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우리나라에는 어떤 산업이 흥했을까?
ㆍby 심용환
1950년대 한국을 먹여 살린 하얀색 3가지
해방 후 1950년대 한국경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삼백산업’. 밀가루, 설탕, 면직물. 세 가지 흰색 산업이라는 뜻으로 1950년대 우리나라에서 발달했던 산업이다. 삼백산업은 외국에서 들여온 원재료를 가공해서 판매하는 형식이었다. 밀을 들여와 밀가루를, 원당으로 설탕을, 면화로 면직물을 만드는 식이었다.
밀가루와 면직물은 생필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밀가루는 식료품이고, 면직물은 옷을 만들 뿐만 아니라 1950년대까지 화폐처럼 거래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설탕은 어쩌다 195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을까? 소금도 아닌 설탕이 말이다. 설탕 산업이 성장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해방 직후의 경제 상황과 한국전쟁 등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처: 제일제당주식회사, 《제일제당30년사》, 제일제당주식회사, 1983, 524p
한반도 전 재산의 85%를 소유했던 일본
일본의 조직적인 수탈과 무책임한 국가 운영으로 식민지시기 조선인들의 경제적 상황은 피폐했다. 해방 직후 일본의 해외재산 조사에 따르면 개인, 기업, 정부를 포함해서 일본이 한반도에서 소유한 자산은 북한에 약 29억 7천 달러, 남한에 약 22억 7천 달러였다. 당시 추산 가능했던 한반도 전 재산의 85%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독립운동가 조소앙은 조선을 ‘노예적 상태'라고 표현할 만큼, 식민지 경제란 참으로 가혹했다.
1945년 해방 후,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얼마 되지 않아 전쟁까지 겹쳤으니 한반도 역사에서 이만큼 힘들었던 시기도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일제강점기 때 정상적인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자산마저 6.25전쟁을 통해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원조경제’라고도 한다. 미국 군인들이 나누어주는 미제 초콜릿부터 수백만 달러의 현금 지원까지 무너진 한국경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문화적 영향도 함께 받게 된다.
설탕의 원료인 ‘원당' 또한 미국의 물자 원조로 들어오게 된다. 1953년 미국과 UN이 발표한 한국 재건 계획 중에는 ‘제당 공장 설립안'이 있었다. 설탕 산업을 키워 한국 경제를 전쟁 전 수준까지 회복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미국과 UN이 한국경제 실태조사 후 발행한 ‘네이산 보고서(Nathan Report)’와 한국경제 문제에 대한 대통령 특사 보고서인 ‘타스카 보고서(Tasca Report)’를 보면 설탕 산업을 육성해 한국경제를 전쟁 전의 수준까지 회복하겠다는 계획을 볼 수 있다.
당시 국내에 설탕을 만들 수 있는 공장은 없었다. 우리는 설탕을 수입해 쓰고 있었는데,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1953년경, 수입 설탕은 1근(0.6kg)에 300환 정도였다. 소고기 1근이 약 150환 정도였다고 하니, 수입 설탕은 굉장히 비싼 식재료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설탕공장을 세우다
설탕의 원료가 대량으로 들어오자, 이를 산업화하려는 이들이 생겨났다. 삼성물산의 이병철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삼성물산은 당시 제당업을 비롯해 여러 사업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일본 종합상사인 미쓰이물산에 설탕, 페니실린, 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건설 비용과 설비 비용을 산출해 달라고 요청했고 결과적으로 설탕을 택했다.
1953년 3월,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은 삼성물산은 우리나라 역사 최초의 정제당 회사인 ‘제일제당'을 만들어 그해 11월, 부산에서 설탕을 생산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백설, CJ제일제당의 시작이다. 제일제당은 설탕값을 1근당 100환으로 정했다. 수입 설탕의 ⅓ 가격이니 설탕은 불티나게 팔렸고, 다음 해 생산 설비를 2배로 확장했다.
수입에 의존하던 설탕을 직접 생산한다는 것은 자못 의미가 크다. 일본이 아닌 우리 손으로 직접 생산 공정을 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설탕 생산으로 인한 파생 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제당의 뒤를 이어 많은 업체들이 설탕생산에 뛰어들었다. 삼양제당, 동양제당, 대동제당 등이 1950년대 등장한 제당 회사들이었다.
해태, 오리온 그리고 빨간 떡볶이의 탄생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설탕을 만들게 되면서 과자, 간식 등의 제과 산업이 발전했다. 맛동산, 홈런볼, 에이스 등으로 잘 알려진 해태제과도 이 시기에 인기를 얻는다. 일제강점기 나가오카 제과의 판매 사원이었던 민후식은 신덕발, 박병규, 한달성 등 동료들과 함께 1945년 나가오카 제과를 사들여서 해태제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0년대 해태제과의 주력 상품은 캐러멜이었다. 코코아, 커피, 버터 등 원조를 통해 새로운 물품이 들어오자 다양한 맛을 더해 ‘쵸코카라멜’, ‘맘보카라멜’, ‘빠다카라멜’, ‘커피카라멜’ 등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1954년 한국정당판매주식회사를 세우고, 제일제당의 설탕을 독점 판매했던 이양구는 2년 뒤 토요쿠니 제과를 동양제과로 바꾸면서 제과 산업에 뛰어들었다. 동양제과는 이후 사명을 ‘오리온 제과'로 바꾸게 된다. 동양제과는 ‘오리온' 브랜드를 강조하면서 ‘밀크카라멜', ‘뻐터카라멜' 등을 만들어 팔았다. 캐러멜과 더불어 츄잉껌, 젤리, 웨하스, 양갱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다.
이 시기 커피도 큰 인기를 끌었다. 커피, 크림, 설탕을 각자 기호에 맞춰 달달하게 마시는 문화였는데, 다방이 번성하면서 이러한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된다. ‘2:1:1’ ‘커피 둘, 설탕 셋' 등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설탕은 커피에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1950년대 설탕 산업의 발전에서 빼놓고 이야기하면 섭섭한 또 다른 음식은 바로 떡볶이.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떡볶이는 간장으로 양념한 음식이었다. 가래떡과 고기, 야채를 두루 섞은 후 간장으로 버무림을 해 먹었다. 1953년, 외식사업가 마복림이 고추장에 설탕을 섞어 만든 양념으로 떡볶이를 만들면서 빨갛고 달달한 떡볶이가 크게 유행한다. 신당동 떡볶이의 원조다. 어디 떡볶이뿐인가. ‘무교동 낙지볶음’, ‘제육볶음’ 등 1950년대 탄생한 모든 음식에는 설탕이 들어간다. 매콤달콤한 음식이 주류 문화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설탕'을 활용해 돈을 벌었고, 다양한 분야와 접목되며 우리 사회문화를 본격적으로 변화시켰다.
우리나라는 원래 단 걸 좋아했을까?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래 단 것을 좋아했을까? 설탕은 언제부터 우리 생활에 필수품목으로 자리 잡았을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설탕은 왕실의 구급약이었다.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가 병이 났을 때 사당(설탕)을 먹고 싶어 했는데도 맛볼 수 없었다고 했을 만큼 귀한 식재료였다. 단맛을 내는 대표적 음식은 엿이었는데, 엿 또한 왕의 원기를 돋우는 보양식 대접을 받았다.
중국은 남방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기 때문에 이미 명나라 때부터 설탕은 서민들이 먹는 보편적인 음식이었다. 하지만 근대적인 제조방식으로 생산된 서양식 설탕이 들어오면서 중국의 설탕 산업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일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맛을 즐기는 행위는 사치였다. 하지만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적극적으로 서양 문화를 수용하면서 설탕이 들어간 과자, 음료를 먹기 시작했다. 설탕이 들어간 빙수, 커피, 박하사탕, 레모네이드, 카레라이스, 돈가스, 오므라이스 등이 우수한 식단으로 평가 받으며 문화적으로 정착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것들이 고스란히 식민지였던 조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본은 서양식 과자를 일본화하였고 제과 회사를 설립해 조선인들의 입맛을 바꾸어 갔다. 대표적인 상품이 센베이, 모찌(찹쌀떡), 오코시(밥풀과자), 모나카, 양갱, 카스텔라, 슈크림, 눈깔사탕 등이었다.
1920년대 가장 인기 좋은 상품은 냉수에 설탕물을 넣어 시원하게 만든 ‘냉차’였다. 길거리에서 파는 냉수설탕물의 경우 유리컵 한잔에 1전이었고, 우유, 설탕, 계란, 바닐라 향료 등으로 맛을 더한 일명 ‘요리집'에서 팔았던 고급 냉수는 개당 25~30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빙수가게 개업 비용이 20~60원 정도였으니, 고급 냉수의 경우 자그마한 빙수가게 개업 비용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1932년 ‘아이스케키(얼음과자)’가 단맛 열풍을 일으켰다. 소규모 제빙이 가능해지면서 전국에 아이스케키 제조공장이 만들어졌다. 1935년 175개, 다음 해에는 217개로 늘어났고 1936년 평양에서만 빙과과게가 2백 개를 넘었다고 한다. 냉차의 시대가 끝나고 아이스크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939년 경주에서는 날마다 7천 개씩 만들어 한 달에 21만 개를 판매할 정도였으니 한국인들이 단맛에 길들여지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스케키 행상, 대전서에서 단속 ‘아이스케키’ 장사는 판매하기 시작한다는데 도위생과에서는 가장 대중적이며 동시에 한 사람 앞에도 매일 몇 개식을 먹어야 견디는 아이스케키를 조흔품질로 향상시키기 위하여 또는 불량물품을 절대방지하기 위하야 금년에는 단연히 탄압을 내리어 악질품방지에 노력하리라는데... - <동아일보> 1938년 4월 15일 기사 중
1945년 8월 15일 단 맛, 우리 것이 되다
일제 강점기의 문화적 변화를 고려한다면 1950년대 설탕을 활용한 각종 제과 산업의 발흥은 필연적인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해방의 감격과 전쟁통의 혼란에도 과거를 기억하고 1950년대의 스타일, 즉 일본식이 아닌 캐러멜, 젤리, 크래커, 비스킷 등 미국식 과자를 만들어 내고자 했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주효했다는 점이다.
사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식을 표방’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미국산 양과자에 비해 한국인들이 만들어 낸 먹거리는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은 한국 산업 발전의 역사와 맞물리면서 단계적으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에 들면서면서 맛을 만들기 위한 기반 시설이 마련되었다. 대규모 고추장 제조 시설 등 맛을 내는 감미료 생산 기지가 이때 비로소 구축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가파른 경제 성장과 넉넉한 경제 사정, 그리고 오랜 기간 억눌렸던 문화적 욕구가 결합이 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다양한 음식들이 등장하여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죠스바, 수박바부터 양념치킨, 김밥 체인점 등 가히 맛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더불어 세계화의 여파 가운데 KFC, 맥도날드, 배스킨라빈스 같은 각종 해외 브랜드의 상륙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입맛의 가능성을 열기도 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며 맛난 음식을 소비하고, 또한 수출까지 하는 나라가 되었다.
시장에서의 수요는 놀랍게도 역사적이다. 시작은 미약했더라도 부단한 과정이 의미 있는 시장을 만들고, 한번 만들어진 시장은 여타의 것들과 합쳐지면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100년 전 우리는 일본인들을 통해 단맛을 경험했지만,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해방은 ‘단맛이 우리 것’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 해당 콘텐츠는 2023.8.7.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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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함영범
성균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외래교수이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역사와 인문학 공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다. 다양한 기관, 지자체, 매체 등을 통해 사람들과 호흡하는 인문학 강의를 한다. KBS 〈역사저널 그날〉, MBC〈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출연과 《1페이지 한국사365》를 비롯해 《리더의 상상력》,《꿈꾸는 한국사》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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