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살면 워라밸을 지킬 수 있을까?

유럽에 살면 워라밸을 지킬 수 있을까?

by 사소한 질문들

한국에 살다 독일로 건너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이방인들은 실제로 워라밸을 지키며 살고 있을까? 일과 개인의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 은 생각보다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워라밸을 지키며 산다는 건 누군가에겐 ‘너무 열씸히 노오력하면서 살지 않는 것.’이었다가, 다른 이에게는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확보해야 하는 것’ 또는 ‘일에는 일, 일상은 일상으로 완벽히 구분된 라이프스타일’로 이해된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워라밸을 갖춘 삶을 산다는 건, 온전히 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추가적인 과제처럼 느껴진다. 워라밸을 ‘유지’하며 사는 게 아닌, ‘사수’하기 위해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개인적인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와 쓰게 된달까?

나는 10년 가까이 독일에 살고 있다. 독일에서 접하는 워라밸은 한국에서 말하는 워라밸과 어딘지 조금 다르다. 기본적으로 노동자에게 제공되는 사회문화적, 제도적인 인프라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비교적 촘촘하고 엄격한 노동 시간법(Arbeitszeitgesetz)과 연방 휴가법(Bundesurlaubsgesetz)이 제정되어 있다. 물론 종사하는 업계와 분야에 따라 세부 법령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주 5일을 일하는 일반 직장인의 경우 하루 8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일하며 최소 20일, 통상적으로는 30일의 유급휴가를 받는다. 퇴근 후에는 11시간의 최소 휴식시간(Ruhezeit)이 법으로 보장되므로 야근을 했을 경우 빨라도 퇴근 후 11시간 후에야 출근할 수 있다. 병가를 낼 때는 의사의 확인서가 있다면 어렵지 않게 유급 병가를 받을 수 있고, 이를 남용하지만 않는다면 회사의 눈치를 보는 일도 드물다.

그렇다면 법과 제도가 실제 생활에서도 잘 적용되고 있을까? 독일에서 각각 글로벌 대기업, 중견기업, 그리고 스타트업에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직장인들과 이야기하며 워라밸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을 발견했다.

대기업 프로덕트 디자이너
: 워라밸 보다 워소라밸(워크-소셜-라이프 밸런스)

대규모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디지털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C는 일과 일상이 균형 잡힌 삶을 꿈꾸며 독일로 이주했다. 학생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한 회사에서 정직원 오퍼를 받아 일한 지 어느덧 4년, 그는 워라밸 개념에서 한 단계 더 확장된 워크-소셜-라이프의 세 가지 밸런스를 갖춘 삶을 실현시키려 노력한다. 그가 말하는 소위 ‘워소라밸’이 좋은 삶은 일과 사람들과의 만남 때문에 개인의 삶을 희생하지 않는 삶이다.

“워라밸을 넘어 ‘워소라밸’의 균형이 맞춰졌을 때 일과 사회생활도 흥미를 잃지 않고 지속해나갈 수 있어요. 이민자인 제 상황과 독일 내 문화나 정서상 회식도 거의 없는 데다, 정기적인 술자리 등 친목 모임에 대한 부담이 확 줄어서 지금의 일상이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개인주의가 비교적 가시화된 이곳은 한국에서 중요시하는 ‘사회생활’도 무리해서 하지 않는 분위기고요.”

현재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 가장 만족하는 점은 담당하는 프로젝트의 분량과 소요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팀원들과 함께 상의 후 업무를 분담해서 일을 진행하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고도 2주 만에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빠른 속도로 그럴싸한 결과물을 많이 내는 걸 중요시했던 한국에서의 업무환경과는 달리, 담당한 일에 대해 충분한 연구와 실험을 해볼 수 있다는 점도 일의 능률과 흥미를 높게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다. 뿐만 아니라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병가를 낼 수 있는 문화는 건강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아프면 병가를 받아 충분히 쉴 자유를 보장받는 건 굉장한 특혜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3일 미만의 병가의 경우 의사를 찾아갈 필요도 없이 고용주에게 상황을 전달하면 쉴 수 있어요. 예전부터 저는 디자이너의 고질병인 손목과 목, 허리 통증을 갖고 있는데요, 한국이었다면 통증이 심해도 병가를 내는 대신 진통제나 소염제를 처방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통증이 나으려면 쉬는 수밖에 없거든요. 병가가 자유롭기 때문에 병을 키우지 않을 수 있어 좋아요.”

물론 워라밸을 지키기 좋은 환경이 일의 진행속도를 더디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팀원 중 누군가는 휴가 중이거나 병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면서 성장의 모티베이션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는 C는 이 점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그는 안식년(Sabbatjahr)을 계획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고용계약 형태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 직장인의 경우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안식년을 가질 수 있다. 월급이 나오지는 않지만, 고용계약과 보험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업무에 복귀할 수 있다. 물론 안식년을 계획하는 경우, 동료들과 미리미리 커뮤니케이션하는 센스는 필수. C는 안식년 제도가 있는 회사를 찾아 조만간 이직을 하거나,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현재 회사의 제도를 활용하는 등 여러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일을 잠시 떠나 긴 방학을 얻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스타트업 프론트엔드 개발자
: 실질적 퇴근과 정신적 퇴근 사이에서

베를린의 한 스타트업에 근무하고 있는 S는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며 독일에 왔다. 곧 3년 차 개발자가 되는 그는 평일 오전 8시와 10시 사이에 자유롭게 출근해 매일 8시간의 근무시간을 채우고 퇴근한다. 원격근무를 100% 보장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피스에 출근하지 않는다. 매년 30일의 유급휴가 중 3주 정도는 한국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할 때 한 번에 사용한다.

스타트업 개발자의 업무 특성상 달성해야 하는 업무의 속도가 빠른 편이고, 종종 마감기한에 쫓기기도 하지만, 회사에서 대놓고 초과근무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기한 내에 완료해야 하는 업무량이 많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때는 상사와 함께 의견을 공유하며 방법을 찾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서로에게 야근이나 특정 업무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과 업무 진행 과정에서 문제와 충돌이 생길 때 동료 혹은 상사와의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해결방법을 찾는다는 점을 현재 일하는 스타트업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S는 실질적 퇴근과 정신적 퇴근 사이에서 고민한다. 퇴근 후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개인적인 일상에 들어가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인 환경이 주어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주어진 환경을 누릴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퇴근 후에 온전히 일에서 벗어나는 일이 저에겐 아직 어렵게 느껴지거든요. 가끔 꿈속에서 코딩을 할 정도예요”

주어진 환경을 누리기 위해 그는 퇴근 후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퇴근 후 컴퓨터를 끄고 청소를 하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휴식을 한다. 개발자라는 직업 특성상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공부가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 늘 고민한다. 일과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조절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어디에 살든, 어디에서 일하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되 지나치게 애쓰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직장인의 삶을 S는 꿈꾼다.

신입사원의 워라밸
: 저녁 6시, 일과 일상의 온 앤 오프

미디어 기업 인사팀에서 교육과 인재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신입사원 H는 1년 차 독일 직장인이다. H가 생각하는 워라밸이 확보된 삶은 저녁 6시가 되면 업무용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온전히 일 바깥의 삶으로 들어가는 삶이다. 일과 개인의 일상이 각각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주 2일 재택근무제와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백 퍼센트 재택근무를 하면 일과 일상의 분리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고, 매일 오피스로 출근하면 가사노동과 일을 병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루 걸러 하루 출근하는 이 시스템에 그는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특히 유급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휴가를 2주 이상 길게 다녀오는 게 독일 내에서 보편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이 워라밸을 지키며 사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요소로 꼽는다.

“근무 연차가 적은 저 같은 신입사원은 물론,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도 2-3주 정도는 마음 놓고 휴가를 다녀올 수 있어 좋습니다. 제대로 쉬고 일로 복귀했을 때 업무 효율이 향상되니까요. 아플 때 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도 워라밸을 지키는 일상에 한몫해요. 그렇지 않으면 병치레가 장기화되어 팀에 더 큰 문제가 되고, 동료들에게 병을 옮길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서 맘 편히 병가를 내고 회복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일과 학업,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동료들이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요. 개개인의 노력을 떠나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사회 인식과 문화가 직장인의 워라밸 유지에 정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년에는 해외에서 원격근무가 가능한 회사 내 제도를 이용해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2주간 한국에서 원격근무를 하고 올 예정이다. 회사 밖의 나도 회사 안의 나만큼 완전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H는 오늘도 저녁 6시가 되면 일의 전원을 끄고 일상의 전원을 켠다.

저마다가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사회에 잘 스며드는 일은 이방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낯선 언어로 소통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을 때, 매달 정기적인 소득을 손에 쥐었을 때, 그제야 그들은 어깨의 힘을 잠시나마 풀고 ‘이제 좀 살만해졌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의 삶이 로컬들의 삶처럼 변모하지는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은 늘 긴장되어 있다. 낯선 문화와 사고방식에 매일 부딪히고, 뜨끈한 한식을 그리워하면서도 포장된 샐러드와 케밥으로 당장의 끼니를 때우기도 한다. 이렇듯 몸과 마음이 쉽게 지치는 이방인들에게 워라밸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은 필수적이다. 퇴근 후 건강한 식사를 차려먹을 마음의 여유, 이방인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모국의 따뜻한 방에서 가족들과 보내는 몇 주간의 시간, 그리고 아플 때 쉴 수 있는 권리를 당연하게 보장받는 것은 이방인의 삶을 한 층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독일 직장인의 워라밸에 관한 취재를 마무리하면서 워라밸의 정의와 목적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워라밸이 유지되는 삶을 살고 싶은 걸까? 위에서 소개한 세 명과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워라밸 사수의 목적이 결국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에 대한 애정과 흥미를 더더욱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워라밸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의 제도와 사회 인식이 얼핏 보면 환상적으로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백 퍼센트 완벽한 복지는 존재하지 않고, 설령 존재하더라도 그걸 누리는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함을 이곳에 살며 목격한다. 결국 워라밸이 유지되는 삶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와 인식, 그리고 각 개인의 노력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진정한 워라밸이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워라밸


Writer 차유진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이방인의 일상과 커리어 스토리를 담은 디지털 매거진 <투룸매거진>을 제작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국과 모국, 두 개의 방을 오가며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삶을 다양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콘텐츠로 담아내는 일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낍니다.

Edit 이지영 Graphic 이은호 조수희 함영범

– 해당 콘텐츠는 2022. 12. 14.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토스피드의 외부 기고는 전문가 및 필진이 작성한 글로 토스피드 독자분들께 유용한 금융 팁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현명한 금융 생활을 돕는 것을 주목적으로 합니다. 토스피드의 외부 기고는 토스팀 브랜드 미디어 운영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되며, 토스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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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질문들

세상의 중요한 발견은 일상의 사소한 질문에서 태어납니다. 작고 익숙해서 지나칠 뻔한, 그러나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를 조명하며 금융과 삶의 접점을 넓혀갑니다. 계절마다 주제를 선정해 금융 관점에서 풀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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