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피프티의 소속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리적일까?

by 유성운

걸그룹 이코노믹스 2화. 걸그룹 피프티피프티 제작비와 매몰비용

"저희도 50억원 들었는데요?"

얼마 전 중소기획사 관계자 A와 점심을 먹다 지난해 한 걸그룹을 데뷔 시키기까지 들인 비용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전에 걸그룹 제작비를 구체적으로 확인했던 게 2012년 B 걸그룹 35억원이었다. 꽤 덩치 큰 기획사가 제법 돈을 많이 들인 축이었다. 이 얘기를 꺼냈더니 “어휴, 언제적 이야기를… 요즘 제작비가 얼마나 많이 올랐는데요. 그 정도론 어림도 없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기획사 사람들은 돈 얘기를 극히 꺼린다. 특히 제작비는 곧 정산과 맞물리기 때문에, 서로 묻고 답하지 않는게 암묵적 룰이다. 이날 과감하게 제작비를 물어볼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A도 살짝 망설이다가 대답해준 이유는 바로 걸그룹 ‘피프티피프티 사태’였다. 한동안 화제를 몰고 다닌 피프티피프티와 소속사 어트랙트 간 법적 공방에서 피프티피프티의 제작비가 무려 60억원이었다는 점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K-POP 제작비가 비싼 이유

작년에 해외에서 지내면서 외국인들과 K-POP 산업 구조에 대해 이야기를 몇 번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기획사가 아이돌 발굴부터 트레이닝, 숙식, 앨범 제작, 데뷔, 마케팅 일체, 때로는 학업까지 맡는다는 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특이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1960년대 세계 최고의 아이돌 ‘비틀즈’는 영국 리버풀의 클럽에서 밴드 활동을 하던 중 음반 가게 사장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하던 이들이 작은 무대를 찾아다니며 활동하다, 음반사나 제작자의 눈에 띄어 더 큰 무대로 진출하는 식. 반세기가 지났지만 영미권의 스타 발굴 과정은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K-POP 아이돌은 기획사를 만나기 전까지 대부분 백지 상태다. 기본적인 악기나 보컬 훈련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디션을 본다. 걸그룹 하나가 데뷔하기까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이유다.

기획사는 ‘잠재력’ 있다고 판단되는 멤버들을 선발한 뒤 댄스, 보컬 트레이닝을 시킨다. 음반과 뮤직비디오 제작비는 물론, 숙소와 생활비까지 모두 기획사가 부담한다. 피프티피프티도 ‘큐피드’ 음반 제작비용만 12억원을 썼다고 한다. 데뷔 후에도 각종 스케줄마다 유류비와 식비, 헤어와 의상비, 매니저 인건비까지 나가는 돈이 줄줄이다.

걸그룹이 돈을 벌기 시작해도 이 초기 비용을 모두 회수하고 난 뒤에야 멤버들이 정산 받을 차례가 된다. 그 시기는 상대적이다. 데뷔 하자마자 초대박을 친 뉴진스처럼 2개월 만에 정산이 시작되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데뷔 6년 가까이 정산 없이 활동하는 그룹도 있다. 간혹 그룹의 장래가 밝다고 판단돼 비용을 전액 회수하기 전 수익을 분배하는 ‘천사같은’ 기획사도 있지만, 극히 예외적이다. 사실 활동 기간 내내 정산을 받지 못하는 걸그룹이 90% 가까이 된다고 한다.

이런 정산 시스템은 그래서 종종 '노예 계약'에 비유된다. 기획사의 '선의'가 작동하지 않으면 계약 기간 내내 무보수로 일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획사가 걸그룹을 만든다는 것은 금광 찾기에 뛰어드는 것처럼 확률이 희박한 일이다. BTS나 트와이스 같은 ‘노다지’가 나타나리라 믿고 투자를 끌어들이고 채굴을 시작하지만, 대부분은 금광을 찾지 못하고 끝난다.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데뷔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정산을 해주지 않는 소속사가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탐욕스러운 상인 샤일록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기획사들은 “발굴부터 연습, 숙식, 데뷔까지 수십억원이 들어가지만 실패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 실패로 인한 손실은 모두 회사가 떠안는다”고 항변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블로그, 트위터 등에서 피프티피프티가 언급될 때 함께 등장한 감성 키워드를 추려봤다. 피프티피프티가 소속사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6월 17일을 기준으로, 긍정 85%에서 부정 68%로 여론이 급격하게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피프티피프티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여론이 싸늘했던 것도 이런 이유다. 피프티피프티는 지난해 데뷔한 뒤 국내에서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올해 4월 ‘큐피드’가 빌보드 Hot 100 차트에 오르면서 단숨에 주목받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피프티피프티 멤버들은 소속사 어트랙트를 상대로 불투명한 정산 등을 문제 삼아 전속계약을 즉시 중지시켜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사실 이들은 빌보드 차트에서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음반 판매는 저조했다. '큐피드'가 삽입된 앨범의 첫 주 판매량이 약 1만2000장에 그쳤다. 뉴진스가 지난 1월에 낸 ‘OMG’가 초동 70만장 팔린 것과 크게 대비된다.앨범 판매 외에 공연이나 굿즈 판매 등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피프티피프티는 콘서트를 연 적도 없고 굿즈를 사들일 팬덤도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 말해 해외에서는 ‘큐피드’가 대박을 쳤지만, 아직 정산을 요구할만한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법원은 “(멤버들의) 요구를 수용할 긴급한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고, 멤버들은 이에 항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속사 어트랙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매몰비용’이라는 경제학 개념이 등장한다.

매몰비용의 딜레마

"재개발 등 지구 지정이 해제된 곳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사업이 중단될 때까지 투입된 매몰비용이다. 감사원은 서울시 뉴타운 사업으로 주민들이 부담해야 할 매몰비용을 1조 4000억~1조 7000억원으로 추산했다." – 한국경제, 2015년 1월 16일

몇 년 전 서울시를 뜨겁게 달궜던 뉴타운 사업 중단에 관한 기사에도 매몰비용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미 지출해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용,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그대로 묻어버리게 되는 비용을 경제학에서 매몰비용(Sunk cost)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간의 매몰비용, 즉 본전 생각에 이미 실패한 (혹은 실패가 예견되는) 일에 시간과 돈을 더 투자하는 것을 경제학자들은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부른다. 손실로 인한 고통 때문에 인간은 종종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일상에서도 매몰비용의 오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사랑이 식었음에도 4년간 연애한 시간이 아까워 "이별하자"는 말을 못하는 친구, 2년 전 몇 달치 월급을 쏟아 부어 산 코인이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물타기'를 거듭하는 내가 그렇다.

법적 다툼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피프티피프티 멤버들에게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할테니, 돌아와 달라"던 소속사 어트랙트도 어쩌면 본전 생각이 간절했을지 모른다. 멤버들이 아무리 미워도 제작비 60억원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특히 소형 기획사인 어트랙트로서는 ‘영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금이다. 여기서 피프티피프티를 끝낸다면, 이 돈은 모두 매몰비용으로 땅속에 파묻혀버린다. 아무리 막장 드라마 같은 소동을 벌였더라도, 다시 무대에 서면 모든 일이 잘 풀릴 수 있지 않을까? 희망회로를 돌리게 된다.

하지만 사태를 지켜보던 한 메이저 기획사 관계자 C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피프티피프티는 이미 ‘배신돌’로 낙인 찍힌 상황이라, 어트랙트로 돌아오든 독립하든 국내 활동은 거의 끝났다고 봐야해요. 인기를 회복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에 따르면 어트랙트는 ‘매몰비용의 오류’에 빠졌던 셈이다.

업계에서 매몰비용을 과감히 포기했던 사례도 있다. 2016년 화려하게 데뷔한 9인조 걸그룹 구구단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를 통해 큰 인기를 얻은 김세정, 강미나가 구구단 멤버에 포함되면서, 데뷔 전부터 큰 성공을 거둘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데뷔 후 단 한 곡도 차트 1위에 올리지 못한 채, 2020년 해체됐다. 통상 걸그룹의 계약 기간이 7년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소속사 젤리피쉬가 매몰비용을 어느 정도 떠안은 셈이다. 물론 이들의 해체에 팬들은 굉장히 분노했지만 말이다.

메뉴비용이냐 매몰비용이냐

일각에서는 피프티피프티라는 이름은 남겨두고 멤버들만 교체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피프티피프티'라는 팀명은 인지도가 높지만 멤버 각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터무니 없는 발상은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그레고리 맨큐가 창안한 '메뉴비용(Menu cost)'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심각해질 때 상점이나 식당이 물건 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가리킨다. 가격표나 카탈로그를 새로 만드는 비용 뿐 아니라, 가격 인상을 알리는 광고비, 너무 비싸 손님이 더이상 물건을 사지 않는데 따르는 손실도 모두 메뉴비용으로 본다. 한번 고객이 떠나가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수그러들 때까지 가격을 올리지 않고 버티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이런 경제학적 개념에 피프티피프티의 상황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비상 상황에 돌입한 어트랙트 입장에서 피프티피프티 멤버 교체는, 인플레이션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가게가 추가 비용을 감수하고 가격 조정이라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에 비유해 볼 수 있겠다. 멤버를 바꾸고 새롭게 홍보하는 데에도, 이전 멤버와 관련된 콘텐츠를 회수하는 데에도 추가적인 비용이 든다. 고객, 즉 팬덤의 이탈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피프티피프티로 활동한 기간이 아직 길지 않고, 기존 멤버들에 대한 팬덤도 단단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멤버 교체가 그나마 메뉴비용을 최소화 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걸스데이가 좋은 모델이다. 2010년 데뷔 당시 걸스데이 멤버는 다섯 명이었다. 하지만 원년 멤버 두 명이 탈퇴하고 2011년 유라와 혜리가 합류했고, 이후 또다른 원년 멤버 1명이 탈퇴했다. 비교적 초창기에 멤버를 교체한 덕분인지 걸스데이는 그다지 큰 비용을 치르지 않았고, 몇 년 뒤 대성공을 거뒀다.

소녀시대는 또 다른 사례다. 2014년 제시카가 탈퇴했을 때 소녀시대는 새 멤버를 충원하는 대신 8인조로 활동하는 길을 택했다. 당시 소속사 SM에 물어보니 "새로운 멤버를 충원하는 것이 팀 케미스트리에 문제가 될 수 있고, 이미 소녀시대 이미지가 확고해 새로운 멤버가 들어오는 것이 득이 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메뉴비용을 지불하는 게 수지에 맞지 않는다고 계산한 것이다. 대신 이들은 'GEE'나 '소원을 말해봐' 등 9인조로 활동할 때 부르던 노래의 안무를 다시 짜는 정도의 비용을 치렀다.

이 글을 쓰는 사이 어트랙트가 새 걸그룹 프로젝트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새로운 메뉴비용을 지불하기보다 매몰비용을 포기하는 쪽을 택한 것일까.

이 소식을 전해준 가요계 관계자 왈, "초소형 기획사에서 이제는 누구나 아는 중견 기획사 급의 인지도를 얻은데다, 피프티피프티를 성공시킨 이력 덕에 연습생들이 꽤 찾아올 것"이라며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도 히트할 수 있다. 이번 소동으로 60억원어치의 홍보 효과는 확실히 챙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진짜 고수는 어트랙트일지도 모르겠다.

Data 바이브컴퍼니 김종민


Edit 정경화 Graphic 이은호・함영범

⎻ 이 아티클은 2023년 9월 30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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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

대학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1997년 11월, TV에서 본 SES의 I'm your girl 데뷔 무대는 강렬한 문화 충격이었다. 이후 25년간 줄곧 K걸그룹을 좋아했으며, 걸그룹과 경제학의 관계를 데이터로 들여다보는 글을 썼다. 2017년 책 '걸그룹 경제학'을 공저했다.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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