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 인생 첫 장학생을 선발하기로 했다
ㆍby 양소희
‘인생의 최종 목표가 있나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리 모두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해 봤거나 주고 받았을 질문이다. 나는 처음에 어떻게 답했더라. 정확하진 않지만, 스무살 무렵부터 한 가지는 분명하게 언급했다. 언젠가 꼭 장학재단을 세우겠다고. 특히 나처럼 지방에서 나고 자랐고, 넉넉한 형편이 아니더라도 항상 마음 한 켠에 큰 꿈을 품고 분투하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이 꼭 되고 싶다고.
로맨스 학원물보단 공포 스릴러물에 가까웠던 청소년기를 꾸역꾸역 지나오면서 오래도록 다짐한 목표였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해왔지만, 한편 당장 지금의 내 몫은 아니라 여겼던 꿈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명성도 어느 정도 쌓아 올린 멋쟁이 할머니가 된 양소희의 몫. 지금의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내가 언젠가 이뤄야 할 목표 ‘장학사업'.
한 치의 오류도 없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일말의 의심조차 없었던 목표에 질문을 던지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멋쟁이 할머니가 되어서야 이룰 줄 알았던 인생의 최종 목표
청소년 시절부터 겪은 여러가지 경험과 지식을 틈틈이 기록하고 공유해왔던 개인 블로그가 있다. 수 년간 운영하며 구독자 규모가 꽤 커졌고,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더 자세히 배우고 싶다며 컨설팅이나 웨비나 등을 요청하는 등 선뜻 돈을 지불하려는 독자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시범 삼아 이것저것 팔아보기로 했다. 대학 생활 및 휴학 기간 동안의 자기관리 방법을 담은 템플릿과 프로젝트, 시간관리 꿀팁 노트와 영어 독학 비법 노트, 각종 지식을 공유하는 웨비나와 필요한 경우 1:1 컨설팅까지 기획해 꾸준히 판매해 본 것이다.
과연 사람들이 이런 걸 구매할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오픈했지만 대부분 예상치를 뛰어넘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가끔은 당시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수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렇게 쌓이는 부수입은 내 경험 자산을 판매해 얻게 된 돈이라 더욱 소중했다. 새로운 수입이 발생하자 특별한 의미를 만드는 데에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머릿 속을 스쳤다.
‘장학사업, 지금 이 정도로 시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10초도 안 되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무슨 장학사업, 턱도 없지. ‘장학재단 이사장’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와 지금의 나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이었으니까. 그 뒤로 인생의 최종 목표를 묻는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쿡 찔렸다. ‘언젠가 더 벌었을 때’, ‘더 많이 모았을 때’ 하겠다는 의지만으로는 미루고 미루다 결국 못하게 되지 않을까? 단지 근사한 목표 정도로 남아버리는 건 아닐까?
끈질기게 따라붙는 질문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게 됐을 때, 마음이 향하는 쪽을 곰곰이 탐구하다 결론을 내렸다. 정말 마음 다해 실현하고 싶은 꿈이라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80대 멋쟁이 할머니 양소희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평범한 스물 다섯의 양소희가 직접.
집도 차도 없지만, 장학재단은 만들 수 있지!
인생의 최종 목표 실행일을 갑자기 60년 쯤 당겼더니, 마음이 벅차오르다가도 조급해지고 불안하다가도 설렜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어딘가라도 털어놓고 싶어 가까운 지인들에게 먼저 대략적인 계획을 공유했다. “블로그 부수입으로 장학 기금 한번 만들어 보려고, 지방 청소년들 대상으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아낌없는 지지와 감탄, 응원을 보내줬다. 하지만 진심 어린 걱정과 우려를 표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정도면 시드머니로 투자해서 잘 굴리고 더 키워서 나중에 하는 게 낫지 않아?”, “그럼 넌 언제 집 사고 차 살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대단한 자산가도, 월 몇 천만원씩 수익을 벌어들이는 사람도 아니니까. “이 험한 세상에 부디 네 앞가림이나 잘했으면” 하는 친구들의 염려는 어쩌면 당연했다. 처음엔 그런 말들 앞에 작아지는 듯 했지만, 희한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다짐은 점점 확고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이유가 거듭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우선, 부수입은 당장 먹고사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금액이 아니다. 그리고 1년간 가볍게 시도해본 수익화 경험을 통해 이 정도는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또 벌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겼다.
무엇보다 장학 사업 역시 ‘투자'라 생각한다. 올해 네다섯명의 장학생을 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10년차 쯤 됐을 때 최소 40~50명 내외의 ‘양소희 장학생‘들이 생겨날테지. 이들이 멋진 어른으로 성장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더욱 큰 임팩트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투자하고 싶은 ‘가치주 종목’이 있다면 바로 이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부유한지 여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아무렴, 집도 차도 없지만 장학재단은 만들 수 있지!
조금은 독특한 ‘꿈 여행 장학’을 기획한 이유
그렇게 나는 소소하게 부수입으로 모아왔던 목돈으로 장학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학비나 생활비를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현금성 장학이 아닌 다른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건 훨씬 더 큰 규모의 재단이나 자산가들이 이제껏 많이 해왔고,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방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꿈 여행 장학사업’을 운영해보기로 했다. “응? 꿈 여행 장학?” 열에 아홉은 곧장 되물었다. 보통 장학사업이라 하면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일단 돈을 쥐어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장 먹고 살기 위한 삶의 최저기준선을 충족하도록 현금성 지원을 해주는 장학사업은 이미 꽤 많이 존재한다. 나 역시도 한때 그러한 장학사업의 수혜자였고, 덕분에 막막했던 고비를 넘겼다. 세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선의로 굴러가는구나 몸소 느낄 때면 왠지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삶이란 게 단지 최소한의 먹고 사는 것만으로 완전히 채워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더 넓은 세상과의 연결, 다양한 경험, 영감, 상상…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만의 기준, 시야, 그리고 가치관. 한 사람의 세계는 결국 이런 것들로 풍성해지고 확장되어 가며 비로소 주체적이고 완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당장 필요한 돈 만큼이나 중요한 자산이라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다섯 살, 선생님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미국 대사관에서 주최한 전국 중학생 외교 프로그램에 제주 대표로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자부심을 가득 안고 서울에 방문했는데, 내 경험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양한 경험을 해온 수도권 친구들이 있었다. 월등한 실력을 쌓아온 그들 사이에서 기가 팍 죽었고, 그날 밤 홀로 숙소로 돌아와 조용히 펑펑 울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때 그 감정은 부러움보다는 분노와 서글픔에 가까웠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이 성장과 도약에 큰 자산으로 남는다는 사실, 그러나 지방의 청소년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이후에도 끊임없이 체감했다. 단지 내 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방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온 친구들의 삶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문제의식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경험한 끝에, 나는 ‘꿈 여행 장학'이라는 실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지방 청소년과 수도권 청소년 간 존재하는 시야의 차이, 기회의 질적 차이, 더 나아가 경험의 양극화를 나만의 방식으로 균열 내보고 싶었다.
누군가는 ‘꿈 여행 장학’이 독특하다 했고, 이런 낯선 형태의 지원이 꼭 필요한지 궁금해 하기도 했다. 또다른 누군가는 ‘당장 급급하지도 않은데 너무 사치스러운 것은 아닌지’ 묻기도 했지만, 인간이 더욱 주체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가꾸고자 하는 바람을 과연 사치라 치부할 수 있을까?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제주에서 실험을 시작하다
우선 내 고향인 제주의 청소년들 대상으로 이 실험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방향은 이러하다. 수도권 곳곳의 주요 인프라와 명소를 경험하고, 멋진 멘토들과 어른들을 비롯한 사회문화적 자본을 직접 마주하고 연결짓는 특별한 여행으로 시작한다. 제주의 청소년들이 접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험을 선물하는 셈이다.
약 일주일 간의 꿈 여행을 마친 이후엔 살고 있는 동네로 돌아가 ‘나만의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실행해야 한다. 새롭게 보고 배운 것, 영감을 받은 것, 또는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우리 지역의 무언가를 활용해 크고 작은 활동을 직접 기획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요되는 모든 비용(항공권, 숙박비, 식비, 교통비, 멘토링, 기타 물품비 등)을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1년간 블로그 활동을 통해 얻은 수입의 일부를 활용해 장학기금으로 조성했다.
여느 장학 프로그램이 그렇듯, 꿈 여행 장학 프로그램도 수료를 위한 조건이 있다. 바로 ‘나만의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꼭 실행해보는 것’. 청소년들이 하기에 어려운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도권 구석구석의 뛰어난 인프라를 경험해 보고,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온 감각으로 흡수하다 보면 자연스레 의문점이 떠오를 것이라 기대한다.
‘왜 우리 동네에는 이런 게 없지?’, ‘왜 내 주변에는 이런 도전이나 시도를 하는 사람이 없을까?’ ‘이런 건 오히려 수도권엔 없지만 우리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부재와 발견의 감각은 이렇게 깨어난다. 이렇게 떠오른 질문에서 시작하면 된다. 위대한 변화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머릿 속으로만 그려오던 고민과 생각을 블로그에 옮겼다. 마음 속에서 쓰고 지우길 반복했던 내용을 실제 언어로 그려냈다. 평생의 목표이기도 했던 다짐을 한 글자 한 글자에 꾹꾹 눌러 담아냈다. 몇 번을 공들여 고친 뒤 드디어 ‘발행’ 버튼을 눌렀다. 프로젝트 명 ‘비상한상상’, 스물 다섯 인생 첫 장학생을 선발하겠다는 깜짝 선언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인 순간이었다.
‘순수한 선의를 베푸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 세상이지만
첫 삽을 뜬 후, 정말 많은 연락을 받았고 새로운 사람들도 끊임없이 만났다. 미션에 공감한다며 흔쾌히 운영 스탭으로 함께해준 친구와 동료들이 전국 각지에 생겼고, 아무런 대가 없이 나의 장학생들과 만나주겠다며 회사로 초대하거나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분들도 있었다.
단연 하이라이트는 장학생 모집에 지원한 제주 청소년들과의 만남이었다. 서툴지만 반짝이던 눈빛과 말투, 유려하진 않아도 솔직하고 따뜻한 각자의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했다.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고 싶어 운영팀 모두 선발 과정 내내 머리를 싸매던 순간이 선명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트리기도 했다. 1기 장학생으로 최종 선발된 친구가 돌연 참여를 취소하겠다는 연락을 주었다. 어머니의 격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내가 설득해볼 수도 있다 말하자, 그는 조심스레 답했다. “저희 엄마가 순수하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거기 사이비 종교 단체 아니냐 의심하셔서, 더이상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예요.” 어린 나이에 장학사업을 시작한 덕에 다양한 질문과 반응을 마주하긴 했지만, 사이비종교 단체라 오해하시다니…!
예상치 못했던 오해가 무척 당황스러웠고, ‘순수하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말이 마음 속에 꽤 크게 박혔다. 결국 그는 장학프로그램 참여를 포기했다. 이번 기회에 함께하지 못해 너무 아쉽고 슬프지만, 그래도 믿고 뽑아주어서 고맙다는 문자를 남기면서.
무어라 위로할까 고민하다 짧은 답장을 남겼다. 나도 함께하지 못해서 정말 아쉽지만, 우리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거라고. 그리고 세상엔 너의 꿈과 열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친구들이나 어른들도 정말 많을 거라고. 그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후에도 종종 불쑥 튀어나오는 의심과 몇 번이고 마주했다. ‘이런 장학사업을 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입증해보라는 식의 미심쩍은 눈빛을 마주할 때면 이런 생각까지 했다. ‘차라리 매년 이 돈으로 명품 가방을 사겠다고 했으면 덜 의심 받았을까?’ 나의 오랜 목표와 순수한 의도를 증명하고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시간과 힘을 써야 한다니.
하지만 고맙게도, 회의감과 씁쓸함을 이겨낼 수 있는 장면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쌓여갔다. 꿈 여행 장학 사업을 구상하며 썼던 수많은 글과 메모, “내가 쓴 돈이 이렇게 멋진 일로 이어진다니 기쁘다”며 응원해주셨던 블로그 독자님들, 이 장학사업을 통해 풀고 싶은 문제 의식과 이뤄내고 싶은 비전에 기꺼이 마음을 모아준 운영팀과 동료, 멘토들이 늘 곁에 있었다.
무엇보다 제주 곳곳에서 각자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가고 있는 청소년 지원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모든 오해와 의심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된다. 각별한 인연이 된 장학생들 덕분에 더욱 강한 확신을 얻기도 한다. 꿈 여행 장학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푹 빠지고, 서서히 변화하는 장학생들을 목격할 때면 더없이 큰 감동과 자극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과연 이보다 더 근사한 플렉스(flex)가 있을까
장학생 선발 과정에서 ‘꿈 여행 중 꼭 경험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었는데, 의외이면서도 재미난 답변이 있었다. “꼭 도시 야경을 보고 싶어요.” 이 답을 한 서호는 요리사를 꿈꾸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꼭 미식 여행일 필요는 없다며, 새로운 경험을 통해 영감을 얻고 싶다고 했다. 좋은 요리사로 성장하는 데에 꼭 필요한 밑거름이 될거라 기대한다고.
꿈 여행 마지막 날 밤, 우리는 깜깜해진 하늘을 향해 120여 층에 달하는 타워 전망대에 올랐다. 서호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띵’ 하는 도착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눈 앞엔 도시의 황홀경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늘 홀로 묵묵히 관찰하고 조용히 듣던 서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쉼이 없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탄성을 내질렀다. “너무 좋아요, 행복해요. 이런 건 정말 처음 봐요. 여기서 떨어져도 정말 여한이 없겠어요!”
그래 맞아, 이런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꿈 여행 장학사업을 시작했지. 눈 앞에 펼쳐진 낭만, 숨이 트일 듯한 풍경, 맘껏 그리워 할 수 있는 추억. 그런 것들로 버티고 이겨내며 살아가게 될 때도 있으니까. 오늘의 낭만은 서호의 마음에 어떤 빛으로 남게 될까, 그가 마음 속에 품은 불빛은 그의 손을 따라 어떤 요리로 탄생하게 될까, 반짝이는 요리가 누구에게 이어질까. 이렇게 근사한 상상을 해볼 수 있는 시작점을 선물할 수 있어서, 그리고 함께 지켜볼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다른 1기 장학생 윤미는 처음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꿈 여행 OT 날 일정 전반에 대한 소개를 듣고 난 윤미는 여러 멘토들과의 만남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 같다며 약간의 부담과 불만족을 내비쳤다. 본인이 기대했던 문화체험 프로그램 위주로 구성되지 않아 아쉬워 하는구나 싶었는데, 셋째 날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이번 꿈 여행 기회가 너무 고마운데요, 가장 큰 이유는 이제까지 못 봤던 어른들을 만나서예요. 이제까지 만났던 어른들은 저를 쉽게 부정했어요. 안 된다, 틀렸다, 못 한다고… 가끔은 제가 더 잘 아는데, 너무 쉽게 말하고 단정 짓는 어른들이 괜히 싫증나고 서운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만난 어른들, 멘토님들은 너무 달랐어요. 할 수 있다고, 일단 해보면 된다고, 뭐든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그냥 하는 말씀들이 아니였어요. 눈을 막 반짝이고 진심을 가득 담아 얘기해 주시는데 괜히 마음이 들뜨고 용기가 샘솟는 거예요. 그래, 나 아직 어리잖아? 가능성이 많은 존재잖아? 같은, 평소의 저라면 안 해봤을 생각도 막 하고요.”
이 대화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간 윤미가 경험해왔던 어른들과의 대화는 대체로 낙담과 부정이었다. 먼 서울까지 가서 그런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던 두려움 내지 불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윤미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어른들‘과의 짧은 대화를 통해 경험한 변화를 온 몸으로 설명해 주었을 때의 그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한다.
동시에 새로운 질문도 생겼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청소년들이 좋은 어른들과의 대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좋은 어른이 되어가야 할까.
꿈 여행 이후, 후속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는 장학생들의 변화가 반짝이는 순간도 목격했다. 정윤은 제주 도내 첫 학생 주도 학회를 설립했다. ‘혁신은 대단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다 보면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렇게 혁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멘토의 조언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원하는 게 없다면 기다리지 말고 직접 만들자 결심하게 됐다고.
이후에 만난 정윤은 “처음엔 개인의 성취가 중요했지만, 꿈 여행 장학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에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공동체가 함께 잘 되는데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커졌다”고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이렇게 늘 나는 장학 사업을 통해 준 것보다 훨씬 크고 값진 선물을 돌려받는다.
장학생들은 수료 이후에도 꿈 여행 장학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힘껏 응원하고 지지했다. 많은 친구들이 “‘비상한상상’ 프로젝트가 매년 진행될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돕고, 기여하고 싶어요!”라 말한다. 다른 이들의 사랑과 선의를 직접 겪어보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던 이들은 더 큰 사랑과 선의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걸 나의 장학생들은 이렇게도 보여준다.
자신을 둘러싼 경계 바깥의 세상을 늘 궁금해하고 꿈꿔왔던 청소년들이 이렇게나 많다. 이들이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도록, 좋은 어른들과의 대화를 통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도록, 나아가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해내고 있다는 걸 느낄 때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강렬한 짜릿함과 엔도르핀이 끓어오른다. 그리고 몇 번이고 실감한다. ‘아무리 명품을 사 모은다 해도, 이보다 더 근사한 플렉스는 할 수 없을 거야.’
나눔의 지속가능성, ‘경험자산’의 선순환을 꿈꾸며
고민도 시행착오도 많았던 꿈 여행 장학사업, 어느덧 2년 차가 되었다. 그 사이 아홉 명의 장학생을 배출했고, 열두 명의 운영팀 동료들을 얻었고, 스무 곳 이상의 기관/단체들과 협업했다. 출발선을 끊을 땐 망망대해 속에 홀로 서 있었는데, 어느새 이 독특하고 유별난 장학사업을 지지해주고 함께 만들어보자고 모여든 사람들이 가득 생겼다.
덕분에 무엇보다 확고한 ‘돈’기부여를 얻기도 했다. 장학생으로 선발된 제주 청소년들이 영감과 용기를 얻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 장학사업을 계속 해나가고 싶다는 의지가 강렬해졌다.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도 일정 수준의 부수입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했다. 이전처럼 자유롭게 블로그를 운영하는 대신 체계적으로 나만의 브랜드를 구축하며 운영하기 시작했고, 여러 실험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블로그 부수입 규모를 꾸준히 키워가기에 앞서 두 가지의 원칙을 정했다.
첫째, 자극적이고 유해한 방식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콘텐츠는 판매하지 않을 것. 둘째, 나만의 ‘경험자산’을 재가공해 콘텐츠나 서비스로 판매하되, 개인 간 거래를 넘어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갈 것.
이 두 가지 원칙 아래 ‘시간관리 꿀팁’, ‘상반기 회고와 하반기 계획 세우기’, ‘전액지원 해외탐방 +28개국 달성 노하우 공유’, ‘순수 국내 독학파와 재밌게 영어 공부하기 챌린지’, ‘100일 챌린지’ 등을 기획해 정기적으로 오픈했다. 그밖에도 각종 경험자산과 자기계발 노하우를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블로그 포스팅으로 정리해 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기고와 강연 요청도 꾸준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구축된 파이프라인을 통한 부수입의 20~50%는 반드시 ‘비상한상상’ 장학기금 모금에 활용했다. 경험자산을 판매해 얻은 수익을 ‘지방 청소년의 경험 격차 해소’라는 이니셔티브에 투자하는 과정을 지켜본 많은 독자분들이, 스스로의 발전을 넘어 서로를 돕는 일의 기쁨과 가치를 느낀다고 말씀해주셨다. 블로거와 독자라는 관계로 만난 우리가 느슨한 작당모의를 벌이는 파트너가 됐고, 나아가 일종의 커뮤니티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눔'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 장학사업은 우리만의 시위 방식, 또는 가장 진취적으로 미래에 희망을 걸어보는 방식일거야.’
2023년 봄, 2기 장학생 다섯 명과의 꿈 여행 경험 공유회를 가지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지역에서 시작해보기로 한 프로젝트, 우리 지역만의 독특한 가치를 찾아 키워보겠다는 당찬 계획을 듣는 내내 신나고 들뜨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가 사랑하는 지역 공동체에 잘 뿌려둔 씨앗이 어떤 싹을 틔울지 상상하는 재미를 만끽하며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날 야심차게 발표하던 학생들의 눈빛은 절대 잊지 못할테지.
언젠가 한 친구가 말해주었다.
“내 주변에 소희 너랑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꽤 있다? 나중에 재단 같은 거 만들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지금 당장 뭐라도 해보겠다고 나서서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은, 소희 너 딱 하나 뿐이야. 그게 나한테 너무 큰 충격과 용기를 줬어.”
내가 얻은 깨달음도 다르지 않다. ‘나눔'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크고 거대한 규모가 아니라, 작아도 지금 당장 기꺼이 실천하려는 의지라는 걸. 세상의 기준에선 작고 미미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절실한 누군가에겐 그의 세계를 지탱하는 데에 더없이 크고 소중한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걸.
‘내가 뭐라고 장학사업이란 걸 시작해도 될까?’ 고민하고 망설였던 당시의 내게 꼭 보여주고 싶다. 60년 뒤에 시작했다면 아마 평생 만날 일 없을지도 모르는 지금의 장학생들, 동료들, 또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눈동자들을. 60배의 돈을 지불하더라도 결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배움과 깨달음, 그리고 영감의 깊이를. 그리고 그 사이에 푹 빠져들어 더 큰 꿈을 꾸고, 더 큰 보폭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의 내 하루하루가 꽤 근사하다는 것도.
Edit 금혜원 Graphic 조수희
해당 콘텐츠는 2023.09.13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좋은 어른을 꿈꾸는 가능주의자. 디지털 기술과 정치의 접점을 연구하며 새로운 유형의 정치참여 무브먼트를 기획한다. ‘꿈을 향한 비상에는 경계가 없어야 한다‘는 가치 아래 비수도권 청소년들을 위한 꿈여행장학사업 ‘비상한상상’을 런칭해 이끌어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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