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정리

7일 밤의 그림자

by 크크곰

“어이, 이보시오! 다 왔소! 어서 내리시오!”

‘깜박 잠이 들었나... 분명 버스 정류장까진 기억이 나는데... 도대체 언제 버스에 탔지? 하긴 기절할 만큼 졸수 있지.’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을 한지 내리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내내 밤을 꼬박 샌 건 아니다. 잠깐 의자에 기대 자다가 다시 일어나 작업하고, 많이 피곤할 땐 근처 24시간 목욕탕을 찾았다.  손님 없는 새벽의 목욕탕. 그 평상 위에서 겨우 한 두 시간 눈을 붙이고 다시 일어나 씻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나는 프리랜서 작가다. 오전에는 섭외와 글 작업을 하고 모두가 퇴근한 밤에는 외주 업체의 글 작업을 맡는다. 이번 주는 발표자료까지 만들어야 해서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프리랜서라는 것이 그렇다. 일이 있을 때는 숨 쉬기 힘들 만큼 몰려서 들어오고, 일이 없을 때는 손가락 빨아야 할 만큼 허리를 졸라야 한다. 그래서 더 억척스럽게 일을 받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려고.

1일 밤 ‘기로’

“저기... 여기가 어디예요? 벌써 안심역이에요?” “안심? 안심이 어딘진 모르겠소만 도착지인 것만은 확실하오. 저기 가는 사람들 보이오? 저들 따라 쭉 가면 되오.”

시원하게 쭉 뻗은 길 사이사이로 포차 같은 가게가 보인다. 도로처럼 보이지만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걸 보니 걸어도 되는 모양이다. 희한하게도 포차 주인인 자가 길 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른다.

‘호객 행위 참 희한하다. 그나저나 여기에 이런 먹자골목이 있었네... 잠깐만, 어라..?’

포차에 내 이름 석 자가 걸려 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내 이름이 맞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길, 이상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수상한 포차. 묘하게 거슬렸고, 목덜미의 솜털이 삐쭉 솟아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으니 일단 들어가 보자.

“여기 뭐하는 곳이에요? 왜 내 이름이...” “거 앉아라. 제일 좋아하는 음식, 이거 맞제? 얼른 무라.”

푸근한 인상의 어르신이 꼭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인데도. 포차 안에는 야근할 때마다 시켜먹던 찜닭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다. 매콤한 냄새에 윤기 흐르는 당면, 새콤한 무맛나까지. 입 안에 침이 고이며 절로 배가 고파졌다.

“그래, 돈은 많이 벌었나? 니 앞에 모아둔 거는 얼마나 있노?” “...?” “니 얼굴 함 봐봐라. 허옇게 질려가 잠도 못 잔 얼굴인데 도대체 얼마나 일해서 벌었나 물어보는 거지. 딴 뜻 없다.”

무슨 저런 질문을 하나 싶었지만, 음식에 홀렸는지 생각나는대로 주절주절 말했다.

“뭐… 많이 모으진 않았지만 더 모아야죠. 그래야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남들처럼 살 수 있으니까.” “누가 그래 하라 카드노? 잠도 안 자고 밥도 대충 묵고 돈만 모으라 누가 시키드노?” “그렇게 안하면 어떻게 사는데요?” “이게 지금 살아있는 기가?”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났다. 여기가 어딘지. 이런 시답잖은 소리를 하고 있는 이유가 뭔지. 바로 저승문 앞이구나. 저 사람은 날 데려갈 사람인가? 2017년 5월 26일, 서른 한 살의 나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쓰러졌다. 구급차를 타고 도착한 응급실에서 정신이 들었다. 저승길에 막 오르던 참에 깨어난 거다.

응급실에서 내린 병명은 급성 뇌졸중. 정확히 말하면 뇌경색이었다.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처음엔 멀미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릿 속으로 생각하는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맴돌다가, 엉뚱하고 이상한 소리만 나왔다. 술 취한 사람처럼 웅얼웅얼, 크게 외치는 내 말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도와달라 말하고 싶지만 도저히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살려주세요. 몸이 이상해요. 도와주세요.’

급격히 몰려오는 공포감. 이번에는 몸을 일으켜봤다.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왼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졌다. 작은 휴대폰 하나 손에 쥘 수 없는 이 상황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의료진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고 어떤 상황인지 판단할 수 있다는 거. 그거 하나로 버텼다.

‘세상에, 내가 뇌경색이라니! 살이 찐 것도 아니고 혈압이 높은 것도 아니고 당뇨나 고지혈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직 이렇게 젊은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2일 밤 ‘주마등’

급하게 치료가 시작됐다. 집중 치료실로 옮겨진 나는 매시간 혈압과 산소포화도, 그리고 맥박을 체크했다. 병실에 상주하는 간호사가 바로 의사에게 보고했다. 절대 안정 필수. 침대 밑으로 내려오는 건 물론 화장실도 금지였다. 그렇게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바깥에서의 시간은 이제 멈춰버렸다.

‘생과 사의 경계가 이렇게 가까운 거였구나.’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하룻밤 사이에도 몇 번은 넘나들 수 있을 만큼. 죽음의 코 앞에서 겨우 한 발짝 물러선 나는 가만히 누워 생각했다. 병실에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미션처럼 주어지는 다양한 검사들을 잘 해내고, 그리고… 시간이 또 남는다면 생각하는 거? 꼼짝없이 병동 스케줄에 묶여 있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딱 하나 있었다. ‘생각하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루종일 생각을 이어갔다. 끝없는 생각의 흐름은 자연스레 ‘나’에게로 이어졌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그러고 보니 난 한 번도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땐 공부, 공부, 공부. 조금 나이 들었을 땐 학점, 학점, 학점. 그것보다 또 조금 더 늙었을 땐 취업, 취업, 취업. 그리고 지금까진 일, 일, 일이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뭘 하고 싶은 사람이었지? 인생의 3분의 1을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정작 나는 나를 잘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하게 된 지금에서야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만약 내가 잘못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하나씩 정리해보기로 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땐 한번도 생각하지 않던 것들을 이제야 하게 된 거다.

살아왔던 지난 날을 정리하기에 나는 너무 젊었다. 앞만 보고 달리기도 아까운 시간, 뒤돌아볼 여력이 어디 있냐며 추억조차 들여다보지 않던 나였다. 무기력하게 누운 지금에서야 제일 간절한 일이 되어 있었다.  담담한 듯 굴었지만 눈가에 동그란 이슬 하나가 주르륵 떨어졌다. 눈물을 대충 쓱 닦고서 몸을 모로 웅크렸다. 허허로운 속웃음을 한 번 짓고 그 생각이란 걸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었더니 지난 날이 필름처럼 주르륵 돌아갔다. 엄마 손 잡고 따라다녔던 모습, 여기저기 놀러갔던 순간, 미뤄뒀던 학습지 때문에 혼나면서 울었던 날…수많은 시간들이 떠올랐다. 늦게까지 교무실에서 컴퓨터 타자를 치던 아이는 또래 친구들과 교지를 만들고 있었다. 사진 파일을 옮기고 기사를 쓰고 선생님께 가져가는 아이의 표정은 신이 나 있었다. ‘예쁘다. 나 참 예쁘게 잘 크고 있었네’ 교복이 바뀌었다. 고등학생이 된 소녀는 울면서 엄마 앞에서 대들고 있었다. 수능을 치던 날, 대학교 입학식 날, 동아리 동문회 날, 남자친구와의 첫 데이트 날. 소녀의 시간은 희로애락을 담고서 스쳐 지나갔다.

‘30여 년짜리 주마등이구나.’

슬프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행복했다. 슬펐던 어느 순간도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이런 기억이라면 죽음이 찾아와도 살아온 시간이 억울하진 않을 것 같았다.

3일 밤 ‘전투’

“자, 여기 어디예요?” “이거 한 번 따라 읽어 볼까요?” “왼손, 왼다리 들어봐요”

아침 인사처럼 나누는 테스트를 마치면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된다. 여전히 정신 없는 하루지만 그 사이에 조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찾아온 것이다.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휠체어나 침대차에 실려 들어온다. 여러 번에 나누어 서서히 좁아지거나 터지는 뇌혈관. 그 진행을 막기 위해 집중 치료실에서 다양한 약을 투여하며 경과를 지켜본다. 상태가 좋아지면 일반 병실로, 상태가 나빠지면 중환자실이나 수술실로 옮겨지는 고위험군 환자들.

이 병실에 있는 다섯 명의 환자들 중 나는 신체나 언어 능력이 그나마 제일 좋아 보이는 환자였다. 하루 먼저 들어온 옆 침대 할아버지는 싫고 좋음만 겨우 이야기 할 수 있는 상태로 누워있기만 하셨고, 할아버지 왼편에 자리 잡은 남자는 겉보기에 건강해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맞은 편에는 보호자도 없이 홀로 들어온 아저씨가, 그 옆엔 늘 커튼에 가려져 얼굴 보기 힘든 할머니가 계셨다.

기계음만 들리는 고요한 병실 안에서 우리는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옅은 레몬빛 커튼으로 나누어진 자신 만의 구역에 누워 누구보다 발버둥치며 싸우고 있는 우리. 나이도 성별도 다르지만 아마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이러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면 어찌해야 하나.’ 작은 병실 안에서 평범한 삶의 마지막을 꿈 꾸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번도 내 삶이 귀하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날 밝으면 몸을 움직이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노곤하면 잠을 자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며 하는 이 행동을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니 월, 화, 수, 목, 금, 토, 일 휴일도 없이 마음껏 써먹었던 거다. 내 몸뚱이 내가 열심히 쓰겠다는데 뭐라 할 사람 누가 있겠는가.

젊은 오기와 치기로 아낌없이 썼으니 원망할 곳도 결국엔 ‘나’였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이 나서 누운 지금,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마음은 폭풍을 맞이했다. 어느 날은 돌풍이 불다가 어느 날은 고요 속에 잠겨 들었다. 3일째 밤, 내 마음엔 폭풍이 불어 닥쳤다. 머릿 속엔 후회와 분노 만이 자리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백 번의 후회가 시간을 되돌려주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가시가 잔뜩 돋아난 고슴도치마냥 씩씩거렸다.

일만 생각하고 달려온 삶의 끝이 이렇게 허무하다니. 아직 못해본 것들이 잔뜩인데. 먹고 마시는 것도, 괄약근에 힘 조절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일상적인 생활도 할 수 없는 내 몸뚱이가 못내 한심스러웠다. 환자의 몸 상태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커튼은 치지 말아달라는 간호사의 부탁도 듣지 않았다. 그 어떤 그림자도 들어서지 못 하게 얇은 커튼 한 장을 방패 삼아 꽁꽁 둘러싸 버렸다.

4일 밤 ‘만약에’

‘그나저나 일은 잘 처리됐을까?’

이런 상황에서 조차 나는 제일 먼저 머릿 속에 일을 떠올렸다. 가슴에 돌 하나를 얹은 듯 답답한 것도, 병실 침대에 발 뻗고 눕지 못 하는 것도 모두 던져놓은 일 때문이었다. 누구는 버리고 싶어 안달이라는데, 나는 왜 버리지를 못하는 건지. 원수 같은 일 때문에 몸에 병을 싣고 드러누웠는데도 여전히 미련이 남아 기웃거리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래도 나는 일이 좋았다. 섭외를 하고, 화면 구성을 하고, 글을 쓰고, 자막을 뽑고 온전한 프로그램 한 편이 되기까지 쏟아 붓는 그 시간과 노력이 짜릿했다. 물론 박봉에 밥 먹듯 밤을 새고 힘이란 힘은 다 빼니 썩 좋은 일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살을 깎아먹는 일이 못내 사랑스럽다.

“언니, 저 사실 병원에 입원했어요.”

친한 팀 언니에게 한 손으로 겨우 겨우 문자를 보냈다. 고작 한 줄 썼을 뿐인데 머리와 등 뒤로 식은 땀이 맺혔다. 몸이 곧 재산인 이 바닥에서 아프다는 것을 드러내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다. ‘저는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놓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약점을 보이는게 싫어서 처음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땐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청해야 할 때였다. 언제 퇴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지금에는 물러서야만 했다. 다행히 두 팀이 번갈아 가면서 준비하던 프로그램이고, 내가 맡은 팀은  다룰 아이템까지 정해놓은 상태라 누군가에게 부탁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뭐? 왜? 무슨 일이야? 괜찮은거야?”

쓰러지던 당시 나는 8년차 TV 교양 프로그램 작가였다. 그때의 나는 들어오는 일을 마다않고 받았다. 프리랜서라는 위치가 삶을 늘 불안하게 만들었기에 쓰러지기 2주 전에는 외주 맡은 일을 몇날며칠 밤을 새가며 마쳤고, 1주 전에는 여행지 촬영을 위해 장거리 출장에 따라 갔었다. 쓰러지던 그 날은 아이템을 찾고서 모처럼 이른 저녁 퇴근하는 중이었다.

“언니 미안해요. 생각나는 사람이 언니 뿐이라...” “응, 말해봐. 뭐든 도와줄게!” “혹시 다음 편 자막이랑 그 다음 편 준비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곧장 전화가 걸려왔다. 다행히 약 덕분에 언어 기능은 돌아와 있었다. 다만 부탁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려왔다. 나에겐 일이지만 나누는 누군가에겐 짐이 될 터. 부탁하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로 맡고 있는 일의 무게를 알기에 미안함이 커졌다.

‘다행이다. 맡았던 프로젝트는 다 넘겼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언니한테 부탁했고... 프로젝트 파일이랑 대본 파일은 미리 정리 좀 해둘걸. 혹시라도 내가 정리 못하게 되면 누가 백업 좀 해주면 좋을 텐데… 컴퓨터 비밀번호를 누구한테 줘야 하나. 정말 혹여나 되돌아가지 못할 상황이 생기면 이것도 부탁해야 하는데...’

‘되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앞으로 일을 못 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저 살아만 있는 상태가 되면 어떡하지. 아직 하고싶은 프로그램이 너무 많은데.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데. 그저 지금의 나로 살고 싶은건데…’

만약 인생을 조금만 천천히 달렸다면 어땠을까. 나의 오늘은 달라졌을까? 프리랜서로서 일하는 부담감을 좀 덜었다면 어땠을까. 더 오래 일할 수 있었을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의 ‘만약에'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일 앞에서 설레고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수록 정리하기 힘들었다. 생사의 경계선에서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흘려버린 선택의 순간이었다.

5일 밤 ‘흔적’

태어난 후 남겨지는 것이 거의 없다 생각했는데, 하나 둘 찾아보니 내가 살아온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모든 걸 컴퓨터로 해결했으니 살아왔던 흔적이 제일 많이 남은 곳도 인터넷인데. 이리저리 개인정보를 흘려둔 곳이 너무 많았다. 부모님은 이를 다 못 챙길테니 결국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었다.

‘그동안 가입했던 사이트가 어디어디 였더라. 탈퇴해야 하는데, 어디 보자... 다음이랑 네이버, 카카오톡, ㅇㅇ은행, ㅁㅁ쇼핑몰, 아이고야 아이디랑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다시 찬찬히 분야 별로 생각해봤다. 금융부터 시작. 주거래 은행은 한 곳이니 그 은행만 해결하면 된다. 주식한다고 개설만 해둔 증권 계좌도 없애야 한다. 지갑 속에 있는 카드 한 장도 생각났다. 빚도 연체도 대출도 없으니 해지만 잘 하면 된다. 아무래도 이건 어머니 몫인 듯 하다.

문제는 각종 쇼핑몰인데. 겨우 물건 한두 개 사면서 더 싼데 찾는다며 이곳 저곳 가입했던 과거의 나에게 잔소리부터 날렸다. 어느 사이트에 가입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기억 못하는 걸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찾으랴. ‘보통 1년 정도 로그인 안 하면 휴면 계정으로 바뀌니까 알아서 처리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휴대전화로 문자 한 통이 왔다.

‘고객님, 한정판 0000이 새롭게 출시됐습니다. 앱 연결로 보시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게임부터 각종 쇼핑몰까지 모두 휴대폰 앱으로 가입했었다. 앱으로 보면 5% 할인 쿠폰을 준다는 말에 별 생각 없이 가입한 게 반일텐데. 만약 멀쩡한 모습으로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찾아서 전부 없애 버리리라.

대부분 내 정보들은 삭제하고 탈퇴해서 처리하면 되지만, 딱 하나 그렇게 처리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싸이월드. 만여 개가 넘는 사진 속에 나와 친구들의 추억을 담고 있으니, 세상에서 아주 지워버리기가 싫었다. 살아왔던 시간을 한순간에 지워버리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는다. 몸은 사라지더라도 그날의 시간만은 온전히 남았으면 싶은, 마지막 욕심이었다.

‘참, 휴대폰에 남은 사진들도 많은데...’

지금껏 휴대폰으로 열심히 찍어놓곤 저장만 해뒀는데. 그 날의 모습들이 보고 싶어졌다. 별안간 휴대폰 사진첩을 열었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보낸 시간과 공간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날은 뭐했더라.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네. 촬영장 날씨가 참 더웠지. 맞아. 이날 음식 참 맛있었는데...’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기며 지울 사진과 남길 사진을 선택했다.

6일 밤 ‘이별식’

점점 지쳐갔다. 함께 들어왔던 환자들은 모두 일반 병실로 옮겨가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고인물처럼 남은 건 나 혼자였다. 좁아진 뇌혈관의 이유를 찾아야겠다던 의료진은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다양한 검사를 하고 있었고 약의 개수는 조금씩 늘어나 있었다. 기다림이 계속될수록 몸은 피곤했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은 차분해졌다.

불 한 점 없는 깜깜한 바다 위를 여행한 적 있었다. 커다란 배는 망망대해 파도소리만 들리는 그곳에서 길을 잃지 않고 오직 한 곳만을 향해 나아갔다. 그 배가 향하는 곳에는 작든 크든 불빛을 보내오는 등대가 자리했다. 이정표 하나 없는 물 위를 그 불빛 하나에 의지해 나아가던 배.

지금 여기에는 짙게 숨 쉴 때마다 들리는 일정한 기계 소리가 전부다. ‘삑삑삑삑….’ 검은 파도가 언제 삼켜버릴지 모르는 널따란 바다 위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의 고비 길 위다. 이곳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있는 건 가족의 따뜻한 손과 눈물, 그리고 작은 휴대폰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불빛이었다. ‘괜찮아요?’, ‘사무실에 언제 오냐?’, ‘잘 이겨낼 거다’, ‘누가 누워 있으래? 빨리 와!’, ‘뭐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거 쭉 적어 놔. 실컷 먹여줄게’, ‘보고 싶다’ … 수많은 글자와 목소리가 휴대폰을 가득 채웠다.

그간 일에 치이며 사느라 주변을, 특히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찾아뵈어야지, 언젠가 연락해야지. 삶의 긴 시간만 믿고서 뒷전으로 미뤄뒀던 ‘사람’이라는 존재. 쓰러져 누워보니 내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엄마랑 진작 여행 좀 다녀올걸. 동생이 보자 했을 때 왜 바쁘다고만 했을까. 얘랑은 연락 못한지 1년이 넘었네. 선배님께는 새해 인사도 못 드렸는데. 정말 나 혼자 사는 데만 바빴구나.’

문자와 목소리를 남겨준 사람들을 쭉 떠올렸다. 너무도 보고 싶었다. 어머니와 함께 병실에 누워있는 순간에도 어머니 얼굴이 보고 싶고, 사람들의 문자를 받는 와중에도 사람이 보고 싶었다. 그립다는 마음, 외롭다는 감정을 나는 이때 배웠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암투병 끝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가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봤다. 웰다잉(well-dying) 바람이 한창 불 때였다. 할아버지는 청첩장 돌리듯 설렌 표정으로 초대장을 돌렸다. 보고싶은 사람들, 사과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초대장에는 드레스 코드와 함께 부탁의 말이 적혔는데, 검은색 옷은 입고 오지 말 것! 절대 울지 말고 나의 마지막 길을 웃으며 축하해 줄 것! 이 두 가지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쁜 옷을 입고서 이별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오열하지 않았다. 다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추억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보며 앞으로 먼 소풍 길을 떠날 할아버지에게 하고픈 말을 남겼다. 할아버지 역시 찾아와 준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할아버지의 행복했던 웃음이 지금 눈 앞에 아른거린다. 나도 병원이 아닌 집으로 그들을 초대하고 싶다.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다함께 촛불을 끄며 그동안 잘 살아줘서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 나누고 싶다. 찾아준 사람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마지막 편지도 남기고 싶다. 아, 중간쯤 살아온 내 생애 필름을 함께 보며 추억도 나누고 싶다. 할아버지의 그 풍만한 마지막 순간을 나도 꿈꿔본다.

만약 죽기 전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의 배웅을 받고 싶을까. 하객 명단을 쓰듯 ‘이별식’ 명단을 머릿속에 써 내려갔다.

‘아버지, 어머니...’

얼마 전 집에서 하루라도 편히 주무셨으면 하는 마음에 어머니를 본가로 보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길을 홀로 내려가지 못하셨다. 병원에서 서울역, 서울역에서 집까지 가는 그 쉬운 길이 생각나지 않으셨단다. 머릿속은 깜깜하고 발길은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울에 사는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데려다 달라 부탁했단다.

나중에 그 일을 고모로부터 들었다. 충격으로 인해 순간적인 기억상실 같은 거였다. 어머니는 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참으로 많이 우셨다고 했다. 아픈 딸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어머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표시 내지 않으셨다. 어디선가 나 몰래 수백 번의 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토해내셨겠지.

그 무너진 마음 앞에 나의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에게 위로는 내가 무사히 병실 밖을 나서는 것 뿐이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전할 수 있는 말은 그 어떤 것도 없다. 그저 꼭 안아드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다. 두 분의 딸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말을 온기로 전하는 것.

‘그리고 사촌 동생...’

며칠 전 찾아온 동생 생각이 났다. 3일째 되던 날 사촌 동생이 찾아왔다.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형제가 없는 나에게 마음 한 쪽과도 같았다. 적어도 내게 그 아이는 그런 존재다. 혹여나 충격 받을까봐 이야기하지 말아달라 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다.

“언니… 아프지 마요…”

나를 부르기만 하고 한동안 서서 아무 말도 없이 바라만 보던 그 아이가 울음을 토해냈다. 아프지 말라는 말은 죽지 말라는 소리였다. 평소 단단한 성격의 그 아이가 내 앞에서 굵은 눈물 방울을 숨죽여 쏟아냈다. 그 앞에서 나는 조그맣게 괜찮다고만 되뇌었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며 등을 토닥였다.

늘 침착하던 녀석이 아프지 말라며 우는 그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위로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와 함께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 여행, 맛있는 거 먹기, 쇼핑하기, 함께 걷기, 요리해주기, 생일 축하하기 등 일상적인 것부터 결혼식 축하하기, 제부에게 내 동생 행복하게 해주라 당부하기, 조카 안아보기, 조카에게 선물하기 등 앞으로의 삶까지. 함께하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앞으로 함께할 수 없어 미안하다 말해야지.

‘친구 S와 친구 U, 친구 J도 있지...’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 S. 그의 첫 메시지가 너 없으면 못 산다며 약해지지 말라던 말이었다. 그 말에 얼마나 고마웠는지, 따뜻해졌는지. 메시지를 보고 느낀 감정을 완벽하게 전하지 못할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사실 난 그날의 온기와 햇볕의 조도까지 기억한다고.

자매처럼 미친 듯이 싸워댔던 친구 U. 같은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하루가 멀다고 싸워댔다. 그러다 보니 정이 들었고 서로의 소울메이트가 됐다. 눈물 많고 마음 여린 네가 울지 않길 바라며, 지금 이 글을 전하는 순간 난 최고로 행복하다는 걸 전하고 싶다.

고민 상담소 친구 J. 우리의 아지트는 백화점 8층에 설치된 의자였다. 역 5번 출구가 훤히 보이는 그 벤치는 우리 지정 좌석이었다. 그 의자에 앉아 서로의 고민, 서로의 힘듦, 서로의 삶 이야기를 주고받던 시간이 내게는 최고의 에너지였다. 앞으로도 서로의 고민을 나눠 들고 가야 하는데, 되려 너에게 가장 큰 고민을 안기고 가는 것이 미안하다고. 좀더 함께 앉아있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그리고 선배님과 사무실 동기, 언니들까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꼬박 십년의 시간을 보냈다. 1년도 어려운데 하루하루가 모여 십년이 되기까지 나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어리석게도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을 줄 알았다. 언젠가는 베풀어야지, 언젠가는 표현해야지 했던 마음을 꽁꽁 싸매둔 것이 제일 후회된다고.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이별식에 부르고 싶은 얼굴들이 꽤 많다. 내가 그들을 생각하며 떠올린 메시지는 전부 “사랑한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뿐이었다.

7일 밤 ‘상속자들’

나의 마음은 몸과 함께 병을 앓고 있었다. 보통 큰 병에 걸린 환자들에게는 병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그걸 ‘심리반응 4단계’라 부른다. ‘부정기’와 ‘우울기’, ‘낙관기’와 ‘철학에 귀의기’ 이렇게 네 단계로 나뉜다.

제1기인 부정기는 ‘내가 이런 병에 걸릴 리 없다’는 불신으로부터 시작된다. 강한 부정을 통해 마음의 불안을 없애려 하고, 무너지는 마음을 지키려는 방어가 시작된다. 제2기인 우울기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일상생활이 무너지면서 자신을 향한 혹은 주변을 향한 분노가 시작된다. 제3기인 낙관기엔 다시 살기 위해 새로운 희망의 끈을 만든다. 어떻게든 싸워보겠다는 환자의 의지가 이 시기에서부터 나온다. 마지막은 철학에 귀의기. 나와 병 사이에서 나름 타협을 보고,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단계가 된다. 이 시기가 되면 그간 막 살았던 사람도 자신의 인생관이 생기고 삶의 철학이 생기게 된다.

전날 밤의 이별식은 마지막 고비 같은 거였다. 이별식을 마지막으로 부정기와 우울기에서 벗어났다. 몸은 아직 그대로지만 마음만은 혼수상태를 벗어나고 있었던 셈이다. 그동안 나는 커튼 뒤에 숨어 날선 고슴도치처럼 누구든 공격하거나 텅 빈 조개 껍질처럼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병이 생기는지도 모르고 여유없이 살아온 나에게 그리고 답을 찾지 못하는 의료진에게 모든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어떻게 이렇게 막 살아왔니?, 조금만 뒤돌아 봤어도 몸이 힘들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너의 미련함이 널 망쳤어!’, ‘오늘은 이 병, 내일은 저 병 그래서 결론이 뭐야?’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우를, 몇 년 같은 며칠을 버텨낸 지금. 나의 새벽은 생각보다 더 고요하다.

‘내게 남은 건 뭐가 있었지?’ ‘남겨진 사람들에게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별식을 통해 내 곁의 사람을 정리하고 나자, 이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좀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아무리 일에 미친 듯이 살아왔다 해도 재산이 뭐 얼마나 있겠는가. 프리랜서 원고료는 박봉이라 수천을 번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저축한 돈과 사망보험금 정도일거다. 그리고 아끼던 물건들이 전부이리라. 찬찬히 고민을 시작했다. 퇴원하지 못했을 때를 생각해야 했다.

‘질병사망보험금, 통장에 든 현금 천만 원, 앞으로 들어올 한 달 치 원고료, 지난 번 맡았던 프로젝트 비용, 그리고 책장 가득 꽂힌 책, 아끼는 레고와 인형들… 아! 또 있다. 큰 맘 먹고 구입한 정장과 명품 가방 하나, 물려받은 액세서리 세트까지. 아예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꽤 있네.’

모두 나에게 행복을 주었던 것들이다. 통장에 조금씩 모았던 천만 원은 한 편씩 써서 떠나보낸 글에 대한 추억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통장에 돈이 모였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 안에 모인 만원, 만원은 내가 적어 낸 단어들이 모인 거다. 어느 화가의 이야기를 썼을 때는 ‘제주 바다의 파랑’이 모였고 어느 맛집 사장님의 삶을 적었을 때는 ‘달콤하다, 고소하다’처럼 세상 모든 맛에 대한 찬사가 모였다. 그 ‘단어들’은 질병사망보험금과 함께 부모님께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한 달 치 원고료와 프로젝트 비용은 사촌 동생에게 주고 싶었다. 동생은 최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간 배웠던 내용과 전혀 다른 학문으로 대학원에서 공부중이다. 녀석의 용기 있는 도전에 응원을 해주고 싶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로 동생에게 선물다운 선물을 줄 수 있어 다행이다.

남은 건 책장 가득한 책, 한정판 레고, 인형, 그리고 명품 가방, 정장, 액세서리 세트. 모두 큰 돈 되는 물건은 아니지만 내게 의미있는 물건이었다. 명품 가방은 새 직장으로 옮긴 친구에게, 레고와 인형은 아이 키우느라 바쁜 친구에게, 액세서리 세트는 다른 지역으로 터전을 옮긴 친구에게 남겨야겠다. 이제 책과 정장만 남았다. 책은 동네 도서관에 기부하고, 정장은 아름다운 가게에 내놓아야지. 아무것도 없이 산 줄 알았는데 남길 것도 많고 전해줄 이도 많고. 이 정도면 꽤 잘 살았네!

‘하느님, 혹시 제가 이 병실을 무사히 걸어 나간다면 저에게도 제 곁의 사람들에게도 좀 더 나누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후회만 남는 오늘을 살지 않겠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소원’이라는 걸 빌어본 적 없었다. 신을 믿지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이었기에. 그런 내가 처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한 번의 삶이 다시 주어진다면 내게 충실한 채로 살아가고 싶다고. 전화로 따뜻한 목소리를 전하고, 응원 메시지를 남기고, 먼 길 찾아와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 내 곁의 사람들과 후회없이 살고 싶다고. 이 밤 가득 소원을 담았다. 오직 나와 내 곁의 모두를 위한 소원으로.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어코 잘 살아내겠다고.

8일 아침 ‘내일의 내일’

생사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던 7일, 약물과 수액을 이용해 좁아진 혈관을 넓히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더는 넓힐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몸은 어느 정도 적응을 한 상태이고 지금 투약하는 약으로 혈관을 더 좁아지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다행이에요! 이제 일반 병실 갈 수 있겠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시는 여기서 만나지 마요!”

그렇게 8일째 되던 날 아침, 드디어 일반 병실로 가도 된다는 결정이 났다. 일주일을 전담해준 간호사와의 작별인사를 끝으로 집중 치료실을 나섰다. 올 땐 휠체어에 실려 들어왔는데 나갈 땐 내 발로 걸어 나갔다. 기우뚱대지 않고 제대로 걸어 나갔을 때의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내일의 내일’을 사는 나의 몸은 어떻게 됐을까? 병원에 들어온지 14일 만에 무사히 퇴원을 했다. 재활이 필요없는 상태로 장애 없이 건강하게 병원 밖을 나섰다. 하지만 여전히 약을 먹고 있다. 내 뇌혈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느 날은 서서히, 어느 날은 빠르게 매년 조금씩 조금씩 좁아지고 있는 상태다. 벌써 뇌로 가는 커다란 혈관 몇 개는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자가면역질환 일수도 혹은 또 다른 병일 수도 있단다. 무엇이 되었든 희소병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참 신기하다. 뇌로 향하는 혈류 공급이 원활하지 않기에 작은 허혈(뇌의 혈류 흐름이 좋지 않아 힘 빠짐, 말 어눌함 등의 증상)이 잦지만, 내 몸은 고비를 넘기고 또 적응 중이다. 큰 혈관이 없어진 대신 우회로를 만들어 원활한 혈류 공급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연히 면역항암제를 사용하게 되면서 그 효과로 혈류 흐름이 꽤 좋아졌다는 검사 결과도 들었다. 나의 몸은 내 의지보다 더욱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오늘’을 사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죽음의 문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선 후, 내 목표는 ‘오늘 하루 제일 열심히 살기’가 됐다.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을 만든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진을 남기는 거였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의 모습을 매일 남기고 있다. 언젠가 마지막이 되었을 때 제일 활짝 웃는 모습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다.

작별 준비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것도 찾았다. 돈 벌기 위해 인스턴트 글쓰기만 해오던 나는 드디어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 모임을 가지며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내고 있다. 뇌의 흐름을 위해 우리말을 외우고, 외국어 단어도 공부 중이다. 최근에는 미술도 시작했다. 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흘려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살고 있다.

물론 일도 다시 시작했다. 전처럼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일하고 있다.

너무 빡빡한 거 아니냐며 뭐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나는 충분히 게으르게 살고 있다. 남은 시간은 다른 이들을 위해 쓰려고 비워뒀기 때문이다. 먼저 아버지, 어머니 두 분과 같이 하고 싶었던 것들을 했다. 콘서트 가기, 여행하기, 미용실 가기, 쇼핑하기, 영화 보기처럼 소소한 것들이다.

하루는 전주 소목장의 빗이 보고 싶어서 어머니와 함께 번개 여행을 떠났다. 전주 시가지를 둘러보고 소목장의 빗을 구입하러 갔는데, 얇은 빗살과 빗 위에 그려진 문양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어머니에게는 십장생 문양을 골라드렸고, 나는 사랑을 뜻하는 매화 문양을 골랐다. 한참을 구경하던 어머니는 십장생 문양을 내게 쥐어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왜? 이건 엄마꺼라니까.” “그냥.. 이건 내가 너한테 사주고 싶어서.” “왜? 금방 죽을까봐? 허튼 걱정 마셔. 나 오래오래 살 거야.”

매년 여름과 겨울, 방학 기간이 되면 사촌 동생을 만나러 가는 짐을 싼다. 어느 날은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날은 말없이 책만 들여다보기도 하고, 어느 날은 공연을 보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서로의 옷을 골라주며 미친 듯이 쇼핑만 할 때도 있다. 서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길 바라며 곁을 지킨다. 그 아이가 나에게 ‘살아달라’고 빌었던 그 소원을 열심히 이뤄나가고 있다. 아! 녀석에게 주고 싶었던 원고료는 지난 여행 경비로 신나게 사용했음을 밝힌다.

요즘 MZ들 사이에 ‘인생 네 컷’이 유행이라 들었다. 나를 통해 내일과 내일의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단 걸 함께 알아간 친구들은 하루하루 건강하게 만나는 ‘오늘'을 절대 그냥 넘기지 않는다. 시간을 박제할 순 없지만 우리도 인생 네 컷으로 그 날의 얼굴과 모습을 담으며 다음 날을 기약한다. ‘우리 또 건강히 만나자!’

검진을 위한 정기 예약 날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중 ‘뇌 기증자를 모집한다’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뇌 질환 연구를 위해 사후 뇌 기증자를 찾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뇌 기증이라… 한두 번의 고비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장기 기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면역항암제를 쓰게 되면서 장기 기증이 더는 힘들 수도 있지만,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마지막을 의미있게 보내달라 말했다. 육신은 흙으로 되돌아 가더라도 ‘나’에 대한 의미만은 남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죽음을 마주했던 7일 간 이후, 나는 삶의 기준을 매일 고쳐 세우고 있다. 살아온 시간이 헛되지 않게, 걸어온 걸음이 부끄럽지 않게, 생각해온 마음이 무의미하지 않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에게, 남에게 어떻게 나눠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길 원했던 돈과 가방, 정장 그리고 책과 물건들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죽어서 남기는 것보다 살아서 남기는 것이 더욱 소중한 것임을 깨닫고, 나와 내 곁을 위해 하루하루 소중한 시간을 새기는 중이다. 함께 얼굴을 보고,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보내면서. 그리고 고민중이다. 이제 남에게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죽어서 육신을 남기기 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일들을 고민한다.

7일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눈을 감으면 다시 그 병실 속 침대일 것 같아, 때론 섬뜩한 차가움을 느낀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판결을 기다리듯 긴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날들이 또 반복될까봐, 내 어리석음을 다시 마주해야 할까봐 그것이 두렵다.

삶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여전히 진행중이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반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7일 간 어둠 속에서 나는 집착과 욕심, 그리고 내일을 버렸다. 대신 매일 돌아오는 오늘 하루를 얻었고, 사랑을 느꼈고, 외로움을 알았고, 사람을 배웠다. 만약 7일 간의 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어리석게도 삶의 유한함을 알지 못했을 거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쳇바퀴 돌 듯 내일이 계속된다 여겼을 거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삶은 영원이 아니다.

2023년 여름, 장마로 빗줄기가 장대처럼 뻗치다가 멈췄다. 가느다란 햇살이 한 줄 비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고 비가 멈춤에 감사하고 햇볕이 있음에 감사한다. 나의 오늘과 현재를 부모님, 친구들,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까지도 나는 잘 살아냈습니다.”


Edit 금혜원 Graphic 조수희

해당 콘텐츠는 2023.8.23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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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곰 에디터 이미지
크크곰

먹고, 살고, 즐기고. 인생의 희로애락과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하는 방송구성작가. 우연히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 온 후 ‘어떻게 하면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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