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팬이 필요하다

누구나 팬이 필요하다

by 차우진

2016년의 일이다. 평소에 갈 일 없던 모임, 그러니까 주로 대기업 임원들이나 스타트업 대표들의 네트워킹 모임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다들 어느 기업에서 무슨 업무를 맡고 있다는 식으로 자기 소개를 하기 때문에 당시 회사도 없고 직무도 없던 나로서는 괜히 자기소개에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00전자에서 웨어러블 사업을 총괄하고 있습니다’라는 중후한 소개 말에 이어 ‘저는 음악평론 하는데, 아니, 클래식은 아니고요, 대중음악인데, 아니 케이팝만 하는 건 아니고 인디 음악도 하는데, 아니, 평론이란 게 별점 매기는 건 또 아니지만서도, 네 뭐 서비스 기획도 했고, 콘텐츠도 만들고 에 또…’ 하는 게 얼마나 뻘쭘했을지 상상해보라.

어휴 괜히 왔네, 후회하던 찰나 뒷줄의 나이 지긋한 여성분이 자기 소개를 하는데 ‘00기업에서 마케팅만 30년을 맡고 있습니다’ 하더니 조금 부끄러운 듯 한 마디를 보탰다. “그리고… 저는 아미입니다.”

그 한마디에 주변 여성들의 호응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저도 아미에요!’ ‘상무님, 멋있으세요!’ 남성들도 관심을 보였다. ‘아미가 뭐에요?’ ‘에이 BTS 그거요…’ 그 한 마디에 대체로 근엄하고 지루했던 자리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어이쿠, 나도 그냥 샤이니 팬이라고 소개할 걸!’ 하는 후회는 안했다. (나도 소셜 포지션이 있답니다~) 대신, ‘이제는 덕질이 커리어와 같은 레벨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8년이 지났다. 지금 ‘아미’는 팬덤의 대명사이자 케이팝의 글로벌 영향력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또한 팬덤은 일종의 개념으로도 자리잡고 있다. 2016년엔 대기업 상무님의 ‘덕밍아웃’이 쿨하게 여겨졌다면, 2024년엔 신입 마케터 채용 조건에 ‘덕질’을 언급할 만큼 일반화되었다. 이제 팬덤은 사업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음악 산업에서 팬덤이 중요해진 이유

2024년 현재, 스포티파이 기준 하루에 업로드되는 음악은 12만 곡 정도다. 오타가 아니다. 12만 곡이다. 1곡 당 최소 3분으로 잡으면(음악의 길이는 점점 짧아져서 이젠 3분 30초가 보통이다) 총 6천 시간, 250일이 된다. 하루에 업로드되는 음악을 듣는 데에만 거의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음악만 이럴까? 유튜브는 더하다. 2018년 기준으로 유튜브에는 1분마다 약 500시간 분량의 콘텐츠가 업로드되는데, 이걸 다 보려면 82년이 걸린다.

그러니까 콘텐츠의 생산 수준은 이미 상식을 벗어났다는 얘기다. 그래도 생산 속도가 좀 느리진 않을까? 천만에. 생성형 AI가 가세하면서 그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라지고 있다. 1년만 지나도 영상과 음악 콘텐츠는 지금의 몇 배는 늘어날 수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콘텐츠 무한공급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야말로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상하던 바로 그 ‘문화 예술이 일상이 된 시대’다. 어서오세요, 문화 예술 콘텐츠가 흘러넘치는 디스토피아에.

생산자로서는 노출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세상 어딜 둘러봐도 ‘마케팅’이 문제고, 곳곳에서 마케터가 자주 눈에 띄는 이유다. 그런데 마케팅의 역할은 애초에 광고 집행이 아니라 효율적인 시장을 개발하는 것이다. 시장이 있어야 광고도 쓸모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미디어가 많아도 너무 많다. 기껏해야 텔레비전, 신문, 잡지, 라디오가 전부였던 ‘매스 미디어’ 시대에는 몇 개의 광고만으로도 큰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제품을 사주세요! 우리 음악을 들어주세요! 우리 영화 보러 극장에 오세요!

하지만 지금은 무수히 많은 콘텐츠 채널과 앱 서비스가 알아서 돌아가는 시대다. 스마트폰 사용자는 전세계 55억명을 돌파했고, 이들은 스마트폰을 개인용 TV, 극장, 오디오, 게임기로 쓰고 있다. 55억개의 미디어가 존재하는 셈이다. 있는 줄도 몰랐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5만, 10만, 20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떠올려보자. 2024년은 콘텐츠도 많은데 그걸 안내하고 유통하는 채널도 무수히 많은 시대다.

그래서 팬덤이 중요해졌다. 팬덤의 부상은 미디어 분화의 결과다. 팬덤은 명확한 타깃의 총합이다. 홍보 효과가 큰 반면, 마케팅 비용은 적게 든다. 전환율도 높다. 팬은 기능이나 가격이 아니라 스토리와 드라마에 끌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감이 중요하다. 소비자들은 천천히 마음을 열다가  마침내 시간과 애정이라는 고귀한 ‘자원’을 쓰는 팬이 된다. 한국의 케이팝 팬들은 이들을 ‘덕후’라고 부른다. 다른 업계에서는 ‘찐팬’이라고 부른다. 해외에서는? ‘슈퍼 팬’이라고 부른다.

슈퍼 팬은 왜 중요할까?

음악 업계에서 ‘슈퍼 팬’이란 말이 유행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음악, 영화, TV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회사 루미네이트(1990년에 빌보드 차트의 현대적 솔루션을 만든 회사다)는 2023년 7월에 50페이지 분량의 상반기 음악시장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슈퍼 팬’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음악 산업에서 슈퍼 팬은 스트리밍 청취, 뮤직비디오 시청, 음반 구매*, 공연 참여, 굿즈 구매 등 최소 5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한 아티스트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로 정의한다. 미국의 슈퍼 팬은 일반 리스너와 비교해서 매달 음악에 80% 이상의 돈을 쓰는데 루미네이트는 이러한 슈퍼 팬이 미국 음악 시장 전체에서 최소한 15%를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22% 이상), Z세대(13% 이상)가 주요 그룹이다. *일단 피지컬(실물) 앨범을 구매한다면 슈퍼 팬이 될 가능성이 2배 이상 높다.

우리는 이 슈퍼 팬이 대부분 케이팝 팬일 거라고 예상하지만 놀랍게도 아니다.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아프로-팝(블랙뮤직)의 팬들이고, 그 다음이 케이팝, 그 다음에 EDM이다. 다만 케이팝 팬들은 다른 장르 팬들에 비해 음반과 굿즈를 더 많이 구매한다. 그래서 미국 음악 업계는 요즘 케이팝에 관심이 많다.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리길래 저렇게 많은 팬들이 저렇게 많은 CD와 굿즈를 사는 걸까? 2024년인데! 딱 이런 궁금증이 케이팝에 대한 관심과 호감을 키운다. 유니버설뮤직그룹(UMG)이 하이브와 계약을 맺고, 워너뮤직그룹(WMG)이 위버스와 비슷한 팬덤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실 음악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슈퍼 팬을 찾는 방법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팬을 찾는 방법론은 기존의 마케팅 방법론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팬은 소비자가 아니다. 팬은 부가 가치도 아니다. 팬은 수익 그 자체를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산업을 지탱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슈퍼 팬은 비즈니스 모델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런데 또한, 팬은 비즈니스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수익율과 전환율 같은 이런저런 지표를 관통하면서 팬은 마침내 문화를 만든다. 그래서 중요하다. 팬을 찾고 싶다면 결국 팬을 관찰하고 팬 문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걸 통해 팬을 어떻게 정의하고, 팬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팬과 무엇을 함께 할 것인지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팬덤 비즈니스다.

팬덤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면 음악 산업의 슈퍼 팬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음악계 뿐 아니라 누구든 팬을 원하는 시대다. 여기서 ‘누구나’란 말이 질소로 빵빵한 과자 포장지 같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정말로 누구나 팬을 원한다.

2021년부터 ‘팬덤 경영’을 강조한 LG는 지금도 팬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애플은 말할 것도 없고, 짝퉁으로 놀림받던 샤오미와 다이소도 이제는 팬덤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어벤저스4: 엔드 게임] 이후 지지부진하던 마블은 어떤가? 얼마 전 공개한 [어벤져스5: 둠스데이]의 메인 빌런 ‘닥터 둠’으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섭외했다. 그가 연기한 슈퍼히어로이자 팬층이 두터웠던 ‘아이언 맨’은 전작에서 사망해 MCU에서 영영 사라졌는데, 신작에서 갑자기 우주 최강 빌런으로 부활한 것이다. 마블은 이제 꽤 복잡한 퍼즐을 맞춰야겠지만, 팬들은 일단 열광했다.

F&B 업계에서도 팬은 중요하다. 올해 4월, ‘한식의 글로벌'이라는 주제로 [난로 인사이트 2024]라는 컨퍼런스가 열렸다. 행사에는 월드 챔피언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스페인의 센트럴(Central)과 디스푸르타르(Disfrutar)의 셰프들, 미국에서 한식 푸드트럭의 신화를 쓴 컵밥(CUPBOP)의 송정훈 대표, 유럽에서 한식 프랜차이즈를 개척 중인 요리(YORI)의 김종순 대표와 같은 사업가들이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나는 케이팝과 뉴진스, 팬덤 비즈니스에 대해 발표했다. 행사가 끝나고도 여러 셰프들과 자리를 옮기며 글로벌, 브랜딩, 팬덤에 대해 동이 틀 때까지 대화를 나눴다.

유튜브가 매년 발행하는 ‘컬쳐 & 트렌드 리포트’의 2024년 주제*도 '팬덤'이었다. 유튜버만큼 팬들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그야말로, 지금은 팬의 시대다. 그래서 아티스트나 크리에이터들 뿐 아니라 브랜드 마케터, 콘텐츠 기획자들은 팬을 관찰하고, 팬 문화를 더 많이 경험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루미네이트의 보고서에는 음악의 슈퍼 팬이 왜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가 등장한다. 음악의 슈퍼 팬은 스포츠 팬*에 비해 브랜드 파트너십에 매우 호의적이다. 쉽게 말해 아티스트가 어떤 브랜드의 광고 모델이 된다고 해도 거부감이 거의 없다. 음악이 브랜드 광고에 쓰여도 그러려니 한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브랜드 구매로 이어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그 브랜드를 알리기도 한다. 심지어 음악 팬들은 스포츠 팬에 비해 온라인 쇼핑이나 화장품, 배달 음식에 대해서도 더 호의적이다. *미국 사회에서 팬은, 한국과 달리 여전히 서브컬쳐에 머무는 존재다. 할리우드 청춘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회성 부족한 인물이 ‘덕후’나 ‘너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나마 ‘의미있는 집단’으로서의 슈퍼 팬은 스포츠에 국한되는데, 보통 미식축구, 농구, 야구 팬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많았다. 음악의 슈퍼 팬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다. 그래서 종종 스포츠의 팬들과 비교된다.

쉽게 말해, 음악 팬들은 일반 소비자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쓴다. 우리 비즈니스의 팬덤을 음악의 슈퍼 팬처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바로 화장품 회사든 대기업이든, 음악 팬들을 이해하고 음악 산업을 살펴야봐야 할 이유다.


Edit 송수아 Graphic 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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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진

20년차 음악평론가. 2020년부터 TMI.FM(Tomorrow of the Music Industry)이란 뉴스레터를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분석하고 있다. 가끔 컨설팅과 투자 자문도 하지만, 주로 듣고 보고 읽고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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