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자금은 어떻게 모았을까?
ㆍby 심용환
독립운동도 ‘돈’이었다
1907년, 조선은 참담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고종은 최후의 저항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특사를 파견해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지만 국제 사회는 외면했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고, 영국과 미국 역시 일본을 지지하며 러시아를 견제하는 것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1907년, 일본은 자신만만했다. 헤이그 특사 파견에 책임을 물어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정미7조약*을 맺어 조선 지배를 강화했다. 군대도 해산시켰다. 시위대 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은 격분 끝에 자결했다.
*1907년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법령제정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 임명 등 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망 같았던 1907년. ‘번개대장'이라 불리는 이가 등장한다.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의병으로 신출귀몰하며 활약한 ‘한봉수'다. 한봉수는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켰다.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충청, 강원 지방에서 34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싸워 사살 70명, 무기 노획 80점, 현금 탈취 77만 원과 같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기사에서는 한봉수를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 1908년 1월 강원도 초정리 전투에서는 세금운반을 호위하는 일군을 습격, 적 3명을 사살하고 현금 77만 원을 탈취,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운동자금을 대주었다. -조선일보 1972년 12월 27일 기사 중
그렇다. 독립운동도 ‘돈’이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투쟁을 하며 싸움을 이어갈 수 있겠는가.
독립운동은 빚더미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중요했던 것도 돈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지속적으로 상권을 확대하였다. 개항장에서의 무역은 조선 땅 어디에서든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내지 통상권 확대로 이어졌고 일본인들은 다양한 물건을 판매, 유통하면서 시장에서의 지위를 강화해 갔다.
그리고 1905년,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에 의해 화폐개혁마저 일어났다. 조선에서 발행하던 백동화와 엽전을 신화폐로 바꾸면서 통화 정책이 통째로 일본에 종속된다. 이 시기 일본은 우리에게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도록 강요한다. 즉, 빚을 지게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일본은 궁궐에 전기를 보급하고, 도성에 전차를 놓았다. 오랜 기간 재정 적자에 시달리던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들여오는 돈다발에 매몰되어갔다. 1907년까지 들여온 차관은 무려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했다. 오죽하면 1907년 나라빚을 갚겠다고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정도였을까.
*일본에 진 빚을 갚고자 일어난 운동. 대구에서 서상돈 등이 주장하여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어쩌면 을사조약이나 러일전쟁은 이러한 심층적인 경제종속을 공식적으로 합법화하는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식민화는 조선이 일본을 상대로 빚더미에 오르는 과정이었으며, 독립운동은 그러한 빚더미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영화〈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모티브 15만 원 탈취 사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방법 중에는 번개대장 한봉수처럼 일본군과 직접 맞서 돈을 강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보편적인 것은 ‘현금을 싣고 달리는 마차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우편을 통해 돈을 옮기던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그중 유명한 사건은 철혈광복단의 ‘15만 원 탈취사건’이다.
1919년, 두만강 유역인 ‘간도’에서 만들어진 독립운동조직인 철혈광복단은 정보를 하나 입수하게 된다. 1920년 1월 4일, 일제가 조선은행에서 간도까지 15만 원을 수송한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톡 의 무기시장에서 ‘소총 한 자루와 탄환 100발’을 세트로 3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5만 원이면 소총 5,000자루와 탄환 50만 발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김하서 등은 현금을 싣고 가던 마차를 습격해 무장 호송대를 사살하고, 철궤에 담긴 지폐 15만 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간도 15만 원’ 사건의 주역들. 사진 위쪽에 ‘1919년 간도 십오만원 사건에 관한 모험가들’ 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이들이 뺏은 돈은 무기 구입에 사용되었고 청산리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의 무력 강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거사를 도모했던 대부분은 일본의 끈질긴 추적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1919년 만주에서 김좌진을 중심으로 조직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
조직적으로 이뤄졌던 여성들의 모금 활동
우리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다….이번에 조선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널리 회원을 모집하여 전국 부녀들이 독립을 위해 전력함이 어떠합니까? -매일신보 1919년 12월 9일 기사 중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조직한 독립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이끌었던 김마리아의 발언이다. 김마리아는 1919년 3.1운동에 앞서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의 주모자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중이던 그는 2.8독립선언문을 몸에 숨기고 국내로 들어와 전국의 교회를 방문해 3.1운동의 열기를 이끌어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
(왼쪽부터) 김마리아와 독립운동가 안창호, 차경신. 차경신은 대한애국부인청년단연합 대표로서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어디 김마리아뿐이겠는가. 3.1운동에서 여학생들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자 하였다.
1919년 5월부터 약 3개월간 이들은 회비로 747원을 모금해 300원 정도를 임시정부로 보냈다. 당시 미곡 1석에 45원이었으니 300원이면 쌀가마 7석 정도의 그다지 크지 않은 금액이었다. 애국부인회는 조직을 정비하고 모금에 힘쓴 결과 같은 해 11월에는 군자금으로 2천 원을 보낼 수 있었다. 일제의 엄중한 감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닌 여성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3.1 운동의 중심이었던 종교계
독립운동자금 이야기를 할 때 빠질 수 없는 또 다른 주체는 종교계다. 당시 천도교는 동학농민운동을 계승하며 전국적으로 퍼진 종교였다. 천도교는 3대 교조 손병희를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1918년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지을 목적으로 100만 원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건물을 짓는 데는 27만 원 정도가 들었고, 나머지 자금은 3.1운동과 해외 독립운동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앙대교당은 오늘날 인사동에 여전히 남아있다.
천도교가 전국적이고 농민을 기반으로 한 반면, 개신교는 주로 평안도에 밀집해 있었고 자금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개신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은 천도교 3대 교조 손병희에게 도움을 구한다. 3.1운동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손병희는 흔쾌히 5천 원을 지원했다. 이 돈은 오롯이 민족대표를 비롯한 활동가들의 여행 경비, 독립선언문 배포 비용 등으로 쓰였고, 3.1운동 이후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잡혀들어간 이들의 가족 생계비로도 쓰였다.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번 돈을 고국으로
타국으로 떠난 교민들도 힘을 보탰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미주 지역의 교민들이 보여준 꾸준한 모금 활동이다. 1920년대 기준으로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 미주 지역에는 약 1만에 달하는 교민들이 살고 있었다.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일자리를 찾아 이곳까지 왔던 것이다. 고단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한인국민회’ 같은 단체를 조직해 해방 직전까지 독립운동사의 가장 든든한 자금 후원처가 되었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자금은 8만 5천 달러 정도다. 단순하게 달러의 인플레이션만을 고려해 보았을 때 오늘날 약 18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회원들의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하와이에서 결성된 ‘대조선국민군단’의 경우 파인애플 농장을 운영하는 등 이익을 거두어 약 2만 2천 달러를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에 사용하였다. 대한부인구제회는 1920~30년 기간 동안 만주 일대의 독립군 세력과 임시정부에 약 20만 달러를 후원하였고 북미대한인국민회는 1940년대 충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4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가난을 피해 건너간 낯선 땅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은 이렇게 민족사의 일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독립운동은 결국 돈의 가치를 증명한 싸움이었다. 사람들이 땀 흘려 번 돈,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모인 돈은 마땅히 이렇게 쓰여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 싸움이었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함영범
– 해당 콘텐츠는 2023.8.7.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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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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