 밟기도 한다.
△ 도시·주거환경 정비기본계획 주요 내용 예시 (출처: 2030 인천 도시·주거환경 정비기본계획, p.17)
일시에 지정되는 정비예정구역 제도의 문제를 해소하자는 취지에 따라, 2012년부터는 ‘생활권 계획’이 기존의 정비예정구역을 대체할 수 있게 됐다. 개별 구역 단위 사업이 아닌, 생활권 내의 주거여건을 전반적으로 고려해 정비사업을 추진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지자체는 정비예정구역을 새로 지정하는 대신, 정비기본계획상 주거 생활권 계획 내에서 타당성 검토를 거쳐 정비구역을 지정하고 있다.
△ 주거 생활권 관리방향 예시 (출처: 2030 인천 도시·주거환경 정비기본계획 주거 생활권 계획 도면집)
재개발, 재건축 사업의 시작, 정비기본계획
서울시의 현재 정비기본계획은 2015년에 수립된 《2025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이다. 이전 계획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물리적 노후도를 기준으로 하는 기존 계획과 달리 주거정비지수 제도를 도입해, 노후도 외에 거주자의 의향과 지역 특성을 반영해 정비구역을 지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심 내 주택공급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정비사업 활성화 대책의 하나로 주거정비지수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다시 바뀌었다.
뉴타운 출구전략*과 사업이 중단된 정비구역의 매몰비용을 논의하던 시기에는 보다 신중한 추진을 위한 주거정비지수 제도가 적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시는 신속한 주택공급이 관건인 현재, 이 제도가 오히려 정비사업 활성화를 막고 있다고 판단하는 걸로 보인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1년 첫 취임과 함께 선언한 정책 중 하나.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후 취임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이어오던 뉴타운 정책에서 선회한다는 의미로 ‘출구전략’이란 이름이 붙었다. 주민 반대나 부동산 경기 침체를 이유로 추진이 미흡한 구역을 해제하고 신규 구역 지정을 중단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러한 출구전략으로 뉴타운 또는 재개발 구역 총 394개소가 해제되었다. 이러한 출구전략은 2020년 사실상 마무리되었고,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주택공급을 목표로 하는 서울시 정비사업 기조에 따라 변경이 불가피하게 됐다. 관련 기사 1, 기사 2 참고.
동시에 공공기획 제도도 함께 도입되었는데, 이는 서울시가 사업 초기 단계에서부터 개입하여 장기화되기 쉬운 사업기간을 단축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외에도 대부분의 지자체가 2025년 또는 2030년을 목표로 하는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한 상태다. 부산시는 2019년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해 생활권 계획을 처음으로 시 전역에 적용했다. 최근 정비사업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 중인 인천시는 정비기본계획에 기존 시가지 형성 과정과 유형을 상세히 담았다. 자생적으로 생긴 시가지인지 계획적으로 조성된 시가지인지 구분하기도 하고, 어떠한 사업 유형으로 조성된 것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2021년 초에는 인구 27만 명의 군포시도 정비기본계획 수립 용역에 착수했다. 정비사업이 산발적으로 추진되는 기존 도심과 정비사업 시기가 일시에 도래하는 산본신도시가 계획 대상이다.
정비기본계획에 미리 반영된 사업만 추진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도심 내 주택 공급 수단으로 정비사업이 거론되면서 기존 정비기본계획에 없는 사업을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작년부터 한창 보도되었던 공공 재개발과 공공 재건축은 모두 정부 정책이 발표되며 법제화된 사업 유형이기 때문이다.
정비기본계획 외의 계획수단을 동원해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도 있다. 한강변에 추진되고 있는 ‘전략정비구역’은 모두 지구단위계획이 먼저 입안된 사례다. 뉴타운으로 불리는 ‘재정비촉진사업’은 개별 사업 유형이 재개발, 재건축 등으로 수렴해 정비기본계획에 담기지만 계획의 출발점은 조금 달랐다. 기존 정비예정구역 전 단계 수준에서 소유자들이 정비사업 의향을 모아 추진하는 경우도 있다. 초기 재개발, 초기 재건축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업들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언론보도로 접하거나 주변에서 접하는 재개발, 재건축 사업은 오래전부터 정비기본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정비사업이 완료된 단지들도 거슬러 올라가 추진 경과를 살펴보면 시작은 정비기본계획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04년 처음으로 정비기본계획에 검토대상구역으로 편입된 서울시 성동구의 ‘행당6구역(현 서울숲리버뷰자이)’의 경우 2008년에는 정비기본계획상 정비예정구역으로 변경됐고 2009년에는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어 2018년에 정비사업이 완료됐다.
계획을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비사업 초기에는 추진 자체가 엄청난 가치 상승 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추진 기간 동안 인허가 단계와 주택/부동산 경기에 따라, 그리고 추진 주체 상황에 따라 자산가치는 요동을 치기도 한다.
<펜트하우스>에서는 오윤희가 입수한 재개발 정보가 사실로 밝혀지며 즉시 부를 이룬 것처럼 묘사되지만, 현실에서의 재개발은 구역 지정에만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각 단계별 인허가 및 의사결정에 따라 사업이 장기화되는 경우도 대다수다. 그동안 경기 침체라도 생기면 주인공들이 좋아하는 ‘대박’ 정보도 소용이 없다. 혹여 자산가치 상승이 확실한 걸로 보여도 추진 기간 내내 열악해지기만 하는 거주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거나, 보유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겨 아예 매도하는 경우도 있다.
소유자가 아닌 세입자라면 자산가치 상승은 더더욱 관련 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대개 매체에서 접하는 정비사업 관련 정보는 투자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편 세입자로서 정비사업 대상지에 거주하고 있다면, 투자보다는 정비사업에 앞서 전세/월세 계약을 해도 되는지, 언제까지 이 집에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세입자에 대한 주거안정대책’을 포함하고 있는 정비기본계획이지만, 개별 구역 단위에서는 그 대책이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기반시설 정비보다 기존 주택 개선 목적이 더 크다고 여겨지는 재건축 사업은 별도의 이주대책이 없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집주인만큼이나 정비사업 추진 추이에 세입자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계획을 알고 있어도 원치 않게 내몰리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정비사업 추진이 해당 지역의 주택시장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인근 주택시장까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우선, 대규모 사업에서 일시에 발생하는 이주 수요가 전세시장에 영향을 주는 경우. 대개는 재개발/재건축을 앞두고 주택 상태가 열악한 상황에서 주변보다 전월세 가격이 저렴한 경우가 많아 행정구역을 넘어 이주하기도 한다.
현지 중개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광명 뉴타운 개별구역의 이주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인접한 부천, 시흥의 신축 빌라 전세가가 뛰었다. 둔촌주공 이주가 진행될 당시에는 인접 자치구는 물론 하남, 남양주 등 주변 도시의 전세시장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정비기본계획을 계속 살펴봐야 할 이유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외에 ‘빈집 및 소규모 정비에 관한 특례법’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도 있다. 기존의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 대규모 정비사업 위주로 적용되다 보니 소규모 사업을 위한 규정은 미비하다는 지적에 따라 2017년에 제정된 법률이다.
자율주택정비사업, 가로주택정비사업, 소규모재건축사업, 소규모재개발사업이 이에 해당된다. 특히 가로주택정비사업은 재개발 관련 규제를 피하고 사업 단계와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정비사업의 대안으로 부각되며, 이를 추진하는 곳이 많다.
시내 곳곳에서도 동의서를 받는다는 등의 내용이 적힌 현수막을 종종 볼 수 있다. 한편 기존 가로를 보존하고 규모를 제한하여 소단위 개발을 촉진하고자 하는 사업 취지와 달리, 주변 기반 시설은 그대로 둔 채 골목 안에 소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게 해 주는 수단에 그친다는 지적도 있다.
지자체마다 여건과 상황은 다르지만 정비기본계획에 동일하게 담겨 있는 내용 중 하나는 사업 위주, 그리고 전면철거 위주의 정비에서 벗어나 지역 특색을 보전하고 주민 요구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선언에 그치고 주택공급이라는 명분으로 사업 시행 단계에서 종종 바뀌기도 한다. 공공이 앞서서 정비사업 추진에 따라 개별 소유주에게 어떠한 경제적 이익이 있는지를 홍보하는 경우도 있다. ‘도시정비’라는 공적 목적을 가진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조합원의 자본투자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업구조 탓에 민간에 모든 책임과 부담이 수익과 함께 전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정비사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도심 내 시가지 정비와 주택공급 필요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역할은 지속될 것이다. 단, 역할의 세부 내용은 계속 바뀌어왔다. 전면 철거를 통한 노후 주택지의 정비, 주민 참여와 보전/관리 대상으로서의 정비사업, 그리고 다시 공급수단으로 돌아오기까지 실제로 시장과 정책에 따라 계속 달라졌다.
정비기본계획은 한 발 앞서 재개발, 재건축과 같은 정비사업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상위계획인 만큼 그 역할 변화를 수용하고 이끌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정비기본계획을 살펴보아야 할 이유이다.
Edit 손현 Graphic 박세희, 엄선희
토스피드 외부 기고는 외부 전문가 및 필진이 작성한 글로 토스피드 독자분들께 유용한 금융 팁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현명한 금융생활을 돕는 것을 주목적으로 합니다. 토스피드 외부 기고는 토스팀의 블로그 운영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되며 토스피드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건설사에 근무하며 법과 제도로 이루어진 도시계획을, 부동산이라는 결과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아파트를 비롯하여 대규모 복합시설과 도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동산 개발사업을 경험하였습니다. 주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이야기하고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도시를 산책합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였습니다.
필진 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