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고추 그래픽

우리나라 음식에서 고추가 사라진다면

by 장하준

고추 표시가 없어도 고추가 들어가는 나라

고추의 영어 이름 ‘칠리(chilli)’가 유래한 나라 멕시코에서 시작해 페루, 카리브해 연안국,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으로 이어지는 지역, 내가 ‘고추 벨트(Chilli Belt)’ 라고 이름 붙인 이 지역 사람들에게 매운 고추의 후끈한 맛이 없는 음식은 상상할 수 없죠.

고추의 매운맛은 매우 중요한 이슈여서 매운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스코빌 척도 (Scoville Scale)’라 부르는 이 기준은 미국의 약사 윌버 스코빌이 1912년 만들었어요.

그는 마른 고추를 알코올에 담가 매운맛을 내는 요소인 캡사이시노이드를 녹여 낸 다음 설탕물로 희석해서 5명으로 이루어진 시식단에게 매운맛이 느껴지는지 판별하도록 했죠. 특정 고추 1용량을 1만 배의 물로 희석했을 때 시식단의 과반수(5명 중 3명 이상)가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면 1만 스코빌 매움 단위가 주어집니다.

스코빌 척도만큼 정교하지는 않지만 ‘고추 벨트’ 국가의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고추를 많이 먹지 않는 나라에서 영업할 때는 흔히들 ‘고추 척도’를 사용해서 고객들이 고추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해요. 보통 메뉴에 고추를 0개부터 2~3개 정도까지 그려 넣어 매운맛의 정도를 알려 주는 식이죠.

경제사회 개발 운동가로 명성을 쌓은 내 친구 덩컨 그린과 2000년대 초 함께 간 런던에 있는 쓰촨 요리 전문점도 메뉴에 고추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요.

한국인답게 나는 고추가 5개 그려진 가장 매운맛을 시도해 보고 싶었지만 함께 간 덩컨이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해 고추 숫자가 한두 개 적은 요리를 주문했습니다. 덩컨은 매운 음식에 도전하고 싶어 하긴 했지만 고추 표시가 전혀 없는 음식을 보험으로 하나 주문했고요.

그러나 도착한 음식을 본 덩컨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고추가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주문한 음식에 새끼손가락만 한 마른 고추가 5~6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죠.

항변하는 그에게 돌아온 설명은 ‘고추 표시가 안 되어 있다고 해서 고추가 전혀 안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는 답변이었습니다. 그 직원은 이해력이 좀 떨어지는 아이에게 되풀이해 설명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연상시키는 인내심을 보이면서 고추 표시는 음식에 들어있는 고추 양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매운 정도를 표시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고요.

GDP가 무시하는 중요한 경제 활동

우리는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당연시하면 그것의 중요성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기도 하죠. 쓰촨 요리 음식점의 고추 척도 속 고추 표시처럼 말이에요. 경제학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무보수 돌봄 노동입니다.

가장 널리 쓰이는 경제 척도인 GDP(국내총생산)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것만 포함해요. 시장 활동만을 계산하는 관행은 경제 활동의 엄청나게 큰 부분을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어요.

개발도상국에서는 농업 생산물의 큰 부분이 계산되지 않는 경우가 많죠. 많은 농민이 자기가 기른 작물을 팔지 않고 일정량을 소비하는데 농산물 생산량에서 이 부분은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으므로 GDP 통계에 포착되지 않아요.

가정과 공동체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행해지는 돌봄 노동 역시 이런 식으로 시장에 기초해 생산량을 측정하면 부자 나라와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GDP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들의 학습을 도와주고,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며,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그에 더해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 말입니다. 이런 활동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면 GDP의 30~40퍼센트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GDP에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어요.

무보수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 중에는 여성이 큰 비율을 차지해요. 따라서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여성이 우리 경제—그리고 사회—에 하는 공헌이 과소 평가될 수밖에 없어요. 가사 노동의 존재 자체를 ‘보지 않으려는’ 경향은 ‘직장맘’ 또는 ‘워킹맘’이라는 표현에도 드러나죠. 마치 집에 있는 엄마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말 아닌가요?

이런 인식은 여성에게 물질적인 불이익을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돌봄 노동을 더 많이 감당하는 여성들은 남성보다 보수를 받는 일을 할 시간이 줄어들어요.

일부 유럽 국가에서 ‘돌봄 크레디트’ 정책을 써서 육아와 노인 돌봄에 들인 시간을 인정해 주는 정책을 쓰고 있지만 이는 매우 부분적인 해결책일 뿐입니다. 그 결과 무보수 돌봄 노동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 여성일수록 노년 빈곤에 시달릴 확률이 높아지고요.

저평가 되는 돌봄 노동

시장화된 돌봄 노동마저 저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뿌리 깊은 성차별적 고정 관념입니다. 한 화로만 다루기에는 너무나 많은 다양한 이유에서 여성, 특히 비백인 여성과 이민자 출신 여성은 불균형적으로 저임금 돌봄 노동 부문에 몰려 있어요. 간호, 보육, 노인요양시설, 가사도우미 등이 그 예입니다.

이 여성 노동자들은 비슷한 일을 하는 남성 노동자들보다 보수를 더 적게 받을 뿐 아니라, 둘 다 비슷한 능력이 필요한 직군이지만 여성이 지배적인 직군은 남성이 지배적인 직군보다 임금 자체가 훨씬 낮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성의 노동은 보수를 받고 GDP에 포함될 때조차 저평가 되고 있죠.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이 체제 안에서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시장이 결정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체제에서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에 따라 결정돼요.

사람들이 거기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람들의 생존에 얼마나 핵심적인지와 상관없이 시장에서 중요성이 사라지고, 결국 큰 의미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이 ‘핵심’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심각한 저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동시에 상식적으로 볼 때 기초적이지도 핵심적이지도 않지만 누군가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공급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 결과 팬데믹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한쪽에서는 적절한 보호 장구가 부족해 의료진이 병에 걸리고, 의료진과 의료 장비가 부족해 코로나 19에 감염된 환자들이 죽어가는가 하면, 돌봄 인력 부족으로 요양 시설 입주자 사이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억만장자들이 ‘우주 탐험 경쟁’을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사람에게 고추가 없는 음식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마찬가지로 무보수든 유급이든 상관 없이 돌봄 노동이 없는 삶은 인류 모두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꼭 필요해서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래서 점점 보이지 않게 된 쓰촨 요리 전문점의 고추와 마찬가지로 돌봄 행위도 필수적이어서 도리어 당연시되고 그에 따라 저평가되거나 심지어 가치가 전혀 부여되지 않게 되었어요.

내 친구 덩컨은 쓰촨 요리 음식점이 고추에 대해 가진 철학을 받아들이고 매운맛에 대한 관점을 점점 바꾸면서 그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음식 문화의 지평이 열리고 더 맛있는 식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돌봄 노동에 대한 관점과 관행과 제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Edit 이지현 Graphic 조수희

– 해당 콘텐츠는 2023.08.04.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23년 03월 출간된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발췌해 토스피드에서 쉽게 읽힐 수 있도록 구성했어요.

책으로도 보고 싶어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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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임용됐고, 2022년 SOAS 런던대로 옮겼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군나르 뮈르달 상,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바실리 레온티예프 상을 수상했다. 전세계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비롯해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 책 17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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