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바트를 벌고 밤에는 원화를 버는 아이콘 그림

낮엔 바트(฿)벌이, 밤엔 원화(₩)벌이

by 이현경

일본에서 태국 남자를 만나 연인이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한국 한 회사의 디자인팀에서 일하던 시절, 도쿄 출장을 갔다가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 인연이 이어져 남자친구가 되고, 또 남편이 되어 자연스레 태국에서의 삶을 감행하게 됐다. 2023년 여름, 이민자가 된 지는 어느덧 5년 차에 접어들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가장 애쓴 것은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일이었다.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대기업으로 옮겨 브랜드 디자인 기획자로 쉬지 않고 경력을 쌓아온 덕분에 태국으로 떠나올 즈음에는 나름 경쟁력을 갖춘 디자이너로 한창 일하는 중이었다.

커리어가 내게 무척 중요했던 만큼 이민을 떠나올 때도 안정적인 직장에서 인정받는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다. 물론 가장 큰 걱정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언제든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거였지만, 동시에 일을 내려놓고 간다는 게 불안하기만 했다. 태국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나의 결론이 뭐였냐면 “해야지 뭐 어떡해. 나 잘할 수 있겠지?”였다. 직접 선택한 인생, 어떻게든 잘해보자.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금은 태국의 수도, 방콕에 산다. 전 세계에서도 외국인이 많이 사는 도시로 꼽히는 곳답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채로운 문화를 매일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살면서 어떻게 수많은 문을 두드려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흥미로운 연결고리들을 만들어 새로운 커리어까지 쌓아가고 있는지,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바트(฿)를 벌려면 태국어를 해야지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돈을 벌면서 살아야 하나? 너무 준비 없이 떠나온 게 아닐까? 내가 너무 겁이 없었나? 여기서 디자이너 경력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

방콕에 온 며칠은 머릿속이 온통 새하얬다.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싶을 때쯤 지인을 통해 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는 태국인 A언니를 소개받았다. 그간 해외 곳곳에서 일을 해봐서 여러 나라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언니와의 심층 상담을 통해 태국에서 돈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알게 됐다.

우선 태국 회사에서 일하면 한국에서 같은 경력으로 같은 일을 할 때보다 연봉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은 했는데, 예상보다 더 적은 금액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실망감이 슬며시 몰려왔다. 외국계 회사에 입사하면 한국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겠지만 입사하기 힘들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태국에 이미 젊은 디자이너의 공급이 넘쳐난다는 건 몰랐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었다.

“태국어도 한마디 못하는 외국인을 태국 회사든 태국에 있는 외국계 회사든 과연 받아줄까?” A언니 말로는 여기서 디자이너로 일자리를 구하려면 반드시 태국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아는 태국어라고는 싸와디카(안녕하세요), 컵쿤카(고맙습니다)뿐이었다. 3박 4일 놀러온 관광객과 다를 게 없었다. A언니 이야기를 듣다가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어떤 티도 낼 수 없어서 그저 웃었다.

자존감이 실시간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이어졌고, 태국에 뿌리 내리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어에 기댈 것이 아니라 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좋은 기회를 맞닥뜨렸을 때 태국어에 발목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방콕의 플런칫(Phloen Chit) 역에 있는 태국어 학원을 찾아갔다. 태국어 기초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이곳에 와서, 생존하겠다는 일념으로 낯선 언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동질감 때문인지 내가 들어본 수업 중에 가장 빠르게 친구가 됐고, 가장 진지하게 수업에 임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의 좋은 영향 덕분인지 1년 동안 꾸준히 태국어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제 남편을 비롯한 태국 가족들과 태국어로 소통하게 됐고, 쇼핑을 하거나 외식을 할 때도 자연스럽게 태국어를 쓸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내 기분과 마음을 조금씩 전달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흑백이었던 태국에서의 삶이 조금씩 알록달록해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태국어 습득에 열을 올리고 있던 2020년 1월, 코로나가 창궐했고 태국 정부도 학교와 학원 시설을 전면 폐쇄 조치했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한동안 무척 시무룩했는데, 그 와중에 기쁜 소식은 내가 1년 반 만에 초급반에서 고급반까지 모든 과정을 마쳤다는 점이었다. 이후에도 태국인 선생님과 1:1 과외를 받으며 태국어 실력을 갈고 닦았다. 오로지 목표는 디자이너로서 좋은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쪼그라든 자신감에 한 줄기 빛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태국어에 자신감이 조금 붙기는 했지만, 구직활동까지 태국어로 하기는 아직 한참 모자랐다.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나는 마음이 더 쪼그라들 것도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방콕의 물가는 왜 이렇게 비싼지! 태국 물가가 저렴하다는 건 옛말이고 방콕의 경우 한국 물가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물론 방콕 외 지역은 여전히 한국보다 저렴하다.) 10년 전에 여행 왔을 때는 돈을 펑펑 쓴 기억이 가득한데 말이다. 그간 태국도 많은 경제 성장을 이뤘고, 그에 따라 생활 물가도 자연스레 올라간 것이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요리를 시작했다. 영 관심 없는 분야였지만 집에서 직접 해먹다 보니 생각보다 나를 먹이려고 내가 노동하는 게 꽤 재밌었다. 의복 비용은 정말 확 줄었다. 태국은 1년 내내 여름이라 때가 되면 쇼핑 가야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좋은 일이라곤 할 수 없지만 팬데믹 상황 덕분에(?) 외출도 여행도 못 하게 되어 문화생활비도 쓸 일이 없었다.

물론 남편이 주는 생활비로 편하게 살 수도 있었겠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부모님께 손 벌린 적이 없었고, 오롯이 내가 번 돈으로 삶을 영위하는 게 얼마나 보람 있고 소중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누군가에게 기대는 게 생활비를 아껴 쓰는 것보다 더 힘들고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태국 체류에 있어 필수적인 비용은 남편이 버는 돈으로 충당하되,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비용은 내가 직접 해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정규직은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태국에서 만난 지인들을 통해 디자인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로 오픈하는 태국식 디저트 카페의 로고 디자인, 향수 브랜드의 패키지 디자인, 태국 정부 기관의 브랜드 리뉴얼 등 다양한 영역의 프로젝트를 만나게 됐다. 그중 가장 뿌듯한 점은 그간 꾸준히 공부한 태국어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태국인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내 디자인을 영어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세심하게 오차 없이 파악하는 과정에서 태국어 소통이 너무나 유용했다. 게다가 실제로 일하는 상황에서 태국어를 쓰다 보니 학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실전 태국어를 익히게 됐다. 소통에 정성 들인 것이 통했는지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클라이언트가 또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해줘서 끊임 없이 디자인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일이 많아질수록 힘은 들어도 태국에서도 브랜드 디자인 일을 하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디자인 비용은 프로젝트 규모에 따라 달랐지만 건당 최소 50만 원부터 최대 200만 원 사이였다. 한국에서 받던 월급에 비하면 한없이 적은 액수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했다고 기억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에 합당한 금액을 받는 과정이 마냥 감사했다. 무엇보다 만년 겉도는 외국인일 줄 알았는데 태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이제 단 하나의 과제, 불안정한 프리랜서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싶은 내 속의 갈증 해소만이 남아 있었다.

태국에서의 첫 취업, 그리고 글로벌 기업으로의 이직 제안

2년 정도가 흐르자 일상생활에서 태국어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동시에 구직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코로나 여파로 일자리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종종 구직 플랫폼에 올라오는 브랜드 디자이너 혹은 그래픽 디자이너 구인 공고를 발견할 때마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대부분 아무 소식이 없었고, 가끔 면접 보자는 연락이 오면 깜짝 놀라곤 했다. 온라인 면접에 충실히 임했지만 함께 일하자고 말해주는 곳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구직만을 목표로 한 지 또 4개월이 흘렀다. 태국에서 취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하고 노력한 기간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다 몇 번 주변의 태국 친구들을 만나 취업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태국은 혈연, 지연, 학연이 한국보다도 더 중요하고 끈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회사에 입사해보면 누구의 친구, 또 그 친구의 선후배 등 서로 아는 사이가 많다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쭉 이어지는 특유의 문화라 태국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진다고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과연 이런 문화에 잘 스며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는 태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구직 플랫폼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잡타이(Job Thai), 잡스디비(Jobsdb), 한국 교민 사이트인 한아시아(Hanasia), 일본계 헤드헌터 업체인 아데코 타일랜드(Adecco Thailand)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별 소득이 없었고 친구들의 추천으로  링크드인(LinkedIn) 공략을 시작했다. 관심 있거나 가고 싶은 회사의 HR 담당자를 찾아 직접 연락을 취해 보는 거다. 메시지에 회신이 오면 담당자 이메일로 필요한 서류를 보내는 이 방법이 좋은 전략이었는지 인터뷰까지 이어지는 횟수가 잦아졌다. 태국의 유명 패션회사, 브랜드 에이전시, 광고기획사 등과 인연이 닿았고 마침내 마음에 두고 있던 회사로부터 최종 합격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태국에서는 외국인도 일자리 구하기가 수월하다"는 말은 대체 누가 했을까 싶을 만큼 힘든 여정이었고, 출근하는 날까지 설레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드디어 입사한 회사는 바로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의 태국 지사였다. 그중에서도 웹툰 부서로 배정받아 소셜미디어용 그래픽을 만들거나 한국 본사에서 한국어로 넘어온 이미지를 태국어 버전으로 바꾸는 등의 일을 했다. 업무는 손에 익은 일이라 어렵지 않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국어로 일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업계에서만 쓰는 태국어 폰트 디자인을 모두 다시 습득해야 했고, 태국어로 회의라도 하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끝나고 나면 그날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곤 했다.

그럼에도 따뜻하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동료들 덕분에 태국 회사 생활에 무사히 적응할 때쯤, 우연한 기회로 이직 제안을 받았다. 독일의 음식 배달 플랫폼 ‘딜리버리 히어로(Delivery Hero)’의 자회사인  ‘푸드판다(Foodpanda)’에서 오퍼가 들어온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배달의민족'도 딜리버리 히어로의 자회사이다. 평소에 관심을 두고 있는 회사였기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아보니 카카오 웹툰에서의 업무와 비슷했다. 하지만 푸드판다에서는 더 다양한 문화권의 동료들과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일하는 동안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나로서는 매력적인 기회였다.

그렇게 태국에서의 두 번째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전과 가장 달랐던 것은 외국계 기업답게 관대하게 주어지는 자유와 복지,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감과 성과주의였다. 내가 맡은 일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곧장 해고될 거라는 공포를 느끼며 수습 기간 4개월 내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이번에도 나를 살린 건 동료들이었다. 홍콩, 대만,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 세계 각국에서 모인 팀원들 덕분에 강도 센 업무를 차근차근 해치우며 무사히 수습 기간을 넘길 수 있었다.

회사에는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과 영미권 팀원도 많았는데 서로 문화와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서로를 존중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업무 강도는 다녀본 어떤 회사보다 높았고, 원했던 직급보다 낮은 직급으로 들어와 연봉도 높지 않았지만 말로만 듣던 수평적 문화는 내게 무척 잘 맞았다. 회사 생활에 고민이 많을 때면 임원들과도 허심탄회하게 대화했고, 팀원들은 열린 마음으로 나서서 도와준 덕분에 디자이너로서도, 외국인 노동자로서도 즐겁고 감사한 날들을 보냈다.

문방구 좋아하세요?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의 한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안을 받게 되었다. 전쟁 같았던 태국 취업 후기… 같은 것은 아니고 바로 나의 최애 취미에 관한 것이었다. 바로 ‘태국 문방구'에 관한 기록이다. 나는 벌써 2년째 인스타그램에 태국 문방구에 관한 이야기를 올리고 있었다.

목표가 있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새롭게 정착하고 살아가는 태국이란 나라를 문구덕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흥미로운 요소가 정말 많았다. 특히 태국의 오래된 문방구, 태국인들이 좋아하는 문구 브랜드, 태국의 문구 역사 등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넘쳤는데 잘 알려진 정보들은 아니었다.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아까워서 ‘태국이나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공유하자’는 게 처음 생각이었다. 나만의 태국 일기장 역할도 겸해 태국 문방구 이야기를 꾸준히 기록해 나갔다.

태국 문방구에 대한 기록이 쌓이자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고, 세계 각국에 사는 문구덕후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국에서의 일상이 어쩐지 더 특별해졌다. 처음 이곳에 살겠다고 태국에 왔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나라에 온 것인데도 지구 어딘가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허전한 마음이 들 때마다 정처 없이 방콕 거리를 걸었고,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문방구 앞을 지나다가 이내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이곳에서 문방구를 찾아다닌다면, 내가 즐거우면서도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취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태국 곳곳에 있는 문방구를 알아보고 문구용품 탐방길에 나섰다. 그때만 해도 취업을 하지 못했던 때라,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할 일을 하는 느낌을 받으며 태국 생활이 자연스러워졌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태국에서 문방구에 들를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든다.

태국 문방구 이야기 사이사이 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올렸고, 그 기록을 재밌게 봐준 한국의 출판사에서 ‘태국 문방구'에 관한 책을 내보자는 제안을 해준 것이다. 그것도 두 군데나 연락을 주어 몹시 신기했다. 그간 열심히 모아온 태국 문방구가 한 권의 책이 된다니 꿈 같은 일이었다. 고심 끝에 출판사를 정하고, 계약을 하고, 본격적인 원고 집필을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모아온 자료가 가득했어도 하루 종일 근무하고 퇴근 후 책을 위한 원고를 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처음이라 서툴었지만 담당 편집자님과 온라인 미팅을 열심히 해가며 글을 쓰고 다듬었다. 책을 쓰는 동안도 태국 문방구 계정의 팔로워 수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태국 문방구로 돈을 벌게 되었다

2022년 여름, 드디어 한국에서 ⟪태국 문방구⟫가 출간되었다. 어릴 때부터 간직하던 꿈을 이룬 기분이기도 했고, 또 태국 전국을 여행하며 쓴 이야기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게 돼서 가슴이 벅찼다. 책 출간을 기념하고 홍보하기 위해 서울 을지로에서 북토크와 팝업 스토어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민을 떠난 뒤 첫 한국 방문이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그리운 한국에 좋은 소식을 안고 날아올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가족, 친구들과도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진작 올걸 그랬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소중한 나의 책 ⟪태국 문방구⟫는 금의환향 말고도 많은 기회를 가져다줬다. 첫 번째는 태국 문구용품 구매 대행. 제주에 혼자 여행 갔을 때 들렀다가 친해진 서점 주인부터 나처럼 문구덕후인 친구들까지 “책에 나온 그 연필 좀 사다줘"라는 요청을 해온 것이다. 종류가 많을 때는 수고비까지 함께 부쳐줘 작은 용돈벌이이기도 했다.

사실 태국 연필 구매 대행은 나에게 너무나 즐거운 일이라 수고비를 안 받고도 하고 싶은 일이었다. 평소 자주 가서 내 것만 몇 가지 골라보던 난미(Nanmee) 문방구에서 종류별로 연필을 잔뜩 고를 때는 어찌나 행복하던지. 다 내가 갖는 것도 아닌데 바구니 가득 문구용품을 채워 계산대로 가는 길이 무척 신났다. 난미는 아직도 모든 장부를 수기로 적고 있어서 계산하는 데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 두어 번 반복하자 난미의 VIP 손님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영광도 얻게 되었다.

두 번째는 ‘방콕 문방구 투어'를 기획하게 된 일이다. 한국의 여행 플랫폼에서 해준 제안인데, 책을 쓰면서도 늘 꿈꾸던 것이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코로나 상황이 끝나고, 한국인의 태국 여행이 늘고 있는 반가운 타이밍에 방콕 문방구 여행을 함께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기회는 무궁무진했다. 해외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로서 멘토링과 강연 문의가 자주 들어왔고, 디자인 외주 프로젝트, 방콕 리포터 활동과 시장 조사 등 다양한 일을 요청받았다. 특히 강연을 준비하는 건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아직 경험이 없어 막막한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면 마냥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원화 소득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됐고, 한국에서 벌던 월급과 비슷한 수익을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수익은 아무래도 인세다. 책을 출간한 지 6개월이 지난 뒤에 두 번째 정산을 받고는 새삼스럽게 책을 쓰면서 고생했던 시간이 마구 떠올랐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에너지를 다 썼는데 집으로 돌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야근이라도 한 날엔 멍하게 의자에 앉아 모니터만 뚫어지게 바라본 적도 있었다. 마감일을 어기기 싫어서 어떻게든 글을 마무리하고 새벽에 메일을 보내고서야 잠에 드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과연 이 글이 책으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한국 통장에 찍힌 인세는 내가 번 돈 중 가장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가장 의미 있게 쓰고 싶은 돈이었다. 이후로도 들어온 인세는 한 번도 출금하지 않고 모두 그대로 넣어두었다. 감사하게도 두 번째 책을 계약하며 받은 선인세도 함께다. 이 돈만큼은 훗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쓰고 싶다. 어쩌면 나의 또 다른 꿈인 문방구를 차리는 데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태국에서의 삶도 진화했다

⟪태국 문방구⟫는 예상 외로 태국에서도 관심을 받았다. 태국의 20~30대 친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미디어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태국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문구 덕후들, 디자이너로 일하는 사람들 등 네트워크가 생겼고, 그러면서 디자인 외주, 통역과 번역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동시통역은 정말 긴 시간 준비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태국에 온 뒤로 지금까지 태국어를 포기하지 않고 공부했기에 할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더 잘하고 싶어서 통번역가 선배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고, 태국어를 이전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됐다. 회사 업무 시작 전에는 태국어 강의를 듣고, 시간 날 때마다 단어를 외우는 일상을 보냈다.

2023년 2월, 태국에서 가장 큰 디자인 행사인 ‘방콕 디자인 위크(BKKDW) 2023’이 방콕 전역에서 이뤄졌다. 디자인 리포터로서 취재처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한 콘텐츠 회사로부터 현지 코디네이터 겸 통번역 일을 맡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태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태국어로 디자인 위크에서 통역을 하고 있다니. 물론 유명한 디자이너를 인터뷰할 때는 떨려서 아는 단어마저도 바로 생각이 안 날 지경이었지만, 태국어는 어느덧 나의 생존 무기가 되어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2023년 여름, 이 글을 마지막으로 다듬는 요즘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태국 회사에서 보내는 낮에는 연차가 쌓일수록 더 업무에 몰입하며 바트(฿)를 벌고, ⟪태국 문방구⟫ 출간이 가져다준 수많은 연결고리로는 원화(₩)를 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여러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게 힘들었는데, 정신없이 해내다 보니 어느새 내가 이곳에 온전히 뿌리 내렸다는 안정감이 찾아왔다.

어떤 나라에 이민을 가면 그 사람은 영유아기 시절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와 닿지 않았는데 지난 태국 생활을 돌이켜보니 이제는 천 번 만 번 이해가 간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0년 차부터 n잡러로 거듭난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4년 조금 넘는 시간은 다시 어른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시기였다.

앞으로 태국에서 몇 년을 더 살게 될까? 태국에 오게 된 것도 예상 못한 일이었던 것처럼 앞으로 또 다른 나라에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달러($)나 유로(€)를 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인생은 어렴풋이 짐작할 뿐 선명한 그림을 그려볼 수 없다.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Edit 주소은 Graphic 조수희

해당 콘텐츠는 2023.09.06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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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경 에디터 이미지
이현경

태국 방콕에 살며 브랜드 디자인 디렉터 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문화를 연구하면서 다양한 기회를 만났고, ⟪태국 문방구⟫ 집필 후 꾸준히 작가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크게 돈 쓰는 일이 잘 없지만 나의 성장을 위한 돈(투자)은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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