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금융생활을 어떻게 할까?
ㆍby 사소한 질문들
우리나라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은 220만 명이 넘습니다*. 그중 외국인 노동자 체류 자격으로 머물고 있는 이주민은 43만 명에 달한다고 해요. 정부는 내년 외국인 인력 유입을 4만 명 더 늘리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죠. 이주노동자는 제조업, 농림어업과 같이 생활과 아주 밀접한 산업현장에서 한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그러니까, 평소 먹고 입고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은 이주노동자의 손을 거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세계 이주민의 날을 맞아 ‘한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금융 경제생활은 어떠한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 통계월보」 (2022. 10. 기준)
한국에서 생활하신지 내년이면 13년이 되네요. 처음 한국에 오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돈을 벌겠다는 목표로 2011년 한국에 왔어요. 얼마를 벌겠다는 뚜렷한 금액이 있던 건 아니지만, 일단 무작정 돈을 벌고 싶었어요. 한국으로 올 준비를 하면서 한글을 배우게 됐는데요. 1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쓰는 게 가능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이런 언어를 쓰는 사람과 문화는 어떨까?’ 한국에 대해 더 궁금해진 것 같아요.
공장이나, 건설 현장, 농어촌 등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은 보통 E-9 비자를 받고 들어오는데요. E-9은 제조업, 건설업, 농업, 서비스업 등 비전문직 취업 비자예요. 저도 E-9 비자를 받아서 조선소에서 용접한 부위를 매끄럽게 갈아내는 샌딩 작업을 시작으로 일을 하게 됐어요.
외국인 노동자 취업자격으로 한국에 있는 계신 분들이 43만 명이 넘는다고 해요. 처음 일을 구할 때 과정은 어땠나요?
제가 한국에 올 때는 체력검사와 고용허가제 한국어능력시험(EPS-TOPIK)을 치러야 했어요. 고용허가제 한국어능력시험은 E-9(비전문취업), E-10(선원취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보는 시험인데요. 한국어 구사능력, 한국 사회나 산업안전에 대한 이해 등을 평가해요. 제 경우는 시험 볼 때 만 원 정도 들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한국어를 배우고, 시험을 치기까지 시10만 원정도 드는 것 같아요.
체력검사와 시험까지 다 보고 나면 고용 사이트에 이름이 올라가요. 그 이후에는 고용허가제(EPS)*를 받기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해요. 고용허가제(EPS)를 받아야 최종적으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거든요.
일을 구할 때, 근로자가 기업을 선택하는 건 아니고 기업에서 고용 사이트에 올라온 리스트를 보고 스리랑카 고용기관에 문의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스리랑카 고용기관에서 근로자에게 계약조건을 알려주고 갈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봐요. 저도 이름을 올려두고 2년 정도 기다렸다가 연락이 왔어요.
* 기업이 정부로부터 고용허가서를 받아 합법적으로 비전문 외국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제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필리핀, 스리랑카, 몽골,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중국,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네팔, 미얀마, 키르기즈스탄, 동티모르, 라오스 등 총 16개 국가가 고용허가제를 맺고 있다. -편집자 주
일을 시작하기 전, 계약조건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나요?
표준근로계약서를 사용하기 때문에 연봉, 기숙사 유무, 식사 지원 여부 등이 계약서에 모두 나와있어요. 계약서는 스리랑카 언어인 싱할라어로 번역되어서 옵니다. 저는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하기보다는 한국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크다 보니 무작정 사인하고 오긴 했어요(웃음). 제가 올 때는 정보가 워낙 없다 보니까 물어볼 창구가 많지 않았는데요. 요즘에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를 통해서 계약할 때 뭘 확인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주기도 해요.
E-9 비자를 얻기 위해 요구되는 경제적 조건도 있나요?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어요. E-9 체류 자격을 얻는 데 있어서는 돈이 크게 들진 않지만,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값이 제일 크게 들어가는 돈이죠. 예를 들어 비행기 값이 100만 원이라고 치면 스리랑카에서는 무척 큰돈이거든요. 보통 본국에서 비행기값을 대출받아서 한국으로 오고, 일을 하면서 갚아요. 저도 한국 들어올 때 스리랑카에서 대출받아서 12개월에 걸쳐 갚았고요.
돈을 벌겠다는 목표로 오셨으니 경제생활이 가장 중요하셨을 것 같아요. 이주 근로자를 위해 제공되는 금융경제 교육 프로그램이 따로 있나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이주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3일 동안 한국 생활과 관련된 교육을 받았어요. 그때 다양한 은행의 직원분들이 직접 나오셔서 계좌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든요. 각자 마음에 드는 은행을 선택하면 되고요. 저는 그때 만든 계좌를 10년이 넘도록 아직도 쓰고 있어요.
또 전국에 한국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가 9개 있어요.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금융경제 강의가 이뤄져요. 예적금 활용법이나, 보험료는 왜 내야 하는지 등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알아두면 좋을 기본적인 교육을 해줍니다. 그런데 강의가 한국어로 이뤄지다 보니까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은 어려움을 겪죠. 그래서 스리랑카 사람들만 따로 불러서 제가 통역을 해준 적도 있어요.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서 하는 강의들은 언어별로 통역원이 붙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언어적 한계로 어려움을 겪는 이주민을 위한 커뮤니티, 모임 등도 있나요?
요즘은 대사관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해요. 스리랑카는 인구의 70%가 불교거든요. 그래서 대사관에서 사원에 방문해 강의를 하기도 합니다. 불교 사원 위주로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이면서 서로 정보교류를 하는거죠. 돈을 활용하는 방법부터, 한국 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금융 정보나 이런 것들을 주고받는다고 하더라고요.
10여 년 전,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차민다님의 금융생활은 어떠셨어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 달에 15~20만 원이면 생활비로 충분했어요. 그때는 회사 기숙사에서 살고, 밥도 매일 두 끼는 회사에서 해결했거든요. 휴대폰 요금제도 저렴할 걸 썼고요. 당시 제 월급이 180~200만 원 정도였는데, 생활비를 제외하고 모두 스리랑카로 보냈었죠. 그런데 한국에서 생활한지 1~2년 지나니까 돈 쓸 곳이 생기면서 생활비가 더 들더라고요. 또 돈을 어느 정도는 모아서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월 80만 원 이상은 한국 통장에 적금을 넣기 시작했어요.
스리랑카로 돈을 보내실 때는 어떻게 보내시나요? 2011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차민다님의 금융생활도 더 편해지셨을까요?
사실 저는 디지털과 친하지는 않아요. 옷이나 물건 살 때도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보다는 꼭 눈으로 직접 보고 사는 편이에요. 그래서 10년 전 만들었던 통장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데요(웃음). 한국 외화 송금 전용계좌에 돈을 넣으면 연결되어 있는 스리랑카 계좌로 자동으로 돈이 가는 외화송금서비스를 써요.
그런데 10년 전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세상이 달라진 걸 느끼긴 해요. 저는 지금 자영업을 하니까 새벽에 장을 보러 가는데요. 물건 사고 휴대폰으로 바로 계좌이체를 쉽게 할 수 있잖아요. 10년 전에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죠. 이제는 앱 하나, 비밀번호 하나로 너무 쉽게 해결돼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변해서 제가 한국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한국에서 지내며 생소했던 금융문화 같은 것도 있을까요?
돈과 관련된 문화는 스리랑카랑 한국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결혼식이나 돌잔치 같은데 돈으로 축의 하는 문화도 비슷해요. 또 친구들과 밥 먹을 때 서로 돈 내려고 하는 거, 막 친구 몰래 미리 계산하는 것도 비슷하네요.
한국생활하면서 몸소 배워간 것들도 많죠. 회사에서 기숙사를 제공하지 않을 때는 월세를 내며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월세, 공과금, 관리비 이런 개념이 아예 없었거든요. 겨울이 되면 난방비가 얼마 정도 나오는지, TV 요금도 따로 내야 한다는 사실도 아예 몰랐어요. 같이 살던 형이 추위를 많이 타서 난방을 많이 틀다 보니까 가스비가 30만 원도 넘게 나온 적도 있고요. 그때 룸메이트 형이랑 잘 안 맞아서 많이 싸웠어요.
조선소에서 샌딩 작업부터 아연도금, 용접 등 산업 현장에서 4년 넘게 근무하셨어요. 일하며 힘든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E-9 비자로 한국에 머물 수 있는 체류 기간은 최대 4년 10개월이에요. 기본적으로 3년간 일을 할 수 있고요, 그 기간 동안 별다른 문제 없이 일을 했다면 1년 10개월을 추가로 더 체류할 수 있습니다. E-9 비자는 투잡이 안되고, 노동자가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고용센터에서 알선을 받은 곳에서만 일할 수 있거든요.
회사에 고용되어 있지 않으면 체류 자격을 잃기 때문에 항상 어딘가에 고용이 되어 있어야 하고, 이직할 수 있는 횟수가 최대 4번으로 제한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거나, 일하고 있는 기업과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회사를 당장 관두거나 바로 옮기긴 힘들죠. 계약기간 도중 회사를 옮기고 싶으면 우선적으로 회사와 협의가 가능한데요. 만약 회사에서 근로자의 이직을 허가해 주지 않으면, 회사의 부당 행위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해요. 차별 대우 같은 건 부당행위지만, 확실히 입증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저도 2015년쯤에 일하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어요. 허리압박골절로 두 달 정도 병원에 있었는데, 회사에서 산재처리를 못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변호사를 고용해서 산재처리를 받고 잘 해결했어요.
큰일을 겪으셨네요. 차민다 님만이 겪는 어려움은 아닐 것 같아요.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로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대구에 있었을 때 경찰서, 외국인 지원센터 등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저는 한국어를 할 수 있고 한국 생활한지 어느 정도 되어서 문제가 생기면 노무사나 변호사 도움을 받아 그나마 편하게 처리를 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아요. 통역 아르바이트는 용돈도 벌 겸, 어려움을 겪는 분들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요.
경찰서에서 통역을 하며 저도 울컥했던 사건이 있어요. E-9 비자에서 E-7(숙련기능직종) 비자로 바꿀 때 보통 행정사 도움을 받기 때문에 돈이 100~200만 원 정도 들어요. E-7은 전문 인력을 채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자라서 충족해야 하는 조건도 까다롭고요. 이걸 이용해서 외국인 근로자에게 사기꾼이 접근해서 비자를 위해 이수해야 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이나 자료들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400만 원 정도를 요구한 거예요. 외국인은 돈을 지불했는데 비자가 안 나오니까 돈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죠. 비자만료 기간이 다 되면 외국인이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으니 사기꾼은 돈을 계속 안돌려줬고요. 나중에는 사기꾼이 자해를 하고 외국인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신고를 했어요. 외국인은 체포됐다가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 풀려났고, 가해자는 징역을 받았어요. 돈은 아직도 못 돌려받았대요. 물론 이건 최악의 상황이지만 정보가 부족해서 금전적으로 피해를 보는 이주노동자들이 있죠.
말씀 주신 사례처럼 금융 피해를 입었을 때 외국인 근로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이 따로 있나요?
보통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로 가는 경우가 많아요. 센터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통역이 가능하고 무료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웬만한 일들은 노동자지원센터에서 해결을 해주고요. 센터에서 해결하기 힘든 일이면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기관을 연결해 줍니다.
그 외에 이주민이 보편적으로 겪는 금융/경제생활의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대출이 힘들다는 거요.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비자 자격은 있지만, 체류 기간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에도 대출이 아예 안됐었고 지금도 안돼요. 1금융권 대출이 안되다 보니 이자가 비싼 캐피털 대출을 받는 외국인도 많아요.
심리적인 어려움도 겪는 것 같아요. 자꾸 모국이랑 비교하게 되거든요. 예를 들어 생필품을 살 때 ‘스리랑카는 치약이 얼만데, 한국은 얼마네.’ 이런 식으로요. 장을 보고 나면 하루 장본 금액이 스리랑카에서 받던 한 달 월급인 거예요. 겨울 잠바 하나 사면 스리랑카 월급보다도 더 비쌀 때도 있고요. 한국에서는 스리랑카에서 받던 월급의 10배를 받지만, 그런 걸 떠나서 절대적인 금액에 대한 부담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저도 소비를 되도록 안 하려고 스스로를 많이 옥죄었어요.
차민다님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4년 정도 머물고, 그 이후에는 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셨어요.
E-9 비자가 만료될 즘에 한국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어요. 용접 경력도 있고, 대학을 나오면 일하는 데 있어서 대우도 더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E-9 비자 만료 이후에 유학생 비자를 다시 받아서 전문대에 진학했고 용접을 공부했어요.
대단하시네요. 대학생활 역시 회사를 다니는 것만큼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일단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죠. 제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말하는 걸 워낙 좋아하는데 현장에서 일할 때는 그럴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마스크 쓰고, 안경 쓰고, 작업복 입고 일하니까 한국인 외국인 구분도 잘 안되고요. 쉬는 시간에는 다들 휴대폰만 하고요(웃음).
그래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어요. 대학가에 있는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고 전화하면 ‘면접 보러 오세요’ 하거든요? 근데 막상 가면 저를 딱 보고 외국인이라서 안된다고 하는거예요.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까지 20군데 넘게 전화를 했던 것 같아요. 다행히 포장마차 음식점에서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게 됐어요. 9시부터 6시까지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아르바이트 갔다가, 끝나면 과제하고. 하루에 보통 4시간 정도 잤죠.
고되게 번 돈을 쉽게 쓰기도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현명한 소비를 위한 차민다 님만의 팁이 있었나요?
그때도 한국에서 일하면서 모아둔 돈이 500만 원 정도 있긴 했는데, 어렵게 모은 돈이니까 못 쓰겠더라고요. 대학생활하면서는 카드를 안 들고 다녔어요. 제가 편의점에서 돈을 많이 쓰거든요. 눈앞에 편의점이 있으면 그냥 뭘 사고 싶고 먹고 싶더라고요. 편의점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 일정 금액을 정해놓고 현금으로 들고 다녔었어요. 대학생활하는 동안 힘들긴 했는데 대학에 입학할 때, 그리고 졸업할 때가 제가 한국생활하면서 기억에 남는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예요. 스리랑카에서 못 갔던 대학을 마친 거라서 뿌듯했죠.
대학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졸업 이후에는 E-7 비자를 받고 중소기업에서 용접을 했어요. 대학 졸업하면 대우가 더 나아지겠지 했는데 예상과 달리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용접 일은 반장을 중심으로 팀원을 구성해서 일을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외국인이라 그런지 일에서 조금 배제되는 경향이 있었어요. 조직문화가 조금 보수적이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예전에 일했던 회사는 제가 배울 의향만 있으면 아낌없이 잘 알려주고 그랬거든요.
이후에는 대구에서 규모가 꽤 큰 기업에 계약직으로 들어갔어요. 생산기술팀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요. 용접을 메인으로 하면서 현장직과 사무직을 오가며 일을 했어요. 항상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다가 대기업에서 근무하니까 뿌듯하더라고요. 스스로 열심히, 그리고 어렵게 일하고 공부해서 성취한 결과니까요. 그곳에서 대우도 많이 받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요. 아쉽지만 정규직 전환이 안돼서 회사를 나오게 됐어요.
올해 11월, 자영업을 시작하셨어요. 사장님이 되신걸 축하드립니다.
어렸을 때 대형마트를 여러 개 운영하는 게 꿈이었어요. 스리랑카에서 경영을 공부했었거든요. 제 사업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오히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스리랑카에서 한국으로 처음 올 때도 그랬고요. 아쉽게 정규직 전환이 안돼서 ‘새로운 것에 도전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운영하고 계신 가게는 마트가 아니고, 한국식 포장마차 음식점이에요.
제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가 대구에서 시작한 브랜드인데요. 대학 다니면서 알바했던 곳이기도 해요. 그때 사장님이랑 일했던 동생들, 형들과 가까워지면서 홀서빙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나중에는 주방에서 요리도 배웠었어요. 스리랑카에는 발효음식이 많지 않다 보니까 저는 김치도 잘 못 먹었었는데, 요리를 배우다 보니 어느 순간 음식이 입에 잘 맞더라고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예전에 제가 사장님한테 이런 말을 했거든요. ‘저 5년 후에 돈 모아서 다시 올게요. 가게 하나 내주세요’ 그리고 대학 졸업 후, 회사 생활하며 돈을 모아서 작년 말에 진짜 사장님을 다시 찾아갔죠. 사장님과 이야기를 해보니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생이 서울에 지점을 내서 운영하고 있는데 가게를 내놓으려 한다고 하더라고요. 동생에게 가게를 양도받아서 제가 11월부터 운영하게 됐어요.
큰 도전을 결심하신 건데요. 가게를 오픈하면서 세웠던 목표가 있나요?
저는 항상 월 천만 원이 목표예요. 지금은 프랜차이즈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제 브랜드를 만들어서 성공시키는 게 목표예요. 앞으로 3년 안에 스리랑카 음식을 한국화해서 도전해 보고 싶어요. 한국에 인도 음식은 많지만, 스리랑카 음식점은 별로 없거든요. 언젠가는 한국 음식을 스리랑카화해서 스리랑카에도 알리고 싶고요. 예전부터 꿈꿨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어요.
지금도 직원분들이 꽤 될 것 같은데요. 월급을 받다가 이제 월급을 주게 되셨네요.
월말이 되면 힘들어요(웃음). 있는 거 없는 거 다 끌어모아서 적은 자본으로 시작한 거라서요. 직원과 아르바이트까지 하면 4~5명 정도 있는데요. 직원들 월급뿐만 아니 고용보험이나, 연금도 챙겨야 해서 인건비만 거의 1,000만 원 가까이 돼요. 거기에 관리비, 공과금까지 포함하면 빠듯하죠.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해서 돈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조금씩 알아가며 계획을 세우고 있는 단계에요.
사업을 준비하고 운영하며 겪는 금융의 어려움은 또 다른 차원이었을 것 같은데요.
가장 골치 아팠던 건 이름 때문이었어요. 한국 사람은 이름이 길어도 4글자 정도지만 외국인 이름은 훨씬 긴 경우가 많잖아요. 제 이름 영문으로는 40 글자가 넘고, 한글로도 거의 20자 가까이 되거든요. Ranpati Dewayalage Chaminda Kumara Jayasekara(란파티 데와알라게 차민다 쿠미라 자야세카라). 이게 제 본명이에요. 이름 전체를 입력할 글자 칸이 모자라요. 또 각 기관마다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이 달라요. 예를 들어 은행에서는 띄어쓰기 없이 이름을 입력해야 하고, 통신사에서는 띄어쓰기가 3번까지만 되고, 세무소에서는 띄어쓰기를 신분증과 똑같이 입력해야 하다 보니 이름을 서로 다 다르게 입력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배달 앱 서비스나 포스기를 이용하려면 통신사나 카드사 등에 등록되어 있는 이름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게 달라서 서비스 이용이 안되더라고요. 11월 2일에 가게를 오픈했는데, 가게 오픈날 카드 결제가 안되더라고요. 어떤 카드는 정산까지 1-2주가 걸리고요. 결국 그 다음 날 하루 영업을 못했어요. 포스기 회사, 카드사 등 연락해서 지금은 문제를 해결했죠.
또 사업자 통장을 만들려고 은행에 갔는데요. 가게를 운영하려면 일일 송금한 도가 최소 200~300만 원 정도는 돼야 하잖아요. 그런데 일일 송금 한도를 30만 원에서 더 올리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가게를 양도해 준 동생의 주거래 은행에 같이 가서 꾸준히 받았던 월급을 증명해서 잘 해결했어요. 가게 오픈 하면서 한국인 동생 도움을 여러모로 받아야 했어요.
차민다 님은 이미 한국생활에 완벽 적응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방인으로서 종종 불안할 때도 있겠지요?
언젠가 스리랑카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돌아가면 뭐 하지? 이런 두려움이 있어요. 모국에 있는 친구들은 기반이 다 잡혀져 있을 테니까, 제가 지금 돌아간다면 불안할 것 같아요. 그래서 스리랑카에도 기반을 조금씩 만들어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있는 이주민의 더 나은 금융경제생활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씀해 주세요.
캐피털 대출을 받는 외국인이 많아요. 고용되어 있는 회사와 연계해 금융상품 이용이 가능하게 한다거나, 정기적으로 일정한 수입을 증빙한다면 1금융권 대출 상품도 이용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수가 200만 명이 넘는데 좋은 상품이 나오길 바랍니다.
또 이름 때문에 불편을 겪는 외국인도 많을 거예요.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은 외국인 등록증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 이름 대신 등록번호로 인증을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거나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외국인들은 뭐든 인증하려면 힘들거든요. 상담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해도, 한국어가 서툴다 보니 외국인, 상담원 서로 힘들고요.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인증 절차가 조금 더 쉬워지면 좋겠습니다.
Interview・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조수희 Photo 김예솔
세상의 중요한 발견은 일상의 사소한 질문에서 태어납니다. 작고 익숙해서 지나칠 뻔한, 그러나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를 조명하며 금융과 삶의 접점을 넓혀갑니다. 계절마다 주제를 선정해 금융 관점에서 풀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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