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가 '기술 수용의 생애 주기' 그래프 중 협곡처럼 보이는 구간 앞에 있는 모습

전기차 시장,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by 커피팟

전기차는 어느 단계에 와있나

미국의 전기차 수요가 둔화되며 전기차 제조사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어요. 전동화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그 속도는 예상보다 느릴 것이라면서요. 요즘 이어지는 분석에 따르면 잠재 소비자들이 전기차 구매를 꺼리게 된 계기는 비싼 전기차 가격과 부족한 충전 인프라였어요. 주행 성능에 대한 의구심 등 전기차 기술 자체를 신뢰하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현실적 비용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죠.

차량 구매 가격 등 초기 비용이나 충전소에 대한 문제 제기 현상을 보면, 사람들이 어느새 전기차를 내연기관차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 따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는 전기차에 대한 ‘기술 수용의 생애 주기’ 곡선이 얼리어답터* 단계를 지나 초기 다수자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남들보다 신제품을 빨리 구매해서 사용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비자 군. 미국 사회학자 에버릿 로저스가 1957년 저서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

지난 몇 년간 전기차가 상당한 고가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팔린 이유는 시장에서 기술 혁신이라는 효용 가치에 반응하는 얼리어답터들이 열광했기 때문이에요. 이제 대부분의 얼리어답터 소비자들은 전기차를 구매했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구매 이유가 있어야 하는 소비자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이제 전기차는 내연기관차와 성능이나 가격 면에서 비슷해야 하며, 지금처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고, 사이즈와 디자인 등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켜야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죠. 이중 가장 기본 조건이 초기 비용(구매)과 유지 비용(충전)입니다.

테슬라와 중국의 몇몇 제조사를 제외하고는 구조적으로 낮은 가격의 전기차를 만들어 내는 일은 여전히 도전적 과제로 남아있어요. 접근성 높은 고속 충전소의 확충 또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죠. 전기차 수요가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여요.

△ 기존 제조사들의 전기차 투자가 주춤하고 있어요. GM은 생산 확대를 연기했고, 포드는 대규모 배터리 공장 계획도 철회했어요.

심상찮은 전기차 제조사들

2023년 10월 테슬라의 실적 발표에서 CEO인 일론 머스크는 “불확실성 속에서 전속력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고 언급했어요. 또한 멕시코에 10억 달러(약 1조 2900억 원) 규모의 신규 공장 계획을 연기할 수도 있다고도 밝혔어요. 50%의 성장률을 자랑했던 작년과는 많이 달라진 분위기예요.

전기차 업계 1위 사업자가 망설이는 만큼 다른 제조사들은 더 어려운 상황이에요.

GM은 디트로이트 공장에서 전기 픽업트럭 생산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연기했어요. 이 공장은 내년부터 GM의 주력 상품인 쉐보레 실버라도와 GMC 시에라 픽업의 전기차 버전을 만들기로 했던 곳이었어요. 계획은 2025년 말까지는 잠정 연기됐어요. 바이든 대통령이 ‘따봉’을 날렸던 허머(Hummer) 등은 디트로이트의 공장에서 만들 예정이지만 생산라인을 확대한다는 소식은 없어요.

포드는 이미 발표된 150억 달러(약 19조 원)의 전기차 투자 규모 중 120억 달러(약 15조 원)를 연기할 것이라고 밝혔어요. 실제로 한국의 배터리 파트너사인 LG에너지솔루션, SK ON과 함께 설립하기로 했던 미국 켄터키와 튀르키예의 배터리 공장 계획을 모두 철회한 상황입니다. 포드의 베스트셀링 전기차 브랜드인 머스탱 마하 E의 생산도 멕시코 공장에서 확장 생산하려고 했으나 그 생산능력(capacity)을 줄이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의 전기차 수요는 눈에 띄게 정체되기 시작했어요. 월스트리트저널이 시장조사업체 로 모션(Rho Motion)의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 7월부터 미국 내 순수 전기차의 월 판매량은 10만 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연 55%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이던 시장이었는데 올해 급격히 그 속도가 늦춰진 것이죠.

물론 미국의 전체 자동차 시장은 2017년 정점을 찍은 이후, 크게 성장하는 시장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내연기관차가 아닌 전기차 덕분에 판매량이 급격히 빠지는 대신 수요가 꾸준했고, 현재도 어느 정도 유지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는 시장이 전기차로 재편되는 상황 속에서 기존 제조사들이 전기차 전환으로 대대적 투자를 단행하기 시작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고요.

하지만 최근 들어 갑자기 관련 투자를 일부 철회하고, 보수적으로 경영을 시작했다는 것은 업계의 예상보다 빠르게 전기차 수요가 둔화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요.

소비자들이 망설이는 단계

큰 그림에서 보면 전기차 시장은 ‘캐즘’을 극복해야 하는 단계에 와있습니다.

새로운 혁신 기술이라는 이유로 전기차를 구매했던 소비자들은 일반적인 소비자 수용곡선에서 앞단에 위치한 혁신가, 얼리어답터로 분류되어요. 전기차가 진짜 대중화되려면 초기의 다수 수용자를 설득해 캐즘 구간에서 어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공급자 측면에서 그 차이를 메우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걸로 볼 수 있습니다.

캐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여전히 비싼 판매 가격이 꼽혀요. 지난 11월 8일 S&P글로벌 모빌리티가 발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는 이유 중 ‘가격’이 가장 큰 우려 사항인 것으로 나타났어요. 과거에는 주행거리 등 기술 관련 불안이 주요 요인이었지만, 이제는 소비자의 초기 비용이 가장 큰 허들로 작용하게 된 것이에요.

△ 기술 수용의 생애 주기(Technology Adoption Life Cycle) 그래프. 전기차는 ‘캐즘’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결국 가격이 가장 큰 원인

잠재 전기차 소비자가 가격에 더 민감해진 것은 급격한 금리 인상 때문이기도 하죠. 과거 고소득자를 대상으로 제한된 종류의 고가 전기차만 출시되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해요.

비교적 다양한 종류와 가격대의 전기차가 출시되며 전기차를 구매 옵션으로 생각하는 소비자의 풀이 늘었고, 일반적인 내연기관 차량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은 중요한 구매 결정 요소가 됐습니다. 가격에 비교적 둔감한 고소득 얼리어답터가 아니라, 이제 초기 다수자를 더 설득해야 하는 시기이죠.

시장조사기관 콕스오토모티브(Cox Automotive)에 따르면 2023년 10월 평균, 전기차 신차 가격은 약 5만 2,000달러(약 6,700만 원)로 1년 전의 약 6만 5,000달러(약 8,400만 원)보다 저렴해졌어요. 테슬라의 영향이 컸고 테슬라의 보급형 모델은 내연기관차 수준으로 내려왔어요. 하지만 다른 브랜드의 전기차는 여전히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가격대*가 대부분이라는 지적이에요. * 콕스오토모티브의 자회사인 켈리블루북에 따르면, 2023년 9월 신차의 평균 거래 가격은 4만 8,000달러(약 6,200만 원) 선으로 전기차 신차 가격보다 낮은 수준이다.

테슬라가 가격을 파격적으로 내렸어도 대대적인 소비 진작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출고가가 크게 내려가며 중고차 가격에 대한 예측 가능성과 더불어 소비심리를 흔들었기 때문이에요.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제조사가 있고, 없는 제조사가 있는 점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아직 혼란스러운 상황이고요.

부족한 충전 인프라

S&P글로벌 모빌리티의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는 두 번째 이유는 부족한 충전 인프라 때문입니다.

집에서 완속 충전을 하는 옵션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기차를 자택에서 충전할 여력이 있는 소비자는 많지 않아요. 낙후된 공동주택에는 충전기 설치가 어렵고, 이사를 다녀야 하는 소비자에게 자택 충전은 가용 옵션이 아니에요. 실제로 전기차 소유자 중 절반인 51%만이 집에 충전기를 설치했습니다.

특히 대부분이 고속 충전을 원하기 때문에 고속 충전이 지원되는 충전소가 필요해요. 정부에서 대대적 설치를 약속했지만 여전히 충전소의 절대적인 숫자는 부족하고 설치가 되었어도 고장이 나는 등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에요. 많은 경우, 일반 주유소와 달리 캐노피도 없이 충전기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가 많아요.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충전해야 하고 운이 나쁘면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기도 하죠.

일례로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내에서 상대적으로 충전 인프라가 잘되어 있는 지역으로 꼽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시범적으로 30개의 충전소를 돌아다니는 실험을 했어요. 그중 40%에서 문제를 겪었다고 합니다. 주유소에 들이는 시간과 개인의 노동 비용이 아직은 너무 커요.

△ 벤츠의 전기차 충전소. 비를 막아줄 캐노피와 쾌적한 환경이 기존 공공 충전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예요. (이미지: 메르세데스-벤츠)

충분한 가치를 줘야 하는 단계

지금까지의 상황을 요약하면, 다수의 소비자들이 전기차에 충분한 효용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이제 신기술이라는 이유 말고 사람들이 더 원하고 매력적으로 느끼는 가치를 제공해야 더 넓은 범위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전기차를 팔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테슬라는 미국 할리우드에 29개의 멀티플렉스 형태의 복합형 충전센터를 지을 계획이에요. 슈퍼차저가 기본이지만 식당과 드라이브인 극장이 건설되는 것으로 알려졌어요. 전기차를 어디서 어떻게 충전하느냐가, 전기차를 소유하는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이기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보여요.

이에 질세라 메르세데스-벤츠도 미국 400곳에 럭셔리 충전 스테이션 설립 계획을 발표했어요. 고속 충전기는 물론 조명이 잘 갖춰진 캐노피, 작업 공간, 스낵, 화장실을 갖춘 편안한 라운지를 제공한다고 해요. 호환만 된다면 모든 전기차 브랜드에 개방할 예정이고요.

모두가 전기차를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르노가 내놓은 트윙고와 같은 차량이 받는 기대도 커요. 르노는 이 소형 전기차의 가격을 2만 유로(약 2,800만 원) 미만으로 설정했어요. 테슬라보다 앞서 중국 제조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모델로 주목받고 있어요.

환경이 안 좋아지고는 있지만

물론 전반적인 전기차 판매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제조사들의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통해 실제 생산 비용이 낮아져야 해요. 테슬라와 몇몇 중국 제조사를 제외하고는, 당장 이를 실행하기 쉬운 여건은 아닙니다. 리비안, 루시드와 같은 신생 제조사는 대대적 설비투자와 공급망 구축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 대다수의 전통 제조사들 역시 전기차를 만드는 비용이 판매하는 비용보다 큰 실정이니까요.

장기적으로는 가격이 점점 내려갈 거예요. 다만,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비용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어요. 얼마 전, 전미자동차노조(UAW)와의 협상으로 디트로이트 3사와 혼다 등 미국에 생산 기반을 둔 제조사들의 생산 비용 인상은 불가피해졌어요. 이에 더해 중국 소싱을 지양하고 미국 내에서 공급망을 구축하는 온쇼어링 정책이 시행되며 대대적 비용 절감의 길이 보이는 시점은 조금 더 멀어졌죠.

이처럼 거시경제 환경과 시장 상황을 포함해 전반적인 사업 환경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제조사들에게 좋지 않은데요.

제조사들이 현재의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전기차가 주류 시장으로 전환하는 속도가 바뀔 걸로 보입니다. 골드만삭스가 내놓은 보고서처럼 배터리 가격의 하락과 이에 따른 전기차 전환율은 더 빨라질 걸로 예측되지만, 결국 캐즘을 극복하며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제조사의 큰 노력이 필요해요. 전기차 전환은 제조사에게 달려 있습니다.

Writer 캐롤라인

언론사와 스타트업을 거쳐 현재는 전기차 업계에서 일하고 있어요. 최신 전기차 트렌드와 그 후방산업인 배터리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Edit 손현 Graphic 함영범

본 글은 2023년 11월 21일(화)에 발행된 커피팟 뉴스레터에 기반해 2023년 11월 28일(화) 기준으로 재편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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