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사기 당하는 법
ㆍby 김새벽
1. 사기로 결심했다
사기라고 생각했다.
회사 옆 자리 과장님 집이 3개월 만에 1억원이 올랐다고 한다. 집들이 갔던 과장님 집은 30평대 신축 브랜드 아파트로 인테리어까지 깔끔했다. 아무리 그래도 3개월 만에 1억원이 올랐다니, 이거 사기 아니야?
내 뒷 자리 대리님은 깡통 전세 피해자였다. 살고 있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런데 과장님은 앉아서 1억원을 벌었다. 부동산으로 누구는 돈을 잃고 누구는 돈을 벌고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전세로 살면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고, 집을 사면 1억원을 번다. 집을 사야겠다.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도 집 사자. 과장님 집 3개월 만에 1억 올랐대."
하지만 돈이 많지 않았다. 전세금 1억 6천만 원에 모아둔 돈 2천만 원이 전부였다. 2억 원 안팎에서 집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네이버 부동산’을 살펴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서울에서 방 3개짜리 아파트를 검색했더니, 대부분 4억 원 이상이었다.
최소한 2억 원이 더 필요했다. 우리 부부의 소득과 저축액을 계산해 보니 앞으로 10년 정도 열심히 모으면 4억 원 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10년…이 작은 신혼집에서 10년 동안 아끼며 살아야 방 3개짜리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다니... 하지만 다른 답이 없었다. 집값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세상을 원망했다. 그렇게 포기했다.
한 달이 지났다.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잊은 채 일상으로 돌아왔다. 친구 셋과 캠핑장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고 맥주를 마셨다. 늦은 저녁, 친구가 말을 꺼냈다.
“나 집 사려고.” “어떻게?”
라는 물음이 바로 나왔다. 친한 친구라 경제적인 형편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나도 집 사고 싶은데 너무 비싸던데. 어떻게 사는 거야? 부모님이 도와주시는 거야?” “나라에서 돈을 빌려주더라고? ‘디딤돌 대출’이라고 들어봤어?” “대출? 돈 빌리는 거 아냐? 대출 무서워.”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디딤돌 대출이 뭔지 검색했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우선 부부의 합산 소득이 국가에서 정한 기준 이하여야 했다. 생애 최초로 6억 원 이하의 집을 사는 것도 조건이었다.
그 다음엔 “집값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어차피 내가 30년 살 집인데 뭐 어때?”라고 답했다. 평생 살 집에서 맘 편히 행복하게 지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때 우리는 서른한 살이었다. 앞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함께 예순한 살까지 살 집을 구하는 거구나. 친구는 2억 원을 대출받는다고 했다. 내가 10년 동안 아등바등 모으려고 했던 2억 원이었다. 처음으로 ‘대출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경기도 고양시 삼송에 집을 얻었다. 삼송에 곧 스타필드가 지어진다고 했는데, 너무 외곽 아닌가? 서울에 집을 사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친구를 축하해줬고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술을 꽤 마시고 텐트 안에 누웠다. 한 달 전에 갔던 과장님 집이 떠올랐다. 나도 언젠가 과장님 집처럼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까? 그날 나는 '디딤돌 대출'이라는 단어를 되뇌이며 잠에 들었다.
2. 기대를 불리는 대출
대출. 아파트 매매를 포기하려던 내게 희망이 생겼다. 집을 가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집 살 때 대출 받으셨어요? 제 친구가 이번에 2억 원 대출 받아서 집을 산대요. 저도 집 사고 싶은데 2억 정도 대출 받아도 괜찮을까요?"
세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전부 대출로 집을 샀다고 했다. 미리 짠 것도 아닌데 셋 다 “화장실만 내 거야”라고 말했다. 대출 없이 집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듣고 보니 매달 갚아야 하는 원금과 이자가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는 돈을 빌려도 괜찮겠다 싶었다. 어느새 대출은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생애 최초로 집을 사는 사람이라면 집값의 70%(2016년 기준)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한도를 꽉 채워 대출하면 과장님이 30평대 집을 샀다던 6억 원 선까지도 가능했다. 하지만 친구가 2억 원을 받았다고 하니 나도 그 정도만 빌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억 원짜리 아파트를 찾아 나섰다.
네이버 부동산에서 매매가를 최대 2억 원에서 4억 원으로 바꿔 조회했다. 보이지 않던 매물들이 나타났다. 서울 곳곳에 매물이 떠 있어서 어떤 것부터 봐야 할지 몰랐다. 우선 신축 아파트였던 과장님 집이 떠올라 지은 지 4년 이내 아파트를 찾아봤다. 없었다. 친구가 들어간 삼송이나 서울 외곽의 단지 몇 군데뿐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6억 원으로 조건을 바꿔 봤다. 매물이 더 늘어났다. 과장님네 단지도 보였다. 그런데 같은 아파트 단지이긴 한데, 34평이 아니라 25평이 6억 원이었다. 그 사이 이렇게 값이 오른 걸까? 이상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6억 원짜리 집은 안 살 거니까.
집을 사려고 이것저것 공부하다보니 ‘직주근접’이라는 말을 알게 됐다. 직장과 주거가 가까울수록 좋다는 의미로 부동산 시장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이었다. 당시 우리는 용산구 후암동 빌라에 살고 있었다. 아내 직장은 종로, 나는 명동으로 다녔는데 후암동에선 어디로든 가기 좋았다. 출퇴근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지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준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15년 이내 지어진 아파트를 검색하면서, 한편으로 출퇴근하기 좋은 지하철 1, 4, 5호선을 탈 수 있는 동네를 살폈다. 과장님도 그래서 서대문에 집을 산 거구나 싶었다. 그때부터는 서대문 쪽에서 집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4억 원이라는 큰 돈으로도 서대문에 살 수 있는 집은 없었다. 3호선 독립문역 근처에 한두 곳이 보였다. 좀 더 북쪽의 홍제동에도 아파트가 많았다. 더 올라가다 보니 삼송이 나왔다. 삼송? 친구네 동네라 그런지 친근감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아파트 단지 3군데를 메모장에 적었다.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풀었다.
"나도 곧 내 집이 생기겠구나.”
3. 그놈의 신축 아파트
주말이 되어 골라둔 아파트 세 채를 보러 갔다. 독립문과 홍제동의 아파트는 매우 가파른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실망스러웠다. 과장님 집과는 차이가 있는 낡은 아파트였다.
4억 원이면 삐까번쩍한 아파트를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계단식 아파트에 엘리베이터로 연결된 지하 주차장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2년 전 신혼 전셋집을 구하러 다닐 때 마주했던 아내의 표정이 떠올랐다. 금호동에서 허름한 건물에 지린내 진동하는 집을 보고 나오면서 아내는 물었다.
“우리 꼭 이런 곳에서 살아야 돼?”
아내의 손을 잡고 “아냐, 더 좋은 집 구할 수 있어”라고 말했지만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리고 ‘왜 돈을 이만큼 밖에 못 모았을까’ 자책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똑같았다. 대출까지 포함한 4억 원을 가지고도 나는 집 앞에서 여전히 무능했다. 많은 생각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회사 동기 하나가 노들섬에 신혼집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서대문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노들섬 근처도 알아보고 마포도 알아봤다. 어떤 날은 4억 원에 필터를 걸어서 보고, 어떤 날은 6억 원 필터를 걸어서 봤다.
왔다 갔다 했다. 뚜렷한 목적도 원칙도 없이 좋아 보이는 아파트라면 모두 들여다봤다. 곧 어느 동네 아파트이든 상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자꾸 신축 아파트만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신축 아파트 덕분에 부동산 매매에 관심을 가지게 됐지만, 신축 아파트 선호는 오랫동안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4. 푸르지오
아내가 임신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행복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한 앞날을 상상했다. 아내와 아이에게 좋은 집을 해주고 싶었다. 그 놈의 '좋은 집’이 문제였다. 어릴 때는 방 2개, 작은 거실 하나인 18평 집에서 아빠와 엄마, 여동생까지 넷이서 행복하게 살았다. 우리 부부도 18평짜리 아파트를 깨끗하게 수리해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 좋은 집은 ‘서울 시내 브랜드 신축’ 아파트뿐이었다.
그러던 내게 새로운 고려 사항이 생겼다.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를 도와주시기로 한 장모님이 경기도 광명시에 살고 계신다는 점이었다. 광명 철산동에서는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 브랜드 신축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 시내’라는 조건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구하려는 집의 범위가 명확해졌다. 철산동에 인접한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에서 장모님이 20분 안에 오실 수 있는 4억 원대 신축 아파트였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 조건으로 검색해 괜찮아 보이는 단지를 3곳 찾았다. 구로에 두 곳, 영등포에 한 곳, 공교롭게도 모두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였다. 가격은 서로 엇비슷했다.
근처 부동산에 찾아갔다. “25평 매물 있나요?”
부동산 사장님은 “마침 매물이 하나 있다”고 소개하며 동네의 장단점을 브리핑해줬다. 대안으로 7호선이 다니는 천왕역 쪽으로도 많이 간다고 했다. '이런 이야길 왜 해주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만히 들었다.
푸르지오 25평 아파트는 과연 마음에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넓고 깔끔했고 부엌 싱크대에서는 바닥 센서를 발로 밟으면 물이 나왔다. 부동산 사장님에게 계약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날 집주인과 연락한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집주인이 이사 갈 곳을 정하지 못해 팔지 않기로 했단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조급해졌다. 마음에 드는 집을 드디어 찾았는데 살 수 없다니, 안달이 났다. 이성적인 판단력이 흐려졌다. 한 발짝 떨어져서 봤다면, 더 나은 집 혹은 비슷한 집이 매물로 나올 때까지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동네의 장단점을 좀더 파악하며 기다릴 수도 있었다. 정보를 모으고 빠르게 판단해 행동하는 것과 조급하게 움직이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다.
그때의 나는 조급했다.
5. “법인 매물이에요”
다른 부동산에서 30평 매물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퇴근하고 곧장 달려갔다. 지하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했다. 버스로 갈아타는 게 불편했지만 내리는 순간 눈앞에 근사한 신축 아파트가 우뚝 서있었다. 인상 좋은 부동산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매물을 보러 갔다. 집은 비어 있었다. 갓 분양받은 아파트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가구가 없으니 집 안은 더 넓어 보였고 흠잡을 곳이 없었다.
계약을 결정했다. 집주인은 이 단지 안에만 아파트 세 채를 갖고 있다고 했다. 부동산 사장님은 “다른 집보다 싸게 나왔다. 정말 잘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내가 잘 골랐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격은 4억 2천만 원. 예산보다 2천만 원 초과였지만 ‘이것도 금방 6억까지 오르겠지’ 싶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그 주 토요일로 계약 날짜를 잡았다. 그러면서 흘러가듯 말했다.
“이 부동산은 법인 명의 매물이에요.” “그게 뭐가 달라요?” “다를 거 없어요.”
계약금은 수표로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계약 당일 수표 4천만 원을 품고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부동산에 도착했다.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사기 위해 부동산 테이블에 앉다니,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매도자는 약속 시간에 조금 늦었다. 지방에서 부동산을 정리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법인 매물이라서 그랬을까. ‘황 사장’과 ‘실장’이라는 두 사람이 같이 왔다. 인상이 별로였다. ‘관상은 사이언스’인 법인데, 나의 조급함은 과학을 눌렀다. 이들은 입주 전에 중도금을 달라고 했지만, 대출을 실행하기 전에는 여윳돈이 없어 입주 당일 잔금을 모두 치르겠다고 했다. 계약서에 인감 도장을 꽉 눌러 찍고 계약금을 건넸다. 드디어 나도 내 집이 생겼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디딤돌 대출을 신청했다. 그리고 전셋집 주인에게 이사를 나가겠다고 연락했다. 워낙 전세가 귀할 때라 새로운 세입자를 바로 구할 수 있었다. 남은 건 3개월 뒤 새로운 집, 내 집으로 이사 가는 것 뿐이었다. 행복한 날들이었다. 오후의 지루한 업무 미팅도 즐거웠다.
입주가 두 달 남았을 무렵, 미팅 도중에 전화 한 통이 왔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왠지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디딤돌 대출을 신청한 주택도시기금이었다.
“부동산 명의가 변경되었는데요.”
명의가 변경됐다고? 무슨 말인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선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방금 받아 적은 내용을 전했다. 나는 디딤돌 대출을 받지 못하면 어디서 대출을 받을 수 있을지만 걱정하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상상도 못하고, 명의를 다시 돌려달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어떻게 침착할 수 있었을까? 그건 부동산 보증보험 때문이었다. 아마 다들 부동산 사무실마다 문에 1억원 보증 스티커가 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부동산 중개 도중 사고가 나면 1억 원까지 손해배상해준다는 그 스티커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당황한 듯했다. 하루가 지났지만 시원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만 이름을 바꿨을 뿐이고 다시 돌려놓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였다. 갑갑한 마음에 ‘황 사장’에게 전화했다. 또 말이 다르다. 중도금을 주면 명의를 원래대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이때였다. 명의를 바꾸려면 취득세를 수천만 원 내야 하는데, 정상적인 거래라면 누가 그런 일을 할까?
부동산 사장님은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직접 설득하려고 황 사장을 찾아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제 그 집은 더 이상 황 사장 소유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그 집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 와중에도 나는 차분한 척했다. 행여라도 기분 나쁘다고 계약금을 돌려주지 않을까봐 예의를 차렸다.
나는 이렇게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 이사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6. 갈 곳 없는 사람의 소송
살던 전셋집에서는 예정대로 나가야 했다. 새로운 세입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집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택시에 태워 처가로 보냈다. 전날 밤 차에서 많이도 울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방 두 개 신혼집에 어찌나 살림이 많았는지 용달 트럭 하나 가득이었다. 이삿짐센터에서 짐을 보관해주기도 한다는데, 언제 다시 찾을지 모르는 짐을 무한정 맡길 순 없었다. 감사히도 사정을 들은 회사 과장님이 경기도 용인의 창고에 짐을 맡아주겠다고 하셨다. 신혼 살림을 창고 귀퉁이에 쌓아둔 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것 같았다. 파산한 사람이 이런 기분일까? 이제 문제는 나다. 오늘 밤은 우선 회사 근처 모텔에서 묵기로 했다. 사기당한 놈이 염치없게도 배가 고팠다.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인데 짬뽕밥이 먹고 싶었다. 중국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서 지낼 거냐고, 일단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짬뽕밥을 먹는 내내 눈물이 났다.
새 집에는 결국 입주하지 못했다. 우선 집을 점거하고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현관 비밀번호마저 바뀌어 들어갈 수도 없었다. 황 사장은 계약금조차 돌려주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법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변호사를 만났다. 이런 경우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사기꾼에게 재산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송을 걸기로 했다. 수임료로 500만 원을 내고 내 돈을 받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상대방이 계약 내용을 지키지 않은 데 따르는 배액 배상에도 기대를 걸었다. 계약금이 4천만 원이니 두 배인 8천만 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힘들어도 부동산의 1억 원 보증 보험이 있으니, 최소한 계약금은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튿날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사건이 접수되었으니 자초지종을 알려달라는 요청이었다. 변호사 조언에 따라 경찰서에 찾아가 진술했다.
그리고 나만 당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황 사장 혼자가 아니라 일당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황 사장은 바지 사장이나 얼굴 마담에 가까운 듯했다. 소송에서 이겨도 내가 받을 돈 자체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 사장이 거주하고 있는 집에 가압류를 걸었다. 황 사장에게 사기당한 사람들로부터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인데 참여하겠냐는 연락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이미 절차를 밟고 있으니, 집단 소송에서 더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변호사를 만나 부동산을 통해 사고 보험금을 받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싶다고 했다. 알아보니 부동산 보증 보험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 중개 과정에서 중개사가 실수한 사실이 인정되어야만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실수 여부를 입증하려면 소송을 거쳐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중개사가 황 사장이 제대로 된 매도자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으므로 이건 분명 사고다. 보증 보험이 있으니 계약금은 무조건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소송으로 부동산 중개인의 잘못을 입증해야 했다. 어쩌면 계약금마저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이때야 알게 됐다. 절망적이었다.
재판은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법원에 가는 것도, 판사님을 만나는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변론 기일에 출석하는데,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긴장이 됐다. 판사님에게 그간의 거래 과정과 황 사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판사님은 따뜻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사람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는 듯했다. 도움을 주시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계약서와 인감 증명서를 뚫어지게 비교해 보시더니 계약서에 찍힌 도장과 인감 모양이 다르다고 하셨다.
다시 보니 미세하지만 정말 달랐다. 도장의 진위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부동산 중개사의 과실을 발견한 것이다. 새로운 희망이었다. 판사님이 나를 지긋이 쳐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좌절하지 말고, 아직 젊으니까 힘내세요.”
이즈음 나는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길을 걷다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폭력으로라도 해결해야 할까? 협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일까?
하지만 판사님의 조용한 한 마디에 독기가 빠졌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자꾸 뒤를 돌아보는 대신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판사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7. 다시 새 집을 구하러
부동산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했다. 부동산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 승소하면 부동산 보증 보험을 통해 계약금 4천만 원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다. 귀책 사유가 명확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돈을 돌려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제야 아내에게 할 말이 생겼다. 잘 해결하고 있고 계약금은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내도 부모님 집으로 들어와 내 작은 방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 처음 그 방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던 밤, 아내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티 내지 않았지만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소송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 방 안에서 언제 나올 지 모를 소송 결과를 기다리기만 할 순 없었다. 결혼하기 전 나 혼자 살던 좁은 방에서 두 사람이 지내기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이 계시니 화장실도 맘 편히 쓰지 못하고 푹 쉬지도 못했다. 임신한 아내에게 미안했다. 우리 가족만의 아늑한 보금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아내가 옆에 있으니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
그날 밤 집 앞 공원을 뛰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얼마 있지? 다시 전세를 구해야 할까? 계획했던 대로 매매를 알아봐야 할까?”
집을 산다면 두 번째 후보지였던 양천구의 푸르지오 아파트에 가고 싶었다. 비행기가 다니지만 동네와 단지가 마음에 들었다. 다시 네이버 부동산에 접속했다. 넉 달 전 4억 2천만원이었던 집이 4억 6천만원에 나와있었다. 한 달에 천만 원씩 오른 셈이다.
예산이 부족했다. 하지만 4개월 사이에 4천만 원이 올랐으면 앞으로는 더 오를 것이 분명했다. 부족한 돈을 구해야 했다. 회사에서는 주택구입자금 2천만 원을 저리로 빌려준다고 했다. 매달 원리금이 월급에서 차감되지만 곧 진급할 거니까 감당할 수 있었다. 갖고 있던 주식도 팔았다. 그래도 모자라 주택담보대출을 조금 더 받기로 했다.
이제 구체적으로 집을 찾을 단계였다. 호되게 사기를 당한 내게는 이제 나만의 집을 보는 기준이 생겼다.
첫째, 법인 명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둘째, 실제 집주인과 거주자가 일치하는 집이어야 한다. 셋째,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3~4인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을 구매한다. 넷째, 등기부등본상 1금융권 대출이 있는 매물만 본다. 대출은 1건만 있어야 한다. 다섯째, 집을 파는 이유가 납득되어야 한다.
새로운 부동산 사장님과 집을 보러 갔다. ‘파크푸르지오’라는 이름답게 단지 안의 조경이 아름다웠다. 25평이지만 구조가 효율적이었고, 관리도 잘 되어 있었다. 지하철로 출퇴근하기도 좋았다. 생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목동과도 가까웠다. 덤으로 멀지 않은 미래에 목동 재건축이 시작된다면, 목동의 전세 수요도 일부 이동해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집은 마음에 들었다. 이제 사기를 당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우선 집안 환경을 살폈다. 집주인의 가족 사진이 있으면 안심될 것 같았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을 담보로 사기 칠 가능성을 적을 테니까. 거실에 큰 책장이 있었다. 책장 가운데 TV가 있었고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 수 있는 구조였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그날 해야 할 공부를 다 해야만 TV를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왜 집을 내놓았는지도 여쭤봤다. 글로 옮길 순 없지만 납득 가는 답을 들었다.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가 등기부등본을 떼봤다. 대출도 없었다. 그 단지에 하나뿐인 매물이었고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바로 가계약금을 입금했다. 최대한 빠른 날짜로 입주일을 정했다.
12월 초에 계약하고 그 달 말 잔금을 치렀다. 모든 과정이 조심스러웠다. 또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내 이름으로 된 등기필증을 받은 뒤에도 등기부등본을 새로 발급받아봤다.
다행히도 이번엔 사기당하지 않았다. 큰 실패를 겪은 후, 나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원칙을 세우고 이를 지켰다. 그렇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약 또 사기당할까 겁나 움츠러 들었다면, 지금도 부모님 집의 작은방 한 칸에 살았을지 모른다.
8. 앞으로 나아가기
새해가 되어 새 집으로 이사했다. 창고에 쌓아두었던 살림을 찾아와 먼지를 털어냈다. 아내와 나는 ‘우리 집’에서 그동안 고생했다며 서로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우리 집이라는 단어가 안정감과 만족감을 줬다. 곧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부동산을 상대로 한 소송 결과도 나왔다. 승소였다. 맙소사,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이 있을까? 인생의 깨달음도 얻고, 돈도 되찾고, 행복한 ‘우리 집’도 생기다니.
8년이 지났지만 가끔 그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껏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묻어놓았다.
마음 먹고 돌이켜보니, 몇몇 장면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그 날들의 날씨와 장소, 기분까지 생생하다. 신혼 살림을 싣고 창고에 갔을 때가 그렇다. 단풍이 예쁘게 물든 10월의 용인이었다. 밖은 아직 밝은데 창고 안은 어두컴컴했다. 냉장고부터 세탁기까지 구석에 쌓아두고 비닐로 덮었다. 사진도 찍었다. 언제 찾으러 올지 기약이 없으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나아갔다. 밖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후 다시는 사기당하고 싶지 않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부동산 강의도 듣고 나만의 투자 원칙도, 인생 계획도 세웠다. 괴로운 기억은 잊기로 했다. 과거에 묶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 부동산 중개인은 항소했다. 자신들이 고의로 잘못한 것도 아니고, 황 사장이 작정하고 사기를 치는 걸 어떻게 막느냐는 논리다.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Edit 정경화 금혜원 Graphic 조수희
해당 콘텐츠는 2023.09.13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