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통장

아몬드를 다이아몬드로 바꾸는 방법

by 조미라

“엄마, 나 다이아몬드 먹기 싫어!”

오늘도 아침 식사 자리에서 아몬드가 가득 든 시리얼을 보고 칭얼거리는 5살 둘째 아이. 막 초등학생이 된 큰 아이는 동생에게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다이아몬드가 아니고, 아.몬.드.라니까”

언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둘째 아이는 자꾸 아몬드를 다이아몬드라고 불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몇 번 웃어줬더니 아이는 쉽사리 아몬드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이아몬드를 빼달라는 아이의 말에 순간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매일 먹는 시리얼 속 흔한 아몬드가 모두 다이아몬드라면 어떨까?’

일상의 모든 것이 단숨에 특급으로 바뀔 것이다. ‘아침 식사로 오성급 호텔 셰프가 준비한 브런치 정도는 즐겨줘야지. 그리고 은행에 가서 마음의 짐이었던 대출부터 갚아버리고, 부동산에 들러 나의 오랜 로망, 마당 넓은 저택을 사야지. 부동산이 하락장이라도 상관없어. 새로운 시리얼을 열면 또 다른 다이아몬드가 있을 테니까. 지난 생일에 큰맘 먹고 예약했던 스시 오마카세 식당, 다음번 생일엔 친구들까지 초대할 수 있겠다.’ 상상이 뻗어나갈수록 입가의 미소도 점점 짙어졌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제안

정작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다이아몬드는 고사하고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가져본 적이 없다. 시골 개척교회 목사의 딸로 학창 시절을 보내며, 늘 평범한 직장인 부모를 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가난한 목회자의 자녀로 사는 것은 결핍과의 싸움이었다. 낡을 대로 낡아 녹이 슨 봉고차를 타고 학교에 갈 때면, 교문 멀찍이서 친구들의 눈을 피해 후다닥 내리기 바빴다. 하굣길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는 친구들이 보이면 바쁜 일이 있는 척 지나쳐 집으로 내달렸다. 두 살 위 언니보다 체구가 커져 더 이상 옷을 물려 입지 않아 기뻤지만, 어차피 새 옷을 갖는 기회는 일 년에 한두 번 손에 꼽을 일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과외비를 벌면서 스스로 옷을 살 수 있게 되었어도 매번 가격표를 보며 주저했다. 근검절약으로 포장된 가난은 나를 인색하고 팍팍한 삶으로 몰아갔다.

이런 나에게 신혼 초, 남편이 몹시 당황스러운 제안을 했다. 결혼한 지 갓 3개월, 한 집으로 출퇴근하는 부부라는 게 아직 적응되지 않았을 때였다.

“앞으로 우리 부부가 버는 돈의 10%를 이웃들한테 나눠주면 어때?”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누구에게 뭘 주자고? 지금 장난하는 건가? 하지만 남편은 사뭇 진지했다. 오래 전부터 공들여 준비한 계획을 공개하는 듯 이미 생각해둔 진행 방법까지 제시했다.

‘나눔 통장’을 따로 만들어 수입의 10%를 구분해 적립하는 것이다. 월급처럼 일정한 수입은 10%를 미리 계산해 자동이체를 걸어 둔다. 늘 같은 비율을 적용하기 때문에 수입이 많아지면 나누는 금액도 커져야 한다. 주변 이웃에게 힘을 주고 싶을 때나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기부 단체를 찾으면 언제든 나눔 통장을 활짝 연다.

비현실적이었다. 식탁을 놓기도 애매한 오래된 빌라의 작은 전셋집, 그나마 대출을 꽤 받아 시작한 신혼이었다. 빨리 더 나은 곳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맞벌이 부부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 충실히 아끼고 모으면 금방 해낼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내가 겪었던 결핍을 물려주기 싫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서서히 가난으로 빠지는 길일지도 모른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돕겠다고 철없는 소리를 하는 거지? 혼란스러운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난 앞으로 우리가 얼마를 벌든 10%는 나누는 부부로 살면 좋겠어. 하지만 부담은 갖지 마. 자기가 동의 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하지 말자. 나는 그저 앞으로 우리 부부가 공유할 삶의 방식을 하나 제안하는 것뿐이야.”

과연 나는 기꺼이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남편은 허튼 데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돈 드는 취미도 없고, 옷이나 신발 욕심도 없다.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전자기기나 자동차에도 별 관심이 없다. 취미나 정치 성향만큼이나 부부 간에 닮을수록 좋은 것이 소비 성향이라는데, 다행히 그 점에서 남편과 나는 비슷했다.

그런데 살면서 돈으로 싸울 일은 없겠다고 안일하게 생각하던 내게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이제껏 살아온 방식을 대대적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던져놓고 정작 남편은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나를 만나기 전, 서른 해 남짓 살아온 그의 인생에 도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 중 나누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멋져 보였을까? 남편은 그저 앞으로 인생을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며 기한 없이 충분히 생각해 보라고 했다.

피하고 싶은 제안의 결정권이 이제 내 손 안에 있다. 삶의 중요한 갈림길 앞에서 깊은 고뇌에 빠졌다. 고난도 문제에 성급하게 어떤 답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제안이 시간에 묻히길 바라며 외면한 채 몇 달이 흘렀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어떻게 기나긴 결핍의 시기를 지나서 여기까지 왔나 돌아보게 되었다. 지난 날을 되짚어보니, 도저히 나아질 것 같지 않던 그 시절 우리 가족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셨던 분들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감자탕을 한 냄비 끓여서 종종 가져다주시던 이웃집 아줌마, 공부하는 데 보태라며 조금씩 장학금을 보내 주셨던 얼굴도 모르는 어른들, 어렵게 떠난 교환 학생 시절 푸짐한 훠궈 한 그릇으로 격려해 준 한인 자영업자 부부.

춥기만 하던 그 시절을 데워준 따뜻한 마음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곳간에서 인심 난다던데 형편이 괜찮은 분들이었을까? 한 분씩 얼굴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분들의 주머니 사정을 다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넉넉한 부자는 아무도 없었다. ‘부유해야 나눌 수 있다’는 편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저 세상엔 ‘쥐고 사는 사람‘과 ‘나누며 사는 사람‘이 있고, 나누며 사는 사람 중에도 부자와 빈자가 있을 뿐.

정말 나도 그런 온기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 나는 쥐고 살 것인가, 나누며 살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문제가 조금은 단순하게 느껴졌고, 나는 앞으로 ‘나누며 사는 사람’이 되어 보기로 했다. 내게 다이아몬드는 없지만 시리얼 속 아몬드는 있으니까.

나눔도 경력이 쌓이면 과감해지나봐요

남편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나눔 통장을 만들었다. 한두 곳 소액 정기후원은 큰 결심 없이도 해왔지만, 수입의 10%라는 돈은 (자린고비 성향이 몸에 밴 내게) 살 떨리는 금액이었다. 그만큼 10%는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언제든 손을 펴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담은 숫자였다. 그렇게 작정한 돈이 나눔 통장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눔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우리 부부의 첫 고민은 ‘어디에 어떻게 나눠야 하는가’였다. 나눔도 경력이 필요한지, 나눔 초보였던 우리는 다달이 쌓여가는 나눔 통장의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한참을 헤매던 중, 갓 백일 된 큰아이가 우리의 첫 나눔이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었다. 밤잠에 든 아기를 토닥이며 무음으로 TV를 보는데, 마침 미혼모를 돕는 한 비영리 단체를 취재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모텔을 전전하며 아기에게 마지막 남은 분유를 탈탈 털어 먹이는 앳된 모습의 엄마가 보였다. 그녀와 나 모두 아이를 품고 있는 같은 엄마지만, 사랑하는 마음만큼 아이에게 해주지 못해 눈물짓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남편에게 우리의 첫 나눔을 이 단체에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우리는 꼼꼼히 단체의 정보를 찾아보았고, 대표의 진정성 있는 행보에 감동하며 후원을 결정했다.

먼저 엄마와 아기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물품과 현금을 보내고 나니,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대표님이 마음에 걸렸다. 더 오래 이 일을 이어가실 수 있도록 적절히 쉼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휴가비를 드리고 싶었다. 우리의 진심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며 봉투에 편지와 현금을 담아 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장으로 직접 찾아갔다. 뜻밖의 봉투를 받고 연신 감사를 전하는 그분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내내 쉼 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날 우리 부부는 나누며 사는 생소한 삶의 출발선에서 첫 걸음을 뗐다.

이후 우리의 나눔 통장은 조금씩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의미있는 일을 하는 기관을 찾으면 정기 후원을 시작했다. 명절이나 연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옆집에 사는 이웃들, 동네 세탁소, 빵집 등에 직접 손으로 쓴 카드와 간식 꾸러미를 사들고 찾아가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눴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지인을 응원하며 대학원 입학금을 지원하거나, 해외에 계신 부모님과 떨어져 한국에서 학비를 벌며 외롭게 공부하는 후배에게 장학금을 보내기도 했다. 길 가다 마주친 노숙인에게 근처 편의점에서 우유와 빵, 단백질 바를 사드리기도 하고, 지방에서 올라와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숙박비를 도와달라는 어느 청년을 위해 필요한 경비를 봉투에 담아 전했다.

마치 나눔 통장은 소중한 사람들을 우리에게로 당기는 자석 같았다. 매월 10%가 쌓이니 잠시 방심하면 고여 버리기 때문에,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살펴보는 새로운 습관도 생겼다.

나눔 통장 덕분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었던 선물들.

가까운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그랬나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잠하던 초인종이 울렸다. 아침부터 신이 난 두 아들의 발소리에 참다 못한 아랫집 아주머니가 올라온 것이다. 화가 나셨을 텐데도 정중하게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죄송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잘도 나누면서,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에겐 나눔은커녕 폐만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아이들에게 발소리 내지 않게 조심히 걸으라고 당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아이들이 직접 알록달록 스티커로 꾸민 손 편지와 함께 나눔 통장을 열어 작은 선물을 전해드렸다. 아이들 소리가 크면 언제든 말씀해달라고 했지만, 몇 주간 별 연락이 없기에 더 불편하게 해드린 걸까 조바심이 났다.

얼마 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아차, 아이들이 또 시끄러웠구나.’ 걱정하며 문을 열었다. 역시 아랫집이었다. 환한 미소를 띤 아주머니는 문구세트를 건네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주말에 근교 나갔다가 애들이 생각나 샀어요. 아이들이 조심하는지 많이 조용해졌네요. 애들 키우느라 힘들 텐데 고생이 많아요. 아, 저녁 시간에는 제가 거의 집에 없으니까 마음껏 뛰어도 괜찮아요.”

순간 말문이 막힐 만큼 큰 감동이 몰려왔다. 마음을 담아 나누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이런 경험을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감동이었다.

나란 사람도 나눌 수 있다는 내면의 자부심

그렇게 우리 부부는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나누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 원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 어려움이 생기면 언제든 멈추자고 약속했지만, 감사하게도 나누는 금액은 조금씩 늘고 있다.

어쩌면 십분의 일이란 돈을 더 차곡차곡 모았다면 빠르게 집 평수를 더 넓히거나, 넉넉한 소비로 생활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눔은 나부터 변화시켰다. 꽉 움켜쥔 두 손을 살짝 펴고 나니, 새로운 기쁨이 찾아왔다. 나란 사람도 나눌 수 있다는 내면의 자부심은 결핍으로 인한 열등감을 조금씩 치료했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경험이 반복적으로 쌓이면서, 다른 이들의 시선에 흔들리던 내면 속에 단단한 자존감이 조금씩 자리 잡았다.

하루는 아이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를 듣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전쟁은 왜 일어나는 거냐고 물었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한순간 집과 학교를 잃는 전쟁은 아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서로 더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답하자, 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뗐다.

“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사랑하면 나눠 쓰겠죠? 나눠 쓰면 안 싸우겠죠? 안 싸우면 전쟁이 안 나고요. 그러면 무섭지 않잖아요!”

아이는 사랑이 곧 나눔이라고 자신만의 정의를 내렸다. 어쩌면 우리의 나눔이 아이에게 사랑할 힘을 더해준다는 생각에 눈물이 고였다. 이것이 아니면 사랑을 무엇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꼭 다이아몬드가 있어야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고 흔한 아몬드를 나누다 보면, 그것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다이아몬드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반짝이게 수놓는다.


Edit 금혜원 Graphic 조수희

해당 콘텐츠는 2023.9.6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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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라 에디터 이미지
조미라

일을 사랑하는 두 아들의 엄마. 광고 에이전시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브랜딩, 문화예술, 소셜프로젝트 분야의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내일의 가능성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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