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보는 그림이 그려진 문고리 카드

을지로 김과장의 비밀, 비즈니스 사주 봐주는 김도사

by 김도사

나는 을지로에 서식하는 흔한 금융인이다. 이렇게 소개하면 투자도 좀 하냐는 질문이 이어지곤 하지만 기가 막히게 루나 코인 같은 것만 골라 들어가는 재주로 주식에서도 코인에서도 상장폐지의 고배를 마셨다. 동료들은 “제발 지금 들어가는 종목을 알려달라”고 아우성이다. 실제로 몇 번 말했더니 그 종목은 피하거나 내가 들어가기 전에 먹고 나왔다며 커피값 벌게 해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듣기도 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감사하다는 동료가 유독 얄밉던 날, 그가 산 주식을 한 주 사버렸는데 다음 날 진짜로 폭락해 잠깐 통쾌하기도 했지만… 이게 웬 부질없는 짓인지.

이런 미생의 삶을 넘어 완생으로 가기 위해 소박하지만 유니크한 파이프라인을 구축 중이다. A금융지주 김 과장이라는 본캐로 사는 한편 부캐로도 열혈 활동 중인데, 그것은 바로 비즈니스 사주 전문 김도사다. 금융인이 사주를 봐준다고 하면 사람들 얼굴에 물음표가 스친다. 나도 가끔은 어쩌다 여기까지 왔더라 싶기에 오늘은 그 어쩌다를 생각해봤다.

쓰라린 악재 속에 꽃피운 부캐

때는 2018 무술년, 운명의 쇠망치를 맞기 전까지 나름 내로라하는 공공기관에서 창업보육센터를 담당했고, 독 품은 창업가들의 수많은 민원 처리와 멘탈 마사지가 나의 주 업무였다. 힘들긴 해도 절실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일이라 보람을 느끼며 성실히 임했건만 돌아온 건 가정 파괴, 건강 악화, 금전 고갈이라는 3대 악재였다.

‘세상을 너무 막 살았나' 아무리 돌이켜봐도 갑근세도 꼬박꼬박 잘 내고, 사소한 교통 법규 가끔 어기는 거 외에는 법도 잘 지키며 사는 자칭 모범시민이라고 판단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의 기운이 상식이나 논리와는 무관하게 나처럼 어리숙한 인간을 새로운 운명의 고속도로로 인도한 게 아닐까 싶다.

이럴 때 나타나는 현상들은 주변인들이 대거 물갈이되고, 평소 절대 들어오지 않던 운이 들어오는 것인데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즌을 교운기(交運期, 운이 교차되는 시기)라고 부른다. 나는 이런 교운의 시점에 정말 우연히 유튜브에서 사주에 관한 영상을 봤다. 눈과 귀에 착착 감기던 그 콘텐츠가 너무 재밌어서 좌뇌 우뇌 전두엽 후두엽 가릴 것 없이 꽂혀버렸고, 곧장 사주팔자를 파기 시작했다.

사주는 세상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년월일시'라는 기초적인 4가지 코드만으로 그 사람의 성향, 지향점, 장단점, 다른 사람과의 궁합 등을 통계에 기반해 추론한다. 어떤 때는 가족이나 십년지기 친구 이상으로 속마음 공유 게이트를 열어주어 급속도로 별 얘기를 다 하게 하는데 이것은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라포(Rapport, 공감대) 형성에도 큰 도움을 준다. 게다가 사회적인 나는 연(年), 월(月), 개인적이고 잠재적인 나는 일(日), 시(時)에서 파악하므로 복잡다단한 인간의 다양한 페르소나 해석도 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ROI(시간・노력 투자 대비 효익) 측면에서 너무나 효과적인 인간 분석 툴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사주를 공부하는 사람의 숙명을 따라 ‘내 사주 내가 보기'를 시작했다. 6년근 홍삼마냥 6년 이상 수천 가지 영상과 서적을 통해 배우고, 고수들을 찾아가 대담을 나누는 동안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어느새 내게는 사주를 봐달라는 고객들이 생겼다. 쌀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반나절이나 연애 상담을 해준 소개팅녀부터 여행사 대표님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진행하게 된 제주 여행객 대상 사주 프로그램까지 수많은 내담자를 만나며 적지 않은 임상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창업가 돌보미는 내 운명

거기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경영학적 지식과 스타트업, 중소기업, 대기업, 공공기관을 모두 다녀본 경력을 더하자 점차 나만의 사주 체계가 만들어졌다. 국내에서 활동 중인 역술가는 최소 60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나보다 명리 구력이 오래된 분들은 엄청 많겠지만 실제 비즈니스 분야에서 구르며 체득한 시의적이고 실질적인 컨설팅에 가까운 통변은 비즈니스 사주에 특화된 나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관에서 창업 3년 미만의 스타트업들을 지원하는 창업보육센터를 운영했던 경험이 비즈니스 사주에서도 상담 노하우로 직결된 것은 그야말로 운명 그 자체였다.

실제로 내 사주에는 친엄마를 뜻하는 정인격(正印格)이 있는데, 창업'보육'센터에서 측은지심으로 스타트업 대표들을 돌보던 것도 격에 맞게 그 소임을 다한 것이지만, 비즈니스 사주를 봐주는 지금도 너무나 어려운 창업길을 가는 사람들의 성장을 응원하며 상담에 임하고 있다. (직장인들 사주보다 스타트업 대표 사주가 대개 더 흥미로운 구조가 많아서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

짧지만 밀도 있는 수련의 시간을 보내며 지금까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직원들, 각 기업의 대표들, 그들의 가족, 병원과 로펌과 공공기관의 전문직 등 2,000명 이상을 만났다. 고객 중에는 대형 어학원의 대표, 글로벌 IT기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등 유명 인사들도 있지만 현장에서 묵묵히 감정 노동하는 고객센터 직원들을 비롯해 작가, 심리상담사 등 감정 소비가 염려되는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이 있다.

운수 대통도 윈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자연스레 부수입과 유명세가 생겼고 어느 순간 내담자들이 파도타기처럼 소개를 이어가 활동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엄연히 나의 또 다른 소득 파이프라인으로 자리한 명리 상담 서비스의 매력 포인트는 재고 걱정이 필요없다는 것과 고객 리텐션(유지, 재구매율)이 높다는 점이다. 재밌는 건 리텐션 높은 고객을 뜻하는 ‘단골'의 어원도 여기서 비롯됐다는 거다. 원래 무당이 모시는 단군신을 당골이라고 했고, 그 무당집을 자주 들락거리는 손님도 당골이라 불렀는데, 현재는 그 말이 살짝 변형되어 충성고객을 단골이라고 칭한다.

나의 단골 중에도 재밌는 사연이 정말 많다. 재판 담당 판사의 성향을 알려달라는 변호사, 동업자가 사기꾼인지 아닌지 궁금한 창업가, 최종 면접에 2명이 올라왔는데 한 명만 찍어달라는 인사 담당자 등 수많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도움을 청하는 분들이 있고, 그때마다 나름의 판단 근거를 제안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했던 만남은 역시 무당에게서 받은 사주 의뢰인데… 아니, 당신이 모시는 신에게 물으면 되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 돌아온 답은 “러시아인 남자친구와 이대로 만나도 될지 사주 궁합이 궁금하다”는 거였다. 남자친구의 사주를 보니 무당도 감당할 구성이라 계속 진행하시라고 통변해드렸더니 조용히 복채를 주고 총총 사라지셨다. 무당에게 받은 복채는 더 큰돈 같기도 했고, 이렇게 서로 케어하며 사는 세상이구나 싶은 밤이었다.

이제 가끔은 A금융지주 김 과장보다 부캐 김도사가 더 나답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운세 스타트업에서 입점 제안을 받기도 했다. 금융권 종사자의 숙제인 겸업 금지 조항 탓에 정식으로 입봉하기는 힘들지만 플랫폼을 이용한 영업 채널의 다양화는 부업인으로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사항인 듯하다.

사주 봐주는 AI 챗봇 도사를 개발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보고 있다. 그리하여 직접 뛰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이 힐링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나는 조기 은퇴를 위한 튼실한 파이프라인을 구축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모두들 자신만의 특기를 잘 살려 운수 대통하시길!


Edit 주소은 Graphic 조수희

해당 콘텐츠는 2023.8.23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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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사

해가 뜨면 돈을 다루는 금융사에서 김 과장으로, 해가 지면 돈을 원하는 사람들의 사주를 봐주는 김도사로 활동한다. 재물, 사업, 사람이 얽힌 3차 함수를 운명이라는 코드로 풀며 비즈니스 명리 분야의 워런 버핏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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