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카포트와  A spending diary가 그려진 문고리 팻말 그래픽

경험 많은 개털의 소비 일기

by 이 현

언젠가 월 1천만 원을 버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건물을 지어 여러 칸의 원룸을 만들었고 세를 주어 월 1천만 원을 벌지만, 여행 같은 삶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나도 한탄을 했다. 나는 ‘경험 많은 개털’이라고. 듣는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글쎄. 난 정말 월 1천만 원 월세 수입이 부러운걸.

비록 월세 수입은 없지만, 남들이 흔하게 하지 않을 만한 소비 경험을 했으니 그 경험을 풀어보려 한다. 결국 내가 산 물건들은 당시의 내가 어떻게 살고 싶어 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했는지 보여주는 바로미터니까. 이 글은 소비 일기를 가장한 나의 20대, 30대 회고록이다.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은 그곳에서 상을 탔지만, 난 비치 타월을 샀지

프랑스의 남부 도시 칸(Cannes). 대한민국 국민인데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 도시를 모를 수 없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탔으니까. 세계적인 문화 예술의 도시에서 나는 고심하고 고심해 시뻘건 비치 타월을 샀다.

때는 바야흐로 2013년. 당시 나는 한국 영화를 해외에 수출하는 해외영업팀의 일원으로 칸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 세계 각국의 영화 바이어들과 세일즈 담당자들이 만나는 마르쉐 디 필름(Marché du Film)에 참가 중이었다. 그리고 퇴사를 고민하는 번뇌의 직장인이기도 했다. 고민 없는 직장인이 어디 있겠냐마는, 진지하게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자문하는 상태였다. 내 버팀목이던 사수가 팀을 떠났고, 이후 들어오는 후배들도 줄줄이 퇴사하던 시절이었다.

“아니 퇴사하고 싶은 건 난데, 대체 다들 왜 나를 두고 먼저 이 팀을 떠나는 건데!"

밑 빠진 독을 막는 두꺼비처럼 일하던 내게 번아웃이 찾아왔다. 번아웃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먼저 월경이 멈췄다. 고3 때도,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고시생 시절에도 내 월경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주기만큼이나 정확하게 돌아왔는데, 몇 개월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불면증도 찾아왔다. 밤새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동이 터 있었다. 피곤을 짊어지고 회사로 향하는 날들이 수개월 이어졌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다. 내게도 결심이 필요했다.

‘이번이 내 인생 마지막 칸이다.’

결기로 가득 찬 나는 곧장 영화제 기념품을 파는 가게로 돌진했다. 이것이 내 인생 마지막 칸 국제 영화제라면, 이곳을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반드시 사야 하니까! (내 생각의 궤적이 이해가지 않는다면, 미안하다. 아직 당신이 소비요정이 되기 위해 더 많은 소비가 필요한 것 같다.) 영화제 기념 수첩, 스케쥴러, 배지 같은 평범한 것 말고 강력한 기념품은 없을까? 매의 눈으로 굿즈 샵을 훑어보던 나의 레이더에 걸린 것은 바로 시뻘건 비치 타월이었다.

비치타월에는 큼지막하게 ‘Festival de Cannes 2013’라고 적혀 있었으니, 자신이 곧 이 영화제나 다름없다고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칸의 상징으로 빠질 수 없는 종려나무잎까지 새겨져 있다니, 완벽했다. 가격은 135유로로 매우 비쌌지만 큰 마음을 먹고 타월을 데리고 돌아왔다. 타월 덕분인지 칸에서의 결심은 현실이 되었다. 다음 해 칸 출장을 가지 않고 퇴사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비치타월은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샤워 후 몸을 닦는 넉넉한 크기의 수건으로 이만한 물건도 없다. 매우 비쌌던 가격치고 매번 빨강 물을 내뿜는다는 것은 문제지만. 하지만 이 시뻘건 타월은 언제고 나를 10년 전으로 데려가 준다. 번아웃과 번뇌로 가득 찼던 내 20대 후반, 어디서부터 어떻게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만둬야 한다는 마음만큼은 강력했던 그 시간으로 말이다.

살면서 그때와 비슷한 순간을 마주한다면, 그 타월은 내게 ‘그만둘 용기’를 일깨워 줄 것이다. ‘10년 전, 넌 비슷한 고민을 하고 회사를 그만둬도 되는지 고민을 했어. 회사를 나와서 네가 일궈온 걸 봐. 새롭게 너만의 길을 내고 있잖아. 인생은 그렇게 계속되는 거야. 그러니까 사실 다 괜찮아.’라고 말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명품 가방과 함께

곁에 오래도록 남아 죽비 같은 가르침을 주는 소비도 있다. 무려 ‘현금’으로 결제한 225만 원짜리 명품 Y사 가방*이다. 강렬한 빨강 가죽에 영롱한 Y자 모양 금속 장식이 있는 가방이다. (이쯤 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빨강이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아니다.)

*저자의 말: 이 에세이는 특정 물건을 샀던 경험을 바탕으로 삶을 회고하고 있기에, 독자에게 구입한 명품 브랜드 가방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고 싶었다. 혹시라도 이 가방의 브랜드와 모델명이 알고 싶다면 bubblegum11@naver.com으로 연락 바란다.

회사 다니는 내내, 이 가방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내 월급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이런 가방이 가당키나 해?’ 라며 늘 스스로를 달랬다. 그랬던 내가 퇴사를 저지르고 말았다. 퇴사 직후의 인간은 상당히 무모해진다. 게다가 오랜 스트레스와 번아웃 끝에 결심한 퇴사라면? 당시 나는 위험한 짐승이었다. 위험한 짐승은 퇴사 후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된다.

“아니, 내가 이 정도도 못 해?”

보상심리로 무장한 나는 성큼성큼 백화점 명품매장으로 갔다.

“이걸로 할게요.”

225만 원에 나는 내 욕망을 충족했다. ‘난 이런 거 들어도 되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으로 꽉 차서 저지른 명품.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나의 체력은 언제나 오늘 같지 않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높은 힐을 신고 밤새 클럽에서 뛰어놀 체력이 없다는 걸 말한다. 가죽이 많이 쓰여 무게가 묵직한 가방은 들 수도 멜 수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쁘지만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다가 피곤해지면 가방을 길바닥에 내던져 버리고 싶어졌으니까. 이것이 30대를 맞이한 나의 신체적 변화였다.

하루하루 떨어지는 체력에 내 몸은 점점 이 가방을 들고 외출하는 것을 망설였다. 결국 이 가방은 장롱 한구석을 지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고, 보다 못한 나는 가방을 중고로 팔기로 결심했다. 몇 번 들지도 못했기에 컨디션은 매우 좋았다. 4년 전에 225만 원에 샀고 인기 좋았던 모델이었으니까 못해도 100만 원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가방을 되팔 생각에 제법 들떠 있었다. 중고 거래 앱에서 해당 모델을 검색해 봤다.

“뭐? 30만 원?”

믿을 수가 없었다. 30만 원이라니! 왜 이렇게 헐값에 올린 거지? 내 가방은 분명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머리를 굴렸다. ‘청담동, 압구정동 같은 데서 중고 명품 가방 매입하는 가게들을 봤어. 가서 직접 감정을 받아보자.’

중고명품 매장을 찾았다. 세상에, 로비부터 고급스럽다. 이탈리아 귀족이 앉았을 법한 소파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흘깃 매장 안을 보니 명품 브랜드의 가방 하나하나가 조각 작품처럼 할로겐 조명을 받고 있었다. 좋다, 이들은 전문가들이로군. 내 가방의 진가를 알아봐 줄 거라 생각했다.

“손님, 이 가방은 30만 원 정도에 매입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내게 이 가방을 225만 원에 팔았으면서 이제 30만 원에 되사겠다 한다. 명품 가방을 팔기 위해 무더운 여름날 새틴 스커트까지 챙겨 입은 내 자신이 중고 매입가만큼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감가상각이란 것인가. 내 사랑 명품 Y사의 가방은  무려 구입가의 13%가량으로 그 가치가 쪼그라들었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그 무거운 가방을 하늘이 내린 형벌처럼 지고 집에 왔다. 가방은 여전히 장롱 속에서 세월을 정통으로 맞고 있다.

‘명품 Y사 사태’ 이후 나는 명품을 사지 않는다. 때때로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앞으로 명품을 사지 않겠다는 다짐도 덧붙이는 데 그럴 때면 “야, 그러니까 샤넬을 사라고.” 하는 친구도 있다. 물론 그 친구가 샤넬을 사든, 에르메스를 사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나는 당분간 명품을 사지 않을 생각이다.

20대 때 명품 가방을 든 사람을 보면 이렇게 생각했다. ‘저런 가방을 살 정도로 저 사람은 부자인가 보다.’ 혹은 ‘저 가방을 저 옷에 매치하다니 센스 있군!’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조금 더 다면적이다. 만약 명품을 착용한 사람이 지하철을 탔다면, ‘월급의 몇 퍼센트를 저 제품 구입에 썼을까?’라며, 그 사람의 벌이와 씀씀이에 대한 추측을 하는 식이다. 물론 대중교통을 탄다고 해서 누군가의 월 소득이 적을 거라고 섣불리 예단할 순 없지만.

명품 Y사 가방으로 죽비 같은 깨달음을 얻은 후, 소위 명품을 살 때 내가 힘들여 번 돈이 누구의 주머니로 향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명품 제조사도 결국 회사이고, 명품은 그들이 파는 상품일 뿐이다. 왜 굳이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을 명품 제조사 주머니에 꽂아줘야 할까. 조금 더 솔직하게는, 현직 홍보마케터로서 배알이 꼴리는 것도 있다.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돈을 써 상품을 홍보해 주는 게 바로 명품 소비 아닌가. 소비자가 제품을 착용한 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함으로써 상품 노출의 기회를 계속 늘려주니 말이다.

더군다나 명품 브랜드들은 매년 어김없이 가격 인상을 시도한다. 이 부분 역시 내가 고약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내 월급은 그대로인데 어째서 그네들은 별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가격을 올린단 말인가? 소비자로서 이런 제품을 곧이곧대로 사주는 건 나만 손해 보는 장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더욱이 명품을 오래 소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가격이 오르는 것도 아니라는 걸 내 가방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요즘은 명품보다는 노후 부담을 덜어줄 반려 자산을 들이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주식, 부동산 등 장기적인 시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는 늙을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돈 들어갈 곳은 많아질 테니 말이다.

오후 3시 칸트는 산책을 했고, 나는 도서관 한구석에서 피카(FIKA)를 했다지

모든 소비가 내게 죽비 같은 가르침을 선사하는 건 아니다. 외려 나의 빛나는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소비도 있다.

30대 초반,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스웨덴행을 결심했다. 한국이 싫어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어서 해외로 석사 유학을 떠났다. 번아웃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사람으로서,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스웨덴에 가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스웨덴의 복지 정책을 공부하며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던 그 시절, 나는 비알레띠(Bialetti) 모카포트와 함께했다.

오후 3시. 당도 떨어지고 집중력도 흐트러지는 이 시간에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매일 산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칸트만의 리추얼이었던 셈인데, 그 오후 3시에 스웨덴 사람들은  피카(FIKA)를 한다. 피카란 커피와 간식을 겸한 휴식 시간을 뜻한다. 스웨덴 사람에게 커피란 생명수처럼 자주 마시는 것이고, 피카는 상당히 신성한 것이다. 피카를 안 하는 것은 하루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셈이랄까.

석사 4학기째 논문을 쓰던 시절, 나는 이탈리아 출신 박사생의 아파트를 서브렛(Sub-let, 전대)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사람답게 커피를 사랑했고, 비알레띠 모카포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헝가리로 인턴쉽을 하러 간 동안 세간살이는 모두 내가 대여하게 되었고, 비알레띠 모카포트는 논문 학기를 보내는 내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나의 아침 리추얼은 애정하는 카페에서 사 온 향이 기가 막힌 원두로 모카포트에서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 자전거 타는 소녀가 그려진 보온병에 커피를 쪼로록 따르고, 뜨거운 물을 조금 부은 뒤 보온병을 꼭 닫는다. 이 커피는 나의 성스러운 피카에 쓰일 것이니, 피카에 빠질 수 없는 달달한 간식도 챙겨 도서관으로 향한다.

나의 피카 간식 원픽은 Mums(멈즈)라는 이름의 초콜렛 케이크. 이 케이크는 폭신한 브라우니를 닮았는데 겉에는 말린 코코넛 가루가 솔솔 뿌려져 있다. 맛이 궁금하다고? 멈즈는 스웨덴어로 ‘매우 맛있다!’(느낌표를 필수다)는 뜻이니, 이하 생략하겠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논문 페이지만큼, 내가 마신 커피와  멈즈 케이크도 쌓여 갔다. 논문 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모카포트와 흠뻑 사랑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해 여름, 논문 학기를 함께 보냈던 이탈리아 집주인의 모카포트와 꼭 같은 모카포트를 사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그 모카포트로 커피를 종종 내려 마시는데, 커피를 내릴 때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행복해지겠다며 무모한 용기와 뜨거운 가슴으로 한국을 떠났었지만, 뜨거움은 금세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있던 스웨덴 예테보리는 우산을 써도 어김없이 빗물이 얼굴에 흩뿌려지는 곳이었으니까. 예테보리의 스산한 거리를 쏘다니며 나처럼 타국에서 온 친구들과 피카를 하는 것은 삶의 큰 위로였다.

친구도, 친척도 없는 타국에서 보온병에 모카포트로 갓 내린 커피를 담던 수많은 아침들. 수도승처럼 고요히 도서관에서 논문을 쓰다, 칸트처럼 어김없이 오후 3시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마시던 날들을 나도, 그리고 나의 모카포트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아흔셋이 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다 쓸데없다!’

중구난방 같은 내 소비를 되돌아보면, 결국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20대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중시했는지. 30대의 나는 어떻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고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런데 올해로 아흔셋이 된 우리 할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정말 진절머리 나게 물건 많이 사 봐서 아는데, 다 쓸데없다! 너는 물건 많이 사지 마라!”

맥시멀리스트 오브 맥시멀리스트였던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안방 화장실을 옷 창고로 쓸 정도로 물건이 많았던 분이다. 파워 외향인이었던 할머니는 80대까지도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종횡무진하셨다. 트렌드 세터이기도 해서 할머니가 걸치는 아이템은 계 모임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곤 했다.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남대문에서 같은 아이템을 떼어다 파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할머니를 미니멀리스트로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짐도 줄이고, 집도 줄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밖에서 사람 만나던 게 낙이던 할머니는 이제 지하철을 탈 수 없다. 집 안에서도 지팡이 없이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다.

외출을 자주 하지 않으니, 할머니가 입는 옷은 실내복 몇 벌로 한정됐다. 그래도 할머니의 소싯적 소비 습관은 어디 가지 않아서 예쁜 물건, 새 물건을 선물 받는 것을 기뻐하신다. 할머니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면 종종 할머니에게 무언가 사다 드린다. 필요한 것 없냐고 묻는 내 전화에 망설임 없이 ‘황금색 통에 든 영양크림’을 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나는 할머니의 건재함을 확인한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시기에 따라 지갑을 기꺼이 여는 대상이 변해왔다. 힘들게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퇴사를 결심하던 순간에 칸에서 샀던 비치 타월, 퇴사를 축하하는 선물이라며 호기롭게 샀던 명품 가방, 외롭고 불안하던 스웨덴 유학 시절의 모카포트까지.

기쁜 마음으로 돈을 썼음에도 어떤 소비는 장렬히 실패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어떤 소비는 크게 성공해서 아주 오랜 기간 애착템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소비의 이면에는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더 있다. 바로 내가 산 물건들에 내가 살아온 나날들이 있고, 내가 했던 결심들도 있고,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도 있다는 것을.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물건도, 애착템이 된 물건도 결국은 어느 계절 내게 큰 기쁨과 의미를 주었다는 사실 말이다.


Edit 이지영 Graphic 조수희

해당 콘텐츠는 2023.9.6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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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에디터 이미지
이 현

영화산업에 몸담았던 소비요정. 현재는 소비보다 나의 자유가 간절한 스타트업 회사원. 자산은 내게 '자유'와 '에너지'를 허하는 만큼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오늘도 출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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